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는 198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 중심에는 조계현·장호익 배터리가 있었다. 81~83년 전국규모대회 성적은 우승 4회 준우승 2회. 다방이나 직장에서 군산상고 경기를 지켜본 시민들은 발길을 집이 아닌 술집으로 돌렸다. 연탄 화덕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은 소주잔을 부딪치며 감독도 되고 해설가도 되고 심판도 되었다.
조계현 어깨에 물이 오를 대로 오른 1982년. 그해 5월 건국 이후 최대라는 장영자·이철희 대형 어음 사기사건이 터진다. 6월에는 돌아선 민심수습차원의 개각이 단행되고, 전북 고창 출신 김상협씨가 국무총리에 기용된다. 그러나 군산 야구팬들의 화두는 야구경기 결과였다. 이는 군산시민의 야구 사랑이 그만큼 깊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 기자 말
1982년 국내 고교야구 최강팀은 청룡기와 봉황기를 석권한 군산상고였다. 이는 투타에서 놀라운 기량을 발휘하는 조계현이 있었기에 그해 고교야구 무대를 주름잡을 수 있었다. 특히, 선발라인업 중 5명(조계현, 장호익, 한경수, 고장량, 오인식 등)이 2학년임에도 드라마 같은 명승부를 보여주었다. 그때마다 전문가들은 과연 역전의 명수, 호남야구의 기수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계현을 향해서는 '팀의 보배'라 평했다.
"크게 손해났다가 본전도 뽑고 이익도 챙긴 경기"
1982년 6월 11일. 제37회 청룡기쟁탈 고교야구 2회전(군산상고-충암고)이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야간경기로 열렸다. 서울지역 예선 우승팀 충암고는 2회 말 조계현이 난조에 빠진 틈을 이용, 대거 6점을 뽑는다. 그럼에도 역전의 명수 저력을 믿는 군산 시민들은 극적인 명승부가 펼쳐지기를 고대하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4회 초 군산상고 공격. 볼넷으로 나간 2번 오석환을 1루에 두고 등장한 5번 조계현이 3루 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 홈런을 날리며 분위기를 전환한다. 그 여세는 5회 초 공격으로 이어져 2번 한경수의 적시 2타점 등 4안타 포볼 2개를 묶어 3점을 만회한다. 그리고 5회, 6회 말에 조계현이 한 점씩 내줘 6-8, 군산상고는 7회까지 2점 차로 끌려간다.
8회 초 8-8 타이를 만든 군산상고는 9회 초 오석환과 조계현의 연속 2루타로 전세를 9-8로 뒤집는다. 리드를 빼앗긴 충암고 마운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고 기세가 오른 군산상고는 장호익, 오인식의 연속 중전안타와 8번 이동석의 희생플라이로 2점을 가산한다. 이어 충암고 내야진의 실책으로 2점을 추가 13-8 안정권으로 달아난다.
9회 말 공격에서 충암고가 1점만을 추가함으로써 장장 4시간 20분에 걸쳐 2만 관중을 열광시켰던 역전 드라마는 13-9로 막을 내린다. 그날 밤 군산은 시민의 함성이 골목과 거리를 가득 메웠고, 초여름의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조계현의 투구 하나하나에 울고 웃었던 시민 중에는 "첨에는 조계현이 크게 손해났다가 본전(동점)도 뽑고 이익(승리)도 챙긴 시합이었다"며 흐뭇해하는 40대 아줌마도 있었다. 아래는 조계현 감독의 회고.
"군산상고 선수들의 집중력이 돋보였던 경기였죠. 결승전 이상으로 통쾌했구요.(웃음) 초반에 큰 점수 차로 벌어졌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역전승을 일궈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불타는 투지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된 승부근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옥과 천당을 오간 경기였죠.(웃음) 그래서 그런지 다음 경기부터는 자신감이 솟구치고, 우승고지도 가깝게 보였습니다."
대망의 청룡기, 33년 만에 호남선 열차에 실어
제37회 청룡기 결승전(군산상고-북일고)은 그해 6월 1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다. 스탠드를 가득 메운 3만 관중의 응원 공방전 속에 시작된 이날 경기는 고교야구의 두 기린아 조계현과 안성수가 치열한 투수전으로, 연장 12회까지 3시간 20분에 걸쳐 숨가뿐 격전을 치르고도 1-1로 비겨 다음날(18일) 재경기를 치렀다.
청룡기 역사상 세 번째 결승 재경기가 열리는 18일 오후 6시 30분 서울운동장 야구장. 군산상고는 1회 말 공격에서 1번 선두타자 고장량의 데드볼과 2번 한경수, 3번 백인호의 연속 보내기번트, 북일고 내야수의 악송구, 4번 오석환의 희생플라이로 1점을 얻고 5번 조계현의 적시타로 추가점을 올려 2-0으로 앞서간다.
그러나 북일고는 2회 초 공격에서 6번 안성수가 볼넷을 고르고, 7번 임학빈의 내야 안타와 1사 후 9번 오효근의 좌월 2루타로 2-2 타이를 만든다. 그리고 1번 조양근의 볼넷, 군산상고 유격수 실책에 3번 조용호의 센터 앞 안타로 2점을 보태 4-2로 달아난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2회 말 군산상고에 미소를 보낸다.
반격에 나선 군산상고는 2회 말 1사 후 9번 이승우가 볼넷을 고르고 1번 고장량의 2루타에 이은 2번 한경수의 중전 적시타로 4-4 동점을 이룬 뒤 2사 후 오석환이 볼넷을 고른다. 그리고 5번 조계현의 평범한 땅볼을 북일고 유격수가 빠뜨려 1점을 낚고, 장호익, 오인식의 중전안타로 3점을 더 잡아 8-4로 재역전 시키면서 승세를 굳힌다.
2년생 에이스 조계현은 3회에 등판, 삼진 9개를 뺏고 3안타 1실점으로 북일고 타선을 요리, 추격을 9-5로 막는다. 조계현이 9회 말 마지막 공을 뿌렸을 때 감격한 군산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로써 군산상고는 1949년 광주서중(광주 제일고 전신) 우승 이후 첫 패권을 차지, 대망의 청룡기를 33년 만에 호남선 열차에 싣고 군산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선수들은 전북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도민환영대회에 참석하고 35사단 지프에 올라 전주 시내를 가르고 이리(익산) 시내를 돌아 군산에 도착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조계현의 진면목을 보여준 봉황기 대회
1982년 8월 17일 잠실구장에서 야간경기로 열린 제12회 봉황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준결승(군산상고-대구고)에서 조계현은 기록적인 삼진 18개를 뺏으며 대구고 강타선을 산발 5안타로 잠재운다. 그리고 5회 초 3번 백인호가 결승 2점 홈런을 터뜨려 4-1로 승리한다. 군산상고는 이 대회 처음으로 8강 고지를 점령한다.
당시 어느 언론은 "키 1m 78cm에 몸무게 73kg의 체구를 모두 활용하는 힘찬 투구에 싱커와 슬라이더가 주 무기인 조계현은 과연 뛰어난 투수였다"며 "대구고 강타자들로부터 삼진을 무려 18개나 뺏으며 군산상고를 4강 고지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계현은 이날의 활약만으로도 고교 최고 투수라는 찬사를 받기에 족했다"고 평가했다.
그해 8월 2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결승전(군산상고-제일동포)에서 군산상고는 태풍의 눈이었던 제일동포를 4-1로 누르고 대망의 초록색 봉황기를 안았다. 이날 군산상고는 초반에 상대의 결정적인 실책 2개로 2점을 얻어 7회까지 2-1 리드를 지키다가 8회 말 2점을 추가함으로써 4-1로 승리 처음으로 봉황기 정상에 오른다.
결승전까지 6게임을 치른 군산상고가 얻은 득점이 33점임에 비해 실점은 7점이었다. 이것은 조계현 투수의 위력을 말해주는 기록으로 6게임 모두 완투하지는 않았지만, 37과 2/3를 던져 실점 4, 자책점 3을 마크, 방어율 0.72의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따라서 군산상고의 봉황기 우승은 조계현의 진면목을 보여준 화려한 퍼포먼스나 다름없었다.
이에 조계현 감독은 공(功)을 자신에게만 돌리는 것은 무리라며 손을 저었다. 백기성 감독의 탁월한 용병술과 지략, 그리고 선수 모두가 뛰어난 공격력과 수비력을 겸비하고 있었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며 백 감독을 떠올렸다.
"백기성 감독님은 서울 배문고를 졸업하고 한일은행에 있다가 33세 때 군산상고로 오셨는데, 사납게 가르쳤고, 전략도 좋았어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팀플레이와 수비를 완벽하게 만드신 분이죠. 아침 7시 40분에 등교하면 연습, 연습 밥 먹고 연습···. 늦은 밤에야 집에 들어갔으니 선수들의 하루는 그야말로 야구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훈련은 혹독했지만, 껍데기를 벗는다는 각오로 임했기에 그해 2관왕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조 감독은 "훈련 중 맞기도 많이 맞았다"며 "백기성 감독은 끈질긴 집념의 지도자로 선수들을 '악바리'로 만든 분이었고, 평소 '군산상고 야구는 군산 시민의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군산을 사랑하는 분이었다"고 덧붙였다.
구수갑 감독에 대한 오해, 32년 만에 풀려
1982년. 그해 고교야구 2관왕과 함께 '역전의 명수' 전통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조계현. 그는 휴식을 즐길 사이도 없이 일본 오사카(大阪) 구장에서 열리는 한·일 고교야구 올스타전(8월 27~29)에 출전한다. 그리고 3게임 연속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로 등판, 한국 선발팀(감독 구수갑) 승리(2승 1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국치일을 하루 앞둔 28일(2차전) 경기 때 한국은 7회까지 1-3으로 끌려가다 8회 말 조계현이 2타점 우월 3루타를 날려 동점을 만든다. 그에 힘입어 한국은 집중 안타로 3점을 추가 6-3으로 역전승을 거뒀다. 이때 TV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애국자!'라며 환호와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그런가 하면 무리한 등판을 우려하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9월이 되자 시민을 분노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구수갑(당시 경북고 감독)이 계획적으로 조계현을 매 게임 등판시켜 팔꿈치 부상을 당하게 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진 것. '일본 원정 게임에서 팔꿈치 균열로 투수 생명이 위험하다', '조계현 마운드 못 선 군상, 8강도 못 가 침몰' 등 조계현 부상관련 신문보도는 시민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이에 조 감독은 사실과 다르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세 게임 등판은 맞지만, 구수갑 감독 의도가 아니라 제가 자원해서 던졌습니다. 봉황기 대회가 끝나고 피곤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워낙 지기 싫어하는 성미에 특히 일본이라서 위기 때마다 등판시켜달라고 말씀드렸죠. 구수갑 감독이 나쁜 마음을 먹고 저를 혹사했다고 욕을 많이 얻어먹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시민들의 오해가 풀렸으면 좋겠네요."
조계현 감독의 당시 상황설명은 '혹사'당한 게 아니라 승부욕을 억제하지 못한 '자업자득'이었다는 것으로, 32년이 지나도록 기자의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있던 오해까지 말끔히 풀어주었다.
가장 아쉬웠던 경기는 1985년 대륙간컵 결승전
팔꿈치 부상으로 미래가 불투명했던 조계현은 군산상고 졸업을 앞두고 해태 타이거즈, 동국대, 원광대 등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해태 김응용 감독과 백기성 코치는 학교까지 찾아왔다. 그럼에도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의 권유와 훌륭한 투수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84년 연세대에 입학한다.
그는 1984 춘계 대학야구연맹전 3일째 경기(연세대-경남대)에서 34타자를 상대로 삼진 7개를 빼앗으며 첫 완투승(4-1)을 기록한다. 1986년 대학야구 봄철리그에서는 우익수로 나서 2회와 8회 홈런을 날렸다. 이날 경기는 6회 초 장호익의 만루 홈런까지 가세 고려대를 8-2로 꺾었다. 이날 조계현은 1-2로 뒤져있던 3회 1사 후부터 등판 무실점으로 막으며 호투했다. 이렇듯 그는 팔꿈치 상처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 '팔방미인'으로 통했다.
1985년 캐나다에서 개최된 대륙간컵 세계야구대회에서 한국이 준우승하는데 견인차 역할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대학 시절 야구를 제대로 못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특히 대륙간컵 결승전(한국-쿠바)을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경기로 꼽았다. 당시 한국은 조계현의 호투로 5회까지 3-1로 앞섰으나 6회와 8회 수비 실책으로 결승점을 내줘 3-4로 분패했다.
어느 야구 전문가는 아마야구의 메카 백호기 야구대회 1988년 판도를 가늠하면서 "지난해까지 크게 활약했던 조계현·장호익 황금 콤비의 졸업으로 전력에 큰 구멍이 생긴 연세대는 중위권 진출도 힘겨운 상태이다"라고 분석했다. 이는 조계현·장호익 배터리가 연세대 시절 얼마나 비중 있는 선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한야구협회는 1988년 9월 초 88서울올림픽에 출전할 야구(시범종목) 한국대표팀 최종 엔트리 23명을 발표한다. 그중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조계현과 손발을 맞춰온 장호익이 빠져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조계현이 야구협회를 찾아가 "장호익이 있어야 내가 공을 던질 수 있는데 왜 빼느냐, 장호익을 빼려면 나도 제외해달라"고 항의 합류시켰던 일화는 유명하다.
두 평 남짓의 마운드에서 인생 배워
싸움닭 조계현은 1989년 3월 5일 해태 타이거즈에 합류한다. 그해 4월 9일 광주구장(해태-빙그레) 개막전에서 빛나는 투구를 선보인다. 4월 20일 대구구장(해태-삼성) 경기에서 에이스 선동열이 7-0으로 크게 이기던 5회에 5실점을 당했으나 6회에 등판한 조계현의 깔끔한 마무리로 승리투수가 된다. 데뷔 첫해 성적은 7승 9패,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10월 한국시리즈 3차전(해태-빙그레) 승리투수(4-1)가 되면서 해태 우승을 견인한다.
선동열의 어깨 건초염과 롯데의 상승세에 밀려 1992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해태는 절치부심, 1993시즌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선발이었던 선동열을 전문 마무리로 돌리고, 조계현을 붙박이 선발로 기용한다. 시즌이 시작되자 조계현은 구단이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17승을 거두고 1994년에는 자신의 최다승인 18승을 달성하면서 선발로 자리를 굳힌다.
1996년 8월 11일 광주구장(해태-롯데) 경기에서 삼진 7개를 솎아내며 3안타 1실점으로 완투승을 거두며 12연승 기록을 세운다. 그해 성적은 27경기에 출전 16승(완투승 11개, 완봉승 3개) 7패 방어율 2.07을 마크한다. 그는 선동렬, 김성한이 없는 해태가 프로야구 사상 한국시리즈 8번째 우승의 일등공신이 된다. 그럼에도 1997년 시즌이 끝나고 이순철과 함께 삼성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된다. 아래는 조 감독의 소회.
"1997 시즌이 끝나자 이강철과 저를 묶어서 엘지 이상훈과 트레이드한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그해 제 성적이 8승 9패이지만 이강철하고 저는 100승을 넘게 한 투수들이고 이상훈은 40~50승에 불과한데 묶어서 2대 1로 트레이드한다는 말에 열 받아서 제가 먼저 보내달라고 했죠. 그때 해태를 떠나면서 제 야구인생도 하향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향길···."
두 평 남짓의 마운드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싸움닭 조계현. "투수는 투지와 배짱 자신감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선수들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느냐고 묻자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옛날과는 사람이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야구 지도도 옛날 방식으로는 선수들과 커뮤니티 형성이 어렵습니다. 문제점을 발견해도 선수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찾아 긁어준 뒤 지적해야 공감하지, 옛날처럼 군림하려고 하면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를 듣죠. 다시 말해 지도자(감독)는 군림이 아니라 선수들과 동행하면서 지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한 지도자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LG 챔피언스 파크'를 나오는데 조계현 감독의 지도이념 중 "지도자는 군림이 아니라 선수들과 동행하면서 지도해야 한다"는 대목이 귓가를 맴돌았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