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의 세계지도, 고문경찰이 그렸다!”
지금도 자다 일어나 아버지 생각하며 눈물 흘려
박춘환(좌) 임봉택(우) 한겨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주꾸미배를 타기 시작, 평생 어부로 살아온 임봉택(69)씨. 그는 1947년 군산시 옥도면 개야도에서 둘째 아들(6남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별다른 직업이 없었다. 집안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끼니때 보리죽 먹기도 어려웠다. 제대로 못 먹어서인지 체구도 왜소했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매사에 적극적이고 깡다구 센 소년으로 성장한다.
56년이 지난 지금 성덕호(근해에서 주꾸미, 꽃새우 등을 잡는 소형어선) 선주가 된 임씨. 그는 ‘국가폭력 고문 생존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공안정국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2년 1월 초 수사기관에 불법 구금되어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고문, 잠 안 재우기 고문 등 온갖 가혹 행위를 당한 것. 그는 또래에서 강골에 속하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려면 가슴과 목, 어깨 등이 쑤시면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임씨 고향 개야도는 군산에서 20km 남짓 떨어진 고즈넉한 섬으로 봉우리가 없는 게 특징이다. 60~70년대 주민은 1000여 명. 한때는 어업 중심기지로 4~8월에는 삼치, 조기 파시가 형성되어 서해안 어부와 고깃배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엔 서해에서 조업하다 북한 경비정에 피랍되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정권 연장을 위해 삼선개헌을 준비하던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후반부터 귀환 납북어부들을 미필적 고의를 적용하여 처벌하기 시작하였다.
개야도 선적 광룡호(1960), 대덕호(1963), 승룡호(1967), 영창호(1968), 제5공진호(1968) 등이 납북됐고, 대표적인 남북어부 간첩조작사건은 ‘임봉택 외 2인의 반공법 위반사건’, ‘서창덕 간첩조작 의혹 사건’, ‘정삼근 간첩조작 의혹 사건’(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기록) 등으로 관련자 모두가 최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건 피해자와 참고인으로 경찰에 불법 구금되거나 조사받은 주민만 1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고문당하기 전에는 친구가 진짜 간첩인 줄 알아
대부분 어로작업이 근해에서 이루어지던 1971년. 임봉택은 스물다섯의 청년 어부가 되어 있었다. 당시 서해안 어선들은 12월부터 휴어기에 들어갔다. 안강망 선원이던 임씨도 서울에 사는 사촌 누이를 만나기 위해 장항선 열차에 오른다. 호주머니가 두둑했던 그는 휘황찬란한 내온 불빛과 꿈같은 연말연시를 보낸다. 그리고 1972년 1월 초 은세계가 펼쳐지는 기차여행을 즐기며 군산에 내려온다. 죽음보다 징그러운 고문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군산에는 저녁때 도착혔지. 사촌 형(임OO)이 제일극장 뒤에 살었는디 끗발이 좋았지. 보안대에 있었거든.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형수가 깜짝 놀램서 군산경찰서 형사들이 나를 찾으러 동기간 집들을 쑤시고 댕겼다는 거여. 무슨 일인지 궁금혀서 큰아버지에게 전화했더니 거시기 아들(박춘환)과 주고받은 거 없냐고 묻더라고. 그런 일 없었다고 혔지. 그럼 됐담서 내일 경찰서에 가자고 허는디 깝깝혀 죽겠더라고. 저녁 먹고 오늘 가보자고 혔지.
박춘환은 내 친군디 납북어부(1968)였어. 귀환해서 1년쯤 징역 살고 나와서 다시 어부생활을 혔는디 경찰이 잡아다 이북에서 가져온 불온서적 두 권을 어디에 감췄냐면서 조지니까 나하고 유명록이에게 한 권씩 줬다고 자백혔나벼. 나는 보안대에 있는 임OO와 친사촌이고, 유명록은 외가로 동생 되거든. 그러니까 잡혀가도 빽 좋은 사촌 형이 빼줄 것이다, 그렇게 통빡을 잡고 우리를 끌어들인 거여. 그때는 그 친구(박춘환)가 진짜 간첩인 줄 알았다니까.”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 지하실에 구금되다
임씨가 서울에 있던 1971년 12월,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구실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이는 그해 10월 시울시 일원의 위수령 발동과 무장군인 대학 상주에 이은 것으로 국민의 몸과 마음을 더욱 움츠러들게 하는 소식이었다. ‘유신헌법은 독재다’라는 말만 해도 징역을 살았던 불안하고 살벌한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임씨는 경찰서 가는 게 무섭지 않았냐는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섭기는, 방위 받을 때 소품이랑 건빵 받으러 드나들었거든. 아는 김형사도 있었으니까. 경찰서 지하실(정보과)에 가니까 마침 김형사가 있어서 인사 혔드니 ‘응, 너 왔냐’고 허면서 앉으라고 허드라고. 큰아버지는 ‘잘 부탁헙니다’라고 인사하고 돌아가고. 김형사가 이리저리 전화허더니 조금 있으니까 형사 몇 명이 몰려오더라고. 그놈들이 ‘이런 좆만 한 것이···’라고 하면서 머리카락을 잡아댕기고, 주먹질을 해대는디 아프기도 하지만 성깔이 솟더라고.
전후 사정을 내가 어떻게 알어. 암시랑 않은 사람을 왜 때리냐고 대드니까 ‘박춘환이 사건을 몰라서 그러냐’며 쪼인트를 까더라고. 넘어졌다가 벌떡 일어나니까 옆에 있던 남궁OO 반장이 의자로 내 허리를 내려치는 순간 비명을 지르면서 시멘바닥으로 뒹굴었지. ‘이 새끼 엄살 부리네, 반절은 죽여 놔야 헌다’면서 발로 짓밟고 때리는디 숨도 못 쉬겠더라고. 그렇게 사정없이 당하니까 매에 장사 없다고 힘이 빠지고 기를 펴지 못하겠더라니까···.”
임봉택씨가 고문으로 굽은 손가락을 만지고 있다
몸에 세계지도처럼 그려진 상처들,,,고문 형사들 작품
형사들은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를 신호로 녹초가 된 임봉택을 군산극장 뒷골목의 여인숙 골방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폭력과 회유로 허위자백을 강요한다. ‘우리는 다 알고 있으니 박춘환에게 받은 불온서적을 어디에 감춰뒀는지 실토하라’는 것. 그때부터 임씨는 경찰서와 여인숙을 오가며 고문과 구타 등 온갖 가혹 행위를 당하면서 몇 차례 정신을 잃기도 한다.
“하루는 ‘이 새끼 안 되겠다’면서 내 옷을 벗기더라고.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퉁퉁 부어 소매가 빠지지 않는 거여. 이놈(형사)들이 가위로 옷을 잘라내고 팬티까지 벗기더니 쇠파이프를 양 무릎에 끼고 포승줄로 묶어 책상 사이에 매달더라고. 그게 ‘통닭고문’이드만. 차라리 몽둥이로 맞는 게 낫지, 못 견디겠더라고. 째지고 부어터진 몸에 얼음물을 부으면 짜릿짜릿하면서 금방 죽겠는 거여. 사람들이 왜 자살하는지 그때 알았다니까.
밤낮으로 조지는디 정신이 없드만, 지금도 내 왼쪽 눈(망막)이 안 좋은 이유가 있어. 한번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까 목이 심하게 마른 거여. 형사 두 놈은 한쪽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고. 마침 구석의 바께쓰(양동이)가 보이더라고. 살짝 가서 바닥걸레가 담긴 그 물을 꿀꺽꿀꺽 마셨지. 그런데 형사 한 놈이 욕을 혀댐서 내 목을 몇 번씩 처박는 거여. 그러다가 뾰쪽 나온 곳에 눈을 찔렸지. 그 형사 이름도 기억허는디, 지금은 다 죽었댜.
하루는 유명록이 형사와 함께 와서 ‘봉택아, 내가 불온서적 한 권 줬잖여’라고 허는 거여. 그 말만 허고는 가더라고. 그놈도 고문당하다 나한티 뒤집어씌운 거지. 참, 환장하겠더라고. 그 뒤로 전기고문을 당혔지. 반장이 ‘야, 조지다매’라고 허는디, 성기에 연결하라는 뜻이더라고.(호흡을 가다듬은 뒤) 고문으로 3~4회 정신을 잃고 나니까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고문을 또 시작하려고 해서 ‘책 내놓겠습니다’라고 혔지. 군산은 금방 탄로 날 것 같아서 개야도 대숲에 감췄다고 하고는 지도까지 그려줬지. 2~3시간이라도 더 끌어보려고.
형사들이 개야도로 출발하고 얼마나 불안혔는지 몰라. 일어났다 앉았다.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더라고.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 나를 지키는 형사에게 개야도에 책 감춰뒀다는 말은 거짓이었다고 털어놨지. 그랬더니 ‘이 새끼가 사람을 놀리네!’라며 경찰봉으로 막 후려치더라고. 그때는 나도 악에 받쳐 대들었지. ‘안 죽을라고 거짓말 혔다’면서 대들었더니 품에서 권총을 꺼내 ‘팍 쏴 죽이겠다’고 겁주면서 문밖에 대고 ‘이놈이 미쳤다’고 소리치더라고.
개야도에서 돌아온 남궁OO 반장이 내 옷을 홀랑 벗기더니 고문을 다시 시작하더라고. 그때 살갗이 찢어지는 고문을 얼마나 혹독하게 당혔는지 눈에 불나는 것도 같고 몸을 지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몸에 세계지도처럼 그려진 상처들이 다 그놈(고문경찰)들 작품여. 엄지손가락이 이렇게 비틀어진 것도 그때 고문 후유증이지. 지금 말이니까 그렇지 그때를 생각허믄···. (눈물을 글썽임) 그놈들도 안 되겠는지 그 후로 작전을 바꾸드만.”
온갖 가혹행위 당한 후 구속돼
형사들은 임씨를 여인숙에 가둬놓고 박춘환의 자백이라며 ‘북에서 양주도 마시면서 대접 잘 받았다.’ ‘평양은 경치가 좋다,’ ‘북한은 트럭타로 농사를 짓는다.’ ‘흥남 비료공장은 질 좋은 비료를 많이 생산한다’ 등을 반복적으로 들려줬다. 그리고 ‘박춘환의 북한 고무찬양을 듣지 않았느냐’고 가혹하게 추궁했다. 아무리 유도해도 임씨가 일관되게 “못 들었다”고 증언하자 잠 안 재우기 고문을 가했다.
“나중에는 자술서 식으로 살아온 얘기를 쓰라고 하드라고. 지들은 한쪽에서 양담배 물고 화투만 치면서··· 힘들게 써놓으면 읽지도 않고 찢어버림서 ‘야이 새끼야 다시 써’라고 허는 거여. 그뿐인가 바둑알을 섞어놓고 흰 돌과 검은 돌을 골라내도록 하면서 잠을 못 자게 허는디 죽겠더라고, 며칠 지나니까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이상해지더라고. ‘임’ 자를 쓰려면 간격도 안 맞고 동그라미가 두 개, 세 개로 보이는 거여. 도저히 못 하겠다고 뻗었더니 즈들끼리 상의를 하더라고. 그 다음날인가 전주(대공분실)로 넘어갔지.
전주에서 2주 정도 조사 받었는디 철문이 자동으로 뻥 하고 열리는 건물이었어. 그때부터 군산경찰서 형사들은 싹 빠지고 전주 형사들이 다시 시작허는디 한 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몸의 상처를 쓰다듬더니 ‘야 봉택아, 너 군산에서 많이 맞았구나, 자식들 사람을 왜 이렇게 때려’라고 하면서 어르고 달래드라고. 그리고는 밥도 먹이고 이불이랑 덮어서 잠을 재우더니 밤에 지하실(고문실)을 구경시키더라고.
형사를 따라 지하실에 내려갔더니 별것이 다 있드라고. 가죽 채찍, 철봉에 매달린 수갑, 투구에 매놓은 전기선 등 보기에도 살벌혀. 그때 옆방에서 누가 고문당하는지 악쓰면서 자지러지는 소리가 나는 거여. 겁에 질려 있는디 형사가 ‘우리는 네 몸에 손 하나 안 대. 대신 순순히 자백 안 하면 너는 죽어.’라고 겁주는디 더는 버틸 수 없드라니까. 군산 형사들이 들려준 북한 이야기 중 10가지 남짓 써내고 반공법(불고지죄) 위반으로 구속됐지···.”
그 후 간첩 잡았다는 뉴스 보면 걱정부터 앞서
임씨는 “아무것도 모르던 섬놈이 형사들에게 북한의 관광지와 공장 위치 등을 배웠다”면서 “그 당시 경찰들은 간첩을 잡는 게 아니라 만들었다”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구속 소식은 이튿날 개야도에 전해지고, 섬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납북어부 간첩 사건이 연중행사처럼 일어나고 그때마다 시달렸던 개야도 주민들에게 반공법은 저승사자와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 임봉택이 간첩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충격을 받은 임씨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외면을 견디지 못하고 그해 이른 봄 자살한다. 임씨는 1심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석방된다. 임씨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아버지 묘소. 아버지가 천명을 다하지 못한 것은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슬픔의 오열을 터뜨렸다.
그는 고향의 싸늘한 눈길을 피해 부산, 경상도 등지에서 어부생활을 한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자처럼 떠돌던 그는 나이 마흔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딸도 하나 두고 자그만 단독주택도 마련했다. 2006년 변호사 사무소에 근무하는 지인 도움으로 진실을 규명. 2011년 3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어 억울한 누명도 벗었다. 2009년 6월에는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박춘환, 유명록을 만나 용서하고 회한의 눈물도 흘렸다.
임봉택씨는 “온갖 고문과 가혹 행위를 당한 뒤 불고지죄로 구속되어 옥살이했던 1972년 이후에는 TV에서 납북어부 간첩단을 일망타진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또 죄 없는 몇 사람이 걸려들어 고통당하겠구나.’하는 생각부터 든다.”면서 “43년이 지난 요즘도 꿈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벌떡 일어나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린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