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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대곤수필집_어머니가 주신 한 주전자의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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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1 10:30:1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내가 본격적으로 취한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던 때는 군에 입대하는 날부터였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일학년 때 대취한 걸 빼고 나면 다른 친구들보다는 오히려 늦게 술맛을 알게 된 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내 주변에는 불량기도 있고 술도 제법 마시는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다.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켜고 갈지자걸음으로 비틀거리는 것이 무슨 호기인 양 뽐내는 녀석들도 더러 있었고, 집안에 숨겨 놓은 술독을 훔쳐다가 바닥내는 것이 사나이다운 짓이라고 자랑삼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일찍이 가지밭 똥통에 빠진 끔찍한 경험을 한 처지였기 때문인지 공포와 두려움으로 술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다. 어느 날 한 바구니나 되는 보리밥을 혼자서 먹고 체해서 가스 활명수 한 병을 마셨는데 체한 밥이 내려가기는커녕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친구들은 “가스명수 먹고 취하는 놈은 처음 보았다.’고 웃어댔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집히는 게 있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 가스명수를 마시고 취한다면 나는 앞으로 술을 마실 수 없지 않겠는가 하고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까짓것 마시지 않으면 될 게 아니냐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다시 술을 마시게 된 것은 어려운 시대 상황과 맞물린 청년기의 내 주변 환경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암울하게 어려웠던 상황은 내 사춘기 시절을 멋도 낭만도 없이 흘러가게 했다. 한껏 뽐내고 거드름 피우고 싶은 건 마음뿐이고, 점퍼 하나 제대로 사업을 돈이 없어 뉴욕의 뒷골목 교회에서 거둬들인 구호물자인 여자 상의를 반코트처럼 입고 폼을 잡을 때였다. 어디 그뿐인가? 축구공 하나 제대로 살 돈이 없다 보니 친구 녀석들과 함께 모여서 한다는 짓이 남의 참외밭이나 복숭아밭을 뒤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먹을 것조차 궁했으니 술이라고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것도 소주는 맑은 술이라 고급에 속했고 우리 같은 서민들은 탁한 막걸리를 찾았는데 그나마 그것도 마음대로 마실 처지가 못 되었다. 어쩌다 몇 푼의 돈이 생기면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대폿집으로 가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지만 그럴 때면 나는 술에 대한알레르기 반응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끼곤 했었다. 모자란 돈에 나까지 마음 놓고 마셔 버리면 턱없이 부족해 입맛만 버릴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술은 마시지 않고 안주로 나온 배추 뿌리나 아작아작 씹으면서도 술집에 악착같이 따라다녔던 것은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친구 녀석들은 차라리 아까운 술 축내지 않는 나를 고맙게 생각하고 술을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술에 대한 나의 거부 반응은 그 후에도 상당히 오래 지속된 채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철이 든 후 취하지 않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건 아마 그때뿐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그때 맑은 눈으로 쳐다본 세상의 기억이 꼭 깨끗하고 아름다웠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물론 그 무렵이 내 인생 중에서 가장 방황하고 좌절에 빠져있을 때였으니 그때의 기준으로 단언한다는 것은 틀린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지금도 분명한 것은 술이 없는 세상이라 해서 꼭 깨끗한 것만은 아닌 성싶다.

 

사실 나는 그 무렵 몹시 힘들고 어려웠었다. 그때 팔남매의 차남이었던 나는 형의 갑작스런 요절로 본의 아니게 장남으로 승격했다. 팔남매나 되는 가난한 시골 농사꾼 집에서 장남 책임이 얼마나 중대하다는 것쯤은 일찍이 모를 리 없었으니 나는 하루아침에 두 다리가 묶여 버린 망아지처럼 안타깝게 버둥댈 수밖에 없었다. 형이 돌아가실 때 나는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몇 달을 방황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학비도 조달할 길이 없어 학업을 중단해야 할 판에 이대로 허송세월할 게 아니라 입대해서 군복무를 마치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 자리에서 고향 읍사무소에 지원서를 보냈다. 입대날을 기다리며 이곳저곳 서울 바닥을 헤매다가 입대 전날에서야 고향으로 내려왔다. 방학 때도 아닌데 웬일이냐고 반색을 하시는 어머니께 차마 ‘내일 입대하기 위해서’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형의 요절로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는 어머니께 내 입대 문제가 또 다른 충격을 줄 수도 있다는 어줍잖은 효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나 혼자만의 마지막 고향의 밤을 보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 기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방에서는 북쪽과 산발적인 교전이 있다는 풍문이 심심찮게 들리던 때였다. 때문에 입대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황까지 각오해야 하는, 즉 목숨을 내놓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두 기피하는 입대를 지원까지 해서 가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일종의 좌절이었다. 어쩜 그때까지 내 가슴속에 담고 다니던 꿈이며 희망 모두를 포기하는 일종의 허탈감이기도 했다.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은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웠다. 새벽녘까지 나 혼자서 이곳저곳을 헤매었다. 늪사지 오솔길이며 산의 키 작은 소나무 숲 그리고 공동묘지의 이름 없는 무덤 하나까지 내게는 가슴에 묻어 두고 꺼내고 싶지 않은 소중한 추억들이、얽힌 곳이었다. 뜬눈으로 새벽을 맞은 나는 애절했던 고향의 추억들을 이슬 젖은 바지에 닦아 모두 버리기로 하고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신발 끈을 조이면서 말했다.  “어머니, 저 오늘 입대 합니다” 나는 애써 태연하려 했다. “너 지금 뭐라 했냐?” 갑자기 어머니는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군대에 갑니다.” “언제?”  “지금요.”   “독한 놈.” 어머니는 나를 힐끗 쳐다보시고는 휭하니 안방으로 들어가 셨다.  “어머니?”  나는 참았던 눈물이 슬픔과 함께 북받쳐 올라왔다. 

 

“기다려라”    “지금 가야 합니다.”   “조금만 ……,”  어머니의 그 작은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 방안에서 나오신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대문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그 자리에 허탈하게 서 있었다. 잠시 후 어머니 손에는 선지국이 한 그릇 들려 있었다. “이거라도 먹고 가거라.” 나는 말없이 어머니가 쥐어 주는 수저를 들고 뚝배기에서 선지 한 덩이를 건져 입 안으로 우겨넣었다. 목이 메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옜다, 이것부터 한 모금 하거라.” 언제 가져오셨는지 어머니가 이번에는 막걸리 한 사발을 철철 넘치게 따르고 계셨다. “어머니.” 하지만 나는 선뜻 술사발을 받아들 수가 없었다. 술에 대한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재촉하시는 어머니 손을 뿌리칠 수가 없어 나는 조심스럽게 막걸리 사발을 받아 들었지만 선뜻 마실 수가 없었다. “어서.” 몇 번의 어머니 채근에 나는 두 눈 딱 감고 쭉 마셔 버렸다.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막걸리는 시원스럽게도 목으로 쑥 넘어갔다. 카- 어디 그뿐인가? 초등학교 때 마시던 농주의 그 맛 그대로였다. 그래서인지 목이 메이던 선지 덩어리도 함께 꿀쩍 넘어가 버렸다. 갑자기 아랫배가 뿌듯해지면서 두 주먹과 두 다리에 벌컥 힘이 솟아나는 듯했다. 선지가 녹아 혈관 속으로 빨려드는 듯 어깨까지 힘이 느껴졌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지금껏 마음속으로 요동치던 알 수 없는 두려움도 암울했던 기분도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눈앞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애써 눈물을 감추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집결지인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내게는 처음부터 술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애시당초 넉살도 용기도 모자란 나약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힘들고 지칠 때 술을 한잔씩 하면 흔들리던 마음도 가라앉고 아랫배에 힘이 실리면서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겨나곤 했었다. 입대하는 날도 어머니가 주신 한 주전자의 막걸리 덕분에 나약해지던 마음도 잊고 사나이답게 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날 털어버린 술의 알레르기로 어려운 군생활을 하면서 술과 벗해 즐겁게 보내기도 했고 또 친구들과 어울려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순대국집 앞을 지날 때면 뚝배기에 담긴 선지 한 덩이에 침을 삼키면서 지극한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스레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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