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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서수면 이엽사농장 '소작쟁의'는 독립운동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4.03.01 16:34:5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옥구농민 항일항쟁 기념 사업회(회장 이진원 군산문화원장)는 2013년 11월 1일(금) 오전 11시 전북 군산시 서수면에 있는 임피중학교 교정에서 제86주년 옥구농민 항일항쟁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옥구 농민들의 항일정신과 뜻을 기리는 이날 행사에는 유족과 시민, 박행병 익산보훈지청장, 문동신 군산시장, 각급 기관장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임피중학교는 일본인 악질 농장주들이 1926년에 설립한 '이엽사'(二葉社) 농장이 있던 자리로 해방 후 뜻있는 주민과 후손들이 일본인 농장주들의 혹독한 착취와 왜경의 폭압에 소작쟁의(小作爭議)로 맞선 선조들의 항일정신을 기리고자 1994년 12월 20일 이곳에 '옥구농민 항일항쟁 기념비'를 세우고 해마다 기념식을 거행해오고 있다.

 

이진원 원장은 "이엽사농장 소작쟁의(옥구농민 항일항쟁)은 1927년 11월 일본인 농장주들의 터무니없이 높은 소작료(75%) 요구와 일본 경찰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국내 농민운동의 대표적인 항쟁으로 3·1 운동의 연장이요, 독립운동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소작료는 전국 평균 48%, 전북지역은 42%~46%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동신 시장은 격려사에서 "옥구농민 항일항쟁은 단순한 소작쟁의 의미를 넘어 호남의 3·1 운동 발상지였던 군산의 진취적인 기상을 확인시켜준 애국애향 정신이 깃든 소중한 역사로 생각한다"며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시민정신으로 승화시켜 50만 국제관광 기업도시 군산을 건설하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으로 발전한 옥구농민 소작쟁의

1905년 옥구군(군산시) 서수면에 대농장을 설립한 가와사키(川崎)는 전제적 방식으로 농장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고향인 일본 니가타 현(新潟県) 출신 지주들에게 옥구지역에 농장설치를 권장한다. 1926년 가와사키가 죽자 대형농장경영의 유리함을 알게 된 지주들은 그해 주식회사 형태의 '이협사농장'을 설치하고 봉건시대 영주처럼 군림하였다.

 

전북 군산시 옥구면 옥정리 212번지 출신 장태성(또는 공욱·수봉)은 전주고보 3학년 재학시절(1926) 동맹휴학과 일본인 교장 배척을 주도한 협의로 전주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 판결과 함께 퇴학 처분을 받는다. 당시 나이 19세. 그는 농민운동에 뜻을 품고 이협사 농장이 있는 서수면 용전리 이형노씨 집에 야학을 차리고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에 힘쓴다.    

 

1920년을 기점으로 우리 민족은 80%가 농민이었고, 그중 전북은 68%가 소작농이었다. 특히 군산·옥구 지역은 일본인 농장의 밀집지대요, 농토 수탈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옥구 농민조합이 탄생했고, 장태성의 도움으로 서수 농민조합, 서수 청년회가 생기면서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의 폭압에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항쟁의식을 갖게 된다.

 

1927년 11월 20일 이엽사농장은 75%의 고율 소작료를 요구한다. 이에 서수 농민조합 교섭위원 장태성은 ①소작료를 45%로 조정해 줄 것 ②포장은 비싼 가마니보다 '섬'으로 할 것 등을 호소했다. 그러나 무시당하자 임시총회를 열어 불납을 결의하고 2차 방문하여 사정했지만, 농장 측이 공갈·협박으로 불응하자 24일 정식으로 내지 않겠다는 뜻을 농장 측에 통고한다. 

 

농장 측 신고를 받은 경찰이 장태성을 포박하여 군산경찰서로 압송하려고 임피역 주재소에 유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농민들은 25일 야밤에 징을 쳐 500여 명이 삼거리에 집결, '장태성 석방!'을 외치며 궐기하였다. 격분한 농민들은 임피역 주재소 기물을 파괴하고 장태성을 구출한다. 경찰은 26일 서수주재소를 습격한 조합원 200명 중 30명을 압송하는데 1927년 11월 29일 자 동아일보는 '군산·옥구는 계엄 상태를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1928년 5월 28일 대구복심 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19세의 장태성(張台成)은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집행위원이 되어 회원을 모집하고 소작료에 관한 불온취지의 광고문을 써서 사람들이 보기 좋은 곳에 게시하였다는 것이 사건 개요이며 죄목은 ‘협박, 명예’에 관한 죄이다. 

 

군산 경찰은 시위대 중 80명을 혹독한 고문으로 문초한 후 부녀자 30명은 석방, 51명은 검사국에 송치한다. 그중 34명이 기소되어 무료변론에 나선 가인 김병로 변호사 입회하에 모두 유죄판결을 받는다. 한편 34명 가운데 18명은 해방 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고, 옥구 농민항일항쟁 기념비 부근은 2003년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 시설로 공식 지정되었다. 

 

 

 

군산의 항일항쟁 약사(略史)

의병, 만세운동, 노동운동, 미선공 파업, 소작쟁의 등으로 나타나는 군산지역 항일투쟁의 역사는 3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시작된 1895년에서 일제의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의병이 궤멸되는 1908년까지를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전국 규모로 확대되는 1906년 3월 전라도 태인에서 최익현, 임병찬 장군의 봉기는 의병 운동의 지표가 된다. 

 

제2기는 1919년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삼일운동(설애장터 만세시위)을 중심으로 한다. 자료에 의하면 그해 군산은 일본인(6809명)이 조선인(6581명)보다 228명 더 많이 거주하는 일본인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당시 군산 사람들의 반일감정과 독립욕구가 그만큼 높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제3기는 20~30년대 시민항쟁이다. 1919년 3월~5월까지 3개월 동안 2만 5천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여 53명 사망, 72명 실종, 185명이 부상당했던 군산의 삼일운동은 열기를 더해 노동운동으로 이어진다. 1920년 8월 전국에서 여덟 번째로 노동운동가와 진보적 지식인들이 조선노동공제회 군산부 지회를 창립하고, 1922년에는 군산 정미노동조합도 출범한다.

 

일제의 살벌한 감시에도 군산의 노동운동은 범시민적으로 전개된다. 1924년 3월 낙합정미소 정미공 2600여명 파업, 1926년 11월 군산정미소 노동자 1000여 명 동맹파업, 1927년 5월 군산역 인력거차부 80명 파업, 그해 가을 군산정미소 총파업, 1934년 가등정미소 여공 파업 등이 있었다. 악덕 경영주들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과 일본인 감시원들의 몸수색, 성희롱 등에 맞서 조합결성과 파업으로 대항했던 것.   

 

1927년 1월 21일 조선인 소상공인 7~8명은 회합을 하고 군산상업회사(群山商業會社)를 출범시킨다. 생필품인 면사포, 신탄(숯, 석탄) 등을 30년 가까이 일본에서 공급받아 사용해온 것을 가슴 아파하던 그들은 회사설립 후 주식 모집도 하였다. 그들은 신탄, 승입(가마니, 새끼줄), 수산물, 비료, 곡물 등을 위탁하여 판매하는 대리업을 했으며 발기인은 이근삼을 비롯해 이근영, 김기태, 신사선, 조성삼, 정두언 등이었다.

 

이근삼은 일본인 미곡 중개업자들의 횡포로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소작농과 소상인들 권익 보호에도 앞장선다. 군산은 1920년 이후 일인 지주를 옹호하는 소작조합이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그는 1929년 10월 9일 뜻을 같이하는 10여 명과 강호정(죽성로) 박영희씨 집에서 간담회를 열고 상인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는 연미중개점(延米仲介店) 철폐운동을 결의하는 등 일본 업자들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군산의 정미소 미선공 항쟁과 서수농민 항쟁 중심에는 일제와는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이 단합하여 만든 신간회(新幹會)가 있었다. 1927년 6월 12일 군산 유치원에서 설립대회를 치른 군산 신간회(초대 지회장 김현창)는 지회장 식사(式辭)와 내빈 축사(祝辭)조차 왜경의 감시와 제지를 받으면서도 사회운동을 펼쳐나갔다.

 

경술국치(1910) 이후 소작농으로 전락한 조선 농민의 항일항쟁(소작쟁의)은 삼일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부터 소작쟁의가 봉쇄되는 1939년까지 21년 동안 전국적으로 14만 1천여 건 일어났으며, 전북에서만 2만 1천 730건의 크고 작은 항쟁이 있었다. 그중 '이엽사농장 소작쟁의'(1927년 8월 9일~1928년 9월 29일)가 가장 큰 규모의 항쟁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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