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새벽 3시에 택시 타고 카페에 와요. 만들고 싶은 빵이 생겼을 때요. 지금 당장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스물일곱 청춘 이산하. 그날도 새벽에 출근해서 천연발효 빵을 만들었다. 기공이 커서 맛있게 됐다는 치아바타를 내놓으면서 “이 빵은 더울 때 발효가 잘 돼요. 그래서 올 여름에 많이 했어요” 라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방한했을 때 드셨다는 치아바타를, 나는 그녀 덕분에 먹었다. 올리브 오일이랑 발산 식초를 찍어 먹는 사치를 누렸다.
산하는 어릴 때에 공부도 중간, 노는 것도 중간인 아이였다. 산하의 부모님은 군산 서흥중 3학년이던 산하에게 대안학교를 알려주었다. 간디학교. 산하는 처음 알게 된 그 학교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 위해 예비학교에 갔다. 마음에 들었다. 일반 고등학교보다는 좋을 것 같았다. 산하가 간디학교에 붙은 뒤에 몹시 좋아하니까 친구들은 놀렸다.
“야, 이산하! 누가 보면, 너 대학 붙은 줄 알겠다.”
간디학교 1학년생들은 체험을 많이 한다. 국토 순례를 하고, 전남 장성에 내려가서 흙집도 짓는다. 나환자들이 있는 고흥 소록도에 가서 지낸다.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한다. 1학년 겨울 방학 때는 친구들 모두가 새로운 기대를 하며 들뜬다. 2학년이 되면, 동급생들 모두가 호주에 가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3개월을 지내요. 간디학교랑 연계한 학교에 가서 공부하거든요. 마을에 있는 조그만 학교라서 기숙사가 따로 없었어요. 각자 홈스테이를 했어요. 학교 선생님도 세 분밖에 없었는데 참 좋았어요. 공부도 하고, 많이 놀고. 진짜 좋았는데 한국 오니까 바로 적응됐어요. 엄마 아빠 보는 것도 좋고, 학교도 좋으니까요.”
간디학교는 비인가 학교, 학생들은 2학년 끝나갈 때 검정고시를 본다. 그러고나면 갑자기 누군가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낚아 채인 것처럼 허망해진다. 수능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갈 것인지, 이대로 자유롭게 몸을 쓰면서 자기 일을 찾을 것인지를 두고 방황한다. “스무 살 되면, 뭐 하지?” 불안은 고3 때에 최고조에 이른다.
“스무 살의 무게가 엄청났어요. 빨리 뭔가를 찾아야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3학년 때, 자퇴하고 수능 준비하러 입시 학원에 가는 애들도 많아요. 인턴 다니는 애들도 많고요. 저는 월드비전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성공회대 사회복지과를 가고 싶어졌어요. 근데 수시 전형에서 떨어졌어요. 다른 대학은 가고 싶지 않아서 군산에 있는 극단 ‘사람세상’에 들어갔어요.”
산하는 간디학교 3학년 졸업 작품으로 자기 얘기를 쓴 연극을 했다. 사람들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다. 스스로도 재미있었다. 막상 무대에 선 스무 살짜리 배우는 즐겁지 않았다. 남의 삶을 표현하는 게 맞지 않았다. 극단에서 아이들을 위한 연극을 함께 준비하고 공연하는 일만큼은 재미있었다. 그만둬야겠다는 결정을 하는데 2년이 걸렸다.
그녀는 예술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을 고민하다가 미술치료를 알게 됐다. “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지만 수능 봐서 대학 가고 싶지는 않았다. 폭 넓게 길을 찾았다. 학비가 없는 프랑스에서 미술치료를 배울 수가 있었다. 외국 가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과 지금 당장 할 게 없으니까 가보자는 마음이 합쳐졌다. 뜸 들일 시간이 없었다.
산하는 어학원 시스템이 잘 돼 있는 프랑스 후아이앙으로 날아갔다. 홈스테이 식구들과 밥 정을 쌓으며 5개월을 살고난 뒤에 자신감이 붙었다. 와인으로 이름난 보르도로 이사해서 독립했다. 몸이 아팠다. 붓기가 가라앉지 않으면서 외모가 변해갔다. 스물두 살 아가씨에게는 지구 멸망과 맞먹는 재앙이었다. 계속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1년 못 가서 무너졌다.
“사실은 프랑스 가기 직전에 갑상선이 안 좋다는 걸 알았거든요. 심각하게 생각을 했더라면, 프랑스 의료 시스템이 복잡하고 느려도 큰 병원을 찾아다녔을 거예요. 근데 갑자기 몸이 나빠지니까 돌아오고 싶었어요. 그 때는 어리기도 해서 쉽게 생각했죠. (웃으면서) 지금 그런 기회가 있으면 집념으로 열심히 할 것 같아요.”
그녀가 집에 왔을 때, 어머니는 “그만큼 했으면 됐어”라며 다독여줬다. 산하는 낮에는 커피숍에서 알바를, 밤에는 극단 ‘사람세상’에서 스텝 일을 했다. 처음에 극단 생활 했을 때보다 평온했다. 하기로 한 거니까 열성을 다했다. “야, 너 지금 뭐하고 다니냐”라는 닦달을 받지 않는 나이, 예쁜 스물세 살. 알차게 살아도,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은 헛헛했다.
산하는 서울 마포에다 옥탑방을 얻었다. 프랑스식 디저트 카페에 정규 직원으로 취직했다. 미술치료 공부를 하기 위해 사이버 대학에 입학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쉬는 날에는 숙명여대 평생교육원에서 미술치료 수업을 들었다. 꼬박 2년 동안 돈도 벌고, 공부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그녀 삶에 쌓여가는 것 같았다. 더 바랄 게 없었다.
“미술치료 시험 보고, 자격증 받고, 임상 실습을 나갔어요. 알콜홀릭이 모인 폐쇄 병동으로요. 그 분들은 새로운 선생님이랑 그림 그리고, 만들고, 지점토 하는 것 자체에 만족을 느껴요. 초등학생 여자애들이 중학생 될 때까지도 만났고요. 근데 나중에 감독 선생님한테 슈퍼비전 받으면서 제가 치료라는 것에 방향성을 못 잡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치료사가 아니라 미술학원 선생님처럼 했다는 자괴감도 들었고요. ‘내가 누군가를 치료할 수 있나? 나이를 먹을 때까지 시간이 더 필요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어요.”
작년에 산하는 군산으로 내려왔다. 국비로 가르쳐주는 곳에서 제빵을 배웠다. 일에 대한 비전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빵 먹는 것 좋아하니까 해 봐. 서울에서 프랑스식 디저트도 배웠잖아”라는 지인의 권유에서 출발했다. 좀처럼 실력이 안 늘었다. 막 배운 학생이 만든 것처럼 어설펐다. “이것도 아닌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렇다고 처지지는 않았다.
올 초부터 산하는 선배의 카페 일을 도우면서 타르트(얇은 과자 바닥에 여러 가지 토핑을 얹어서 만든 디저트)를 만들었다. 드문드문 오던 주문이 느는 게 신기했다. 전주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왔다. 6월에 발효 빵을 하면서 더 재미를 붙였다. 실온에서 5-6시간, 냉장고에서 하루 정도 발효되기를 기다리면서, 산하는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발효 빵 작업을 하는 것, 직업적으로 목표 의식을 갖는 것, 저는 다 느렸어요. 정말 느리게 진행 된 거예요. 지금에서야 집념을 가지고 하게 된 거예요.”
그녀는 천연발효 빵에 이끌렸다. 어떤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는데 발효 빵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발효 하면서 단백질을 분해시키는 효소가 나오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산하는 천연발효 빵 수업을 듣기 위해 서울까지 다녔다. 프랑스에 살 때 먹었던 여러 가지 빵 맛도 생각났다.
산하는 “대학은 꼭 안 가도 돼”라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자라왔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옮기며 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부모님이 “대학에 가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할 수 있어”라고 권유할 때는 산하도 흔들리긴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가치 있고 멋진 삶을, 대학 바깥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모든 것이 흐지부지 끝나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근사해 보이는 사람들을 흉내 내며 사는 것 같아서 조바심 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뭐 하겠어? 할 것도 없는데 수능 봐서 대학이나 가야지”는 내키지 않았다. 친구들이 대학 다니고, 직장 다니고, 아기 엄마가 될 동안, 산하는 보편적인 삶에서 조금 비껴나 부딪히고 좌절하고 도전했다. 후회는 없다.
“지금은 발효 빵 작업 하나하나에 만족을 느껴요. 이걸 해서 돈을 얼마 벌고, 몇 년 후에는 카페를 차리고, 이런 생각은 안 해요. 그런 게 있으면 좋겠지만요. 오늘 맘에 드는 빵을 만드는 거 자체가 좋아요. 손님들이 맛있게 드시나 훔쳐보기도 해요. 사실, 발효 빵을 평생 해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나이 들면, 미술치료가 하고 싶어질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 당장은, 발효 빵이 잘 되는 게 좋아요.”
파티쉐 이산하 010 9601 9012
군산시 산북동 3541-7 카페 이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