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주점에 호기심이 인 건 ‘수레국화’라는 생소한 꽃이름의 상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은은히 들려나오는 가야금 소리 때문이었다. 주점은 쌔고 쌨지만 이 곳은 뭔가 예사롭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왔다고나 할까. 골목 안 3층 건물. 외벽 전체를 드리운 담장이덩굴로 인해 어딘지 고풍스러움이 묻어나는 이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밖에서 볼 땐 분명 3층이었는데 내부는 천정이 엄청 높게 지어진 2층 구조의 건물이다. 그리 넓지 않으나 고즈넉한 한옥 분위기의 실내, 안 쪽 누각 같은 곳에 놓인 장구와 북이 시선을 끌고 단골인 듯한 손님들이 몇 테이블 앉아 동동주 잔을 돌려가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다. 나이는 50대 초반쯤 되었을까, 풍기는 인상이며 쇤 듯한 목소리, 개량한복의 매무시부터가 영락없는 우리 소리꾼이다. 가야금 연주가 끝나자 이번엔 장구를 가져오더니 장단에 맞춰 구성진 목소리로 진도아리랑을 한 가락 뽑는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구부야아 구부구부야아 눈물이 난다~’ 절로 흥에 겨운 손님들 몇이 너나 할 것없이 어깨춤을 들썩인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귀에 익은 그 가락을 흥얼거리며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다가와 공손히 주문을 받는다.
이윽고 장구 소리가 멎더니 그제서야 주인도 내게 인사를 하면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어 차 한잔씩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것이 벌써 3년전 일이다. 그 후로 수레국화엔 여러 차례 간 적이 있는데 최근 지나다 보니 바깥 문기둥에 ‘은파국악연구원’이라는 간판이 또 하나 내걸렸다.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전면의 벽 중앙에 떠억 하니 붙어 있는 펼침막 하나가 시선을 끈다. “전국 국악대전 종합대상(가야금병창)양정례 / 2010.10 문화체육부장관”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업소의 사장님이기도 하지만 그 밖에도 교수님, 원장님 등 여러 호칭을 가진 범상치 않은 여성이다. 나는 문득 그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수레국화는 뭐고 갖가지 호칭들은 또 뭐며 국악공부는 어쩌다 하게 됐는지 등등...무릇 궁금한 것은 알아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전에 그녀와 약속 시간을 잡고 비교적 한가한 낮 시간 수레국화를 찾아갔다. 그간 손님과 주인으로서는 여러번 만났지만 그날의 만남은 그녀의 신상과 관련된 것이다 보니 여느 때처럼 편하게 허리이하학적(?)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을 수도 없는, 조금은 어색하고 진지한 자리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양정례(55). 태어난 곳은 개정면 통사리라 한다.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난 그녀는 군산여고를 졸업한 뒤 좋은 배필을 만나 슬하에 2명의 자녀를 두기까지 세상풍파는 그저 남의 일 일 뿐 유복하고 평탄한 삶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아니 하늘이 그녀의 행복을 시기했던 것일까. 지난 99년도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병마는 순식간에 남편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성실하고 든든한 울타리였던 남편을 졸지에 떠나보내고 난 뒤 그녀의 삶은 하루하루가 한숨과 눈물의 나날로 급전직하 하고 있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가장의 자리를 떠 맡았으나 막상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자괴감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그렇게 실의의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시골에 다녀오던 차 속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것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그 날의 판소리는 가슴 속의 한을 토해내는 듯한 애절한 가락이 마치 자신의 처지를 읊조리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차분해지고 있었다. 불현듯 판소리를 배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악에 대해서는 지식도 관심도 없는 문외한이었던 자신에게는 놀라운 심경의 변화였다. 하지만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서 배워야 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찾은 곳이 나운동에 있는 ‘ㅈ가야금연구소’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 국악은 악보에 의하지 않고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소위 ‘구전심수(口傳心授)’가 일반화 돼 있어 혼자서 터득하고 익히기가 쉽지 않았다. 그곳에서 가야금산조 등을 약 3년 정도 배우다가 지난 2002년도 전주에 있는 도립국악원을 찾아갔다. 과연 도립국악원은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국악의 모든 분야가 체계적으로 잘 정립되어 있어 더 폭넓고 깊은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국악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가야금과 장구, 민요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특히 무형문화재 23호인 강정렬선생으로부터 가야금병창을 사사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가는 것도 즐거웠고 자신감도 붙어갔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숨 좀 돌리면서 목 좀 축이자 했더니 동동주를 내 온다. 동동주의 맛도 기가 막히려니와 안주로 내 온 낙지볶음이며 두부김치는 보기에도 군침이 돌 만큼 맛깔스러웠지만 먹어보니 과연 한마디로 끝내주는 맛이다. 이런 안주류는 어디에나 흔하게 있는 것이지만 이 집의 것은 뭔가 다른 깊은 맛이 있다고나 할까. 맘 같아서는 조금 싸 달라 하고 싶었지만 양반 체통에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그저 가끔 손님으로 와서 팔아주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을 성 싶다. 목을 대충 축이고 나자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렇게 ‘우리소리’의 공부에 매진하던 그 어느날 자신도 후일 언젠가 누군가를 가르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평소 실기 못지않게 이론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그녀는 비록 만학의 나이이나 2003년도에 백제예술대학 전통공연예술학과에 입학, 가야금병창을 전공하면서 학문적인 내공도 쌓아 갔다. 졸업 후에는 익산의 명창인 임화영선생으로부터 약 4년 정도 판소리를 사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에 매진하다보니 가슴속 한 켠에 늘 자리 잡고 있던 슬픔도 조금씩 달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에 예기치 않은 시련이 또 기다리고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웃의 대출보증을 서 준 것이 화근이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자 모든 채무는 보증인인 그녀의 몫이었으며 그로 인해 수 년 동안 길고 지루한 송사에 시달리면서 또 한 번 그녀는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믿었던 이웃의 배신으로 인해 입은 마음의 상처는 너무도 큰 고통이었다. 사실 그녀에게는 큰 값이 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이 물려준 몇 채의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그 중 한 채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뭔가 마음을 붙이고 안주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먹고 살아갈 방도도 강구해야 했다. 그렇다고 세태에 휩쓸려 아무 일이나 되는대로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기왕이면 자신의 장기인 국악을 접목할 수 있는 업소라면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국악이 있는 형태의 주점이었다. 그녀는 장재동에 있던 자신의 소유 낡은 집을 헐어내고 업자를 대어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것이 2006년도 일이다. 내부는 목재를 주로 사용한 높은 천정의 한옥분위기로 했고 서양식 형태를 따른 외벽엔 담쟁이덩굴을 심어 올리기로 하였다.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가자 업소의 상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그래서 월간 ‘좋은생각’이라는 잡지에 기고도 하고 있는 K라는 절친한 친구를 찾아가 상의를 한 결과 평소 꽃을 좋아하니 꽃이름의 상호가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해 주었는데 그녀도 동감이었다. 당장 백과사전을 갖다 놓고 수 많은 꽃들을 검색하던 중 마치 운명인 양 섬광처럼 마음에 와 닿는 꽃이 눈에 띠었다. 바로 ‘수레국화’였다. 하지만 국화는 좋아하는 꽃이니 그렇다 치고 앞에 붙은 수레라는 말이 왠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니 과연 거기에는 ‘법륜(法輪)’이라는 놀라운 뜻이 담겨져 있었다. 불교 신자인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그 연(緣)인 성 싶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수레국화!
(여기서 잠깐 법륜(法輪)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 보자. 법륜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수레바퀴가 돌아가면서 삼계(三界)를 구제한다는 이치를 담고 있다. 즉 둥근 수레바퀴에는 원만(圓滿)의 뜻이 담겨 석가의 교법은 결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퀴가 구르면서 앞의 물체를 부숴뜨리는 것과 같이 중생의 망견(妄見)을 타파하며, 그 교법이 전전(轉轉)하여 어느 곳에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또한 수레국화는 오묘함과 행복이라는 꽃말도 갖고 있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상호가 결정이 되자 바로 간판을 내 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주 메뉴는 향기 그윽한 우리 전통차를 비롯해서 동동주 등 전래 문화와 정서에 맞는 것으로 했고 가야금, 장구, 북 등 악기도 들여 놓았다. 처음 해 보는 장사라 어설프고 서툴기도 했지만 찾아주는 고객 한분 한분에게 정성을 다 했고 틈틈이 가야금병창과 장구 장단으로 흥을 돋우기도 했다. 날이 지나면서 입소문을 타고 수레국화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손님도 늘어 갔고 단골도 생기기 시작했다. 국악을 연주해주는 주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채로웠을 터이고 또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고객도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레국화는 영업장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기량을 연마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기도 했다. 간혹 민요 따위를 부르고 싶어 하는 손님을 위해서 가사집도 준비 했고, 원하는 고객에게는 가야금이 됐건 장구가 됐건 기꺼이 연주를 했으며 소리를 할 줄 아는 손님에게는 고수의 역할도 해 주었다. 이제 일정부분 실력도 갖추고 마음의 안정도 찾아감에 따라 세상을 관조하는 시야도 트이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의 재주를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국악을 통한 봉사활동이었다. 그 때부터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예술단 단원들과 함께 가야금, 장구, 북 등 악기를 차에 싣고 봉사활동을 나갔다. 그간 여러 곳에 봉사를 나갔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곳 중의 하나가 소록도였다. 그 곳은 익히 알려진 대로 나환자 집단거주시설이 있는 곳이다.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은 그 곳엔 슬픔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딸처럼 동생처럼 반겼으며 그곳에서의 공연은 왠지 더욱 애절한 감흥이 일었다.
그러던 중 2010년도 10월 진안군 주최 전국 국악대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간 갈고 닦은 실력을 평가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어 경험도 쌓을 겸 출전을 하였다. 차례가 되어 막상 무대에 오르니 조금 긴장도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 했다. 결과는 가야금병창 종합대상이었다. 발표를 듣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기뻐도 눈물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니 그 기쁨의 밑바닥엔 지난 10여년의 한숨과 시련이 응어리져 있음을 다른 사람은 결코 알 리 없을 것이다. 생각지도 않게 큰 상을 받고 나니 보람도 있었지만 한 편으론 더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감도 생겨났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국악 역시 배워도 배워도 모자라고 부족하여 끝이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레국화가 자리를 잡고 종합대상도 받기까지 지나 온 세월이 꿈만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에게도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금년 3월, 뜻 밖에도 군산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국악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난생 처음 대중 앞에서 강의를 한다 생각하니 전국대전에 출전했을 때 이상으로 긴장도 되었지만 대학에서의 공부로 실기와 더불어 이론적 부분을 축적해 두었던 자산이 큰 힘이 되었다. 수강생은 약 20여명으로서 아직 초등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이루고 있고 배우고 싶다는 열의가 대단했다. 그녀는 가야금병창, 민요, 판소리 등 자신이 가진 경험과 지식을 열심히 가르쳤다. 하지만 단기간 동안 주 1회 수업만으로는 내실을 기할 수 없는 한계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난 6월 수레국화 바로 뒷 건물 2층에 ‘은파국악연구원’이라는 학원을 열었다. 그 곳은 개인적인 수강생도 있지만 군산대 평생교육원 제자들의 실습 공간 역할을 하는 도량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수레국화에서는 업소의 주인이자 사장으로서, 평생교육원에서는 교수로서, 학원에서는 원장으로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바쁜 생활이 시작되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한 길을 걸어온 그녀였기에 지난 세월이 비록 힘 들었지만 누구한테나 떳떳할 수 있었고 일정부분 성취감도 없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 꿈이 있다면 자신의 문하에서 청출어람의 제자가 여럿 나오는 것이다.
이야기 도중 간혹 그녀는 무엇인가를 회상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는데 꼿꼿한 자세며 입고 있는 옷이며 언제나 쇠어 있는 목소리가 일별(一瞥)만으로도 국악인임을 알아챌 수 있게 해 준다.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하면서도 하얀 이가 유독 돋보이는 그녀와의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언젠가 먼 후일 그녀를 존경하는 수 많은 제자들의 프로필 란에 ‘양정례선생 사사’라고 쓰여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덩달아 흐뭇해지기도 한다.
* 이야기를 마치고 수레국화의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오니 살랑대는 바람과 함께 가을 햇살이 부시다.
돌아와서도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생생하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그 말이 맞아요. 행복과 불행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번갈아 찾아 오지요. 자기 인생이 행복하다고 해서 기고만장 할 것도 없고 불행하다 해서 절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저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것이고 자신의 하는 일이 다른 이에게도 즐거움과 희망을 전해주는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보람 있는 삶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