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그림은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구분이 안 된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아크릴 물감을 제멋대로 마구 휘갈기고 흩뿌려놓은 듯한 붓놀림의 색채와 덧칠 자국들은 때론 강렬하게 때론 잔잔하게 무언가 이야기를 던지고 있는 듯도 하다. 그녀는 사물을 정형적,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내적 영감(靈感)을 표현하는 비구상에 천착한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 속에 내재된 스토리를 해독해내기란 그녀를 알지 않고서는 결코 쉽지 않다.
이미선. 그녀는 서양화가이자 미술관 ‘예깊’의 관장이기도 하다. 강 건너 충남 한산에서 출생한 그녀는 초등학생 때부터 미술에 취미를 가져 학창 시절 학교 옥상에 올라가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그리는 것을 즐기며 소질을 키웠다 하는데 군산대 미대 졸업 후 한때는 지점토 공예에 빠져 공방을 낸 적도 있으나 이후 전공인 서양화 작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자신만의 화풍으로 국내외에 걸쳐 많은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녀가 첫 개인전을 가진 것은 전남의 고흥에서 약 8년간 거주할 때였는데, 가요‘모란동백’의 작시자이기도 한 문인이자 화가 이제하 씨를 우연히 알게 되어 서로의 작품 교환과 함께 같이 작품 전시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전남에서 활동 중인 다양한 작가들과 교우를 통하여 인맥도 넓히게 된다.
그녀가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은 한마디로 필(Feel)이 꽂혀 있을 때이다. 그림을 그리다가도 필이 떠나면 붓을 던진다. 그래서 그리다 만 그림들도 많다. 그리다 만 그림도 그대로 한 폭의 작품이 된다. 종잡을 수 없는 영감(靈感)의 출몰은 때로 그녀를 지치게도 하지만 작업에 몰두하는 순간 찾아오는 유체이탈적 희열감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환상의 세계로 그녀를 이끈다.
그래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고 최장 4일 간을 쉬지 않고 작업에 몰두한 적도 있는데 이때 보이는 환영(幻影)이 작품의 소재가 된 적도 있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어딘가 몽환적이기도 하다.
그림을 떠나서는 삶의 의미가 없다는 이미선 관장. 체구는 자그맣지만 그녀에게 내재된 우주, 인간, 환경 등 에 관한 한없는 경외감과 사물에 대한 근원적 의문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그녀를 이끌고 이것은 그녀의 내면에서 초자연적 형상으로 발현되어 순간의 붓놀림으로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진다. 이러한 느낌들은 순간순간 다르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녀는 인간적이고 편하게 담아내고 싶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 속에는 희열도, 슬픔도, 일탈도 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화가가 되고 싶다면 서도 이번엔 남자로 태어나길 바란다며 웃는 그녀. 이유를 물으니 한국에서는 여자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 이란다. 규범과 형식이라는 프레임이 영혼의 자유스러움을 갈망하는 그녀에게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주로 꿈, 여인, 풍경, 기다림 등을 주제로 한 그녀의 작품마다엔 그래서 모든 자유가 숨어있다. 작품들은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사적으로 주고받지 않음을 철칙으로 여긴다는 그녀는 다만 후일 언젠가 때가 되면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포부를 들려주기도 하는데, 작가노트에서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살아있는 여자이다. 붓 끝으로 나의 내면을 표현할 때 카타르시스와 흥분을 멈출 수 없다. 나는 감동적인 작가는 아니다. 또한 형식에 얽매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아니다. 다만 붓을 잡으면 절제할 수 없는 강력한 내적 충만함 속에서 나의 기질을 맘껏 뿜어낸다. 어둠의 공간 속에서 나는 춤을 춘다. 시간적 초월 속에서 기억을 멈추기도 하고 기억을 미래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한다. 나는 감동을 원한다. 나는 작가다. 나는 야생화처럼 자라왔다. 들풀에 지나지 않는 나를 일으키는 힘은 작업이다. 작가란 외로운 직업이다. 작가는 진실해야 한다...”
예깊미술관
‘예술의 깊음을 알자‘라는 뜻에서 ’예깊’으로 명명되어 지난 7월 4일 명산동 소재 8층 건물 에이펙스빌딩에 문을 연 미술관. 운영자는 건물 소유주인 ‘㈜림스아일랜드’로서 임성용 이사장(림스아일랜드 부회장)에 따르면 문턱을 대폭 낮추고 시민 누구나 부담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 저변 확대라는 취지에서 기획, 1층에서 8층까지 각 층별로 미술관, 갤러리, 학생 및 청소년 작품 전시실, 입주 작가 작업실, 문화 체험실, 레스토랑 등으로 꾸며 미술관이 지닌 딱딱하고 다가가기 어렵다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겁고 친숙하게 찾을 수 있는 문화공동체로서의 실험적 역할이 구현되는 공간이다.
‘예깊’의 초대 관장인 이미선 작가는 ‘현재 개관기념 첫 전시회로 8월 말까지 유명 화백인 최광선 특별전을 열고 있는데 향후 다양한 전시를 통하여 시민들뿐만 아니라 군산을 찾는 많은 외지 관광객에게도 편안히 둘러볼 수 있는 필수 문화 탐방 코스로 가꿀 예정’이라며 이를 통해 ‘우리 지역의 문화 예술이 더욱 활성화 되고 미술은 어렵고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가격이 비싸 접하기 힘들다는 선입견을 불식시킴으로써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는데, 앞으로 ‘예깊’이 우리 군산의 문화 예술 정체성을 담아내는 새로운 광장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지 많은 관심과 함께 기대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