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활동보다는, 업적을 홍보하는데 더 열을 올리는 사람들과 달리 평소 언론 기자들과 만나기를 쑥스러워하는 박정희 군산시의원. 시의회 행정복지위원장으로서, 교수로서 또한 민원이 가장 많기로 소문나 늘 바쁜 그이기에 인터뷰 약속을 잡기에 무척 힘이 들었다.
의원님의 성장배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목욕탕집 딸입니다. 평범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큰 어려움도 없이 컸습니다. 옛날 부모님 사시던 시절에는 모두 다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당시 목욕탕이라도 하나 하고 있으면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 집은 매번 식사 때마다 항상 20~30명이 함께 먹었어요. 목욕탕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물론이고, 동네 노숙자분들까지 누구에게든 식사를 대접했어요. 집 뒤에 허름한 노숙자 시설이 있었는데, 요즘처럼 정부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겨우 군인 담요 같은 걸로 거처를 마련해서 노숙자분들이 살게 해놓았죠. 그곳에 계시던 분들이 식사 때마다 저희 집에 와서 드셨고, 어떨 때는 재워주기도 했어요. 또 장항에서 배를 타고 통학하던 친구들이 많았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운항을 못하는 날엔 저희 집에 와서 자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와, 대단하신 어머니시네요.
그런 엄마 덕분에 저는 좋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어렸을 때는 그게 싫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같은 밥상에 노숙자분들과 함께 밥은 주니, 감수성 풍부한 소녀가 좋아했을 턱이 없었지요. 밥 먹다 숟가락 놓고 나갔다가 엄마한테 맞아 죽을 뻔 한 적도 있어요. 그 이유는 밥 얻어먹는 것도 서러울 텐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고요. 다 커서야 엄마의 뜻을 이해하겠더군요.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인생은 나눔이다’라는 걸 말이죠. 그래서 언니랑 같이 20여 년 동안 자원봉사를 정말 열심히 다녔어요. 직장에 다니듯 월요일엔 모세스영아원, 화요일은 요양원에 가서 어르신들 목욕 시켜드리고 기저귀 빨고 수요일엔 복지관에 가서 봉사하고……,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계속 봉사만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제안을 하더군요. ‘사회복지를 정식으로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물론 몸으로 움직여서 봉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공부를 해서 체계적으로 돕는 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마흔의 늦은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지요.
특히 독거노인에 관심이 많으시죠?
오랜 동안 몸이 아프셨던 시아버님 수발을 들며 ‘지금은 내가 힘이 있어서 이렇게 할 수 있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독거노인문제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기 전, 2000년도 즈음부터는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독거노인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군산시에는 독거노인사업이 전혀 없던 시기였습니다. 군산시재가복지협회장을 맡으면서 독거노인서비스매뉴얼도 만들고 등급평가서도 처음으로 만들어 각 기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제가 무엇을 한번 하겠다하면 최선을 다해 하거든요. 덕분에 자원봉사 하러 다닐 때에는 자원봉사상을, 부모님 병 수발 할 때는 효부상을, 사회복지 일을 할 때에는 우수 사회복지사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정치에 문외한이었던 저는 처음부터 의원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재가노인복지복지사업을 하고 있던 중, 정부에서 ‘장기요양보호법’을 실시하고자 ‘시범지구 선정’이 있었습니다. 우리 군산은 빠져있었지요. 시범지구가 된 곳을 가보니 담당공무원들의 이야기가 “업무가 과중해서 맡고 싶지 않았지만 막상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하다 보니 정말로 잘했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장기노인요양보호법이 시작되면 바로 노인들이 혜택을 받게 되니까요. 마침 정부에서 두 군데를 추가로 지정 한다기에 부랴부랴 준비를 시작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같은 민간사회복지사가 군산시에 자료요구를 하면 협조가 잘 안 되는 겁니다. 게다가 우리 시에서는 추가 지정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실 당시 시장님이 안계시고 대행체제였으니 더욱 결정할 사람이 없었죠.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도 아무 진전이 없었고, 기존의 시의원들마저도 장기요양보험제도를 잘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지금은 흔하게 쓰고 있는 용어이고 노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제도이기도 한데 말입니다. 그때 ‘아, 시의회에도 사회복지전문가가 하나쯤은 있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출마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노인복지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 하나로 무작정 결심을 하게 된 거죠. 그해 5월 31일이 선거일이었는데 불과 세 달을 남겨둔 3월 1일 출마를 결심하게 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무 전략도 없이 그야말로 무작정 선거에 뛰어 들었죠. 당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선거 출마를 결심하고도 계속 강의를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용기였는지……. 선거사무실에는 우리 언니 혼자 앉아 있었고요. (웃음) 언니는 “야, 넌 선거 나간다는 애가 강의하러 나가고, 네 볼일 보러 다니고, 선거운동은 언제 하냐?”라고 핀잔하기 일쑤였지요. 저는 “응, 선거운동 해야지……, 근데 선거운동은 어떻게 하는 거야?”하고 되물었으니 언니는 기가 막혔을 거예요. (웃음)
가족들은 뭐라 하던가요?
선거에 나가기 전에 가족회의를 했지요. 아이들은 “엄마가 하시면 양심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훌륭한 의원이 되실 거예요.”라고 격려를 해주었고 남편은 더 큰 봉사를 하겠다면 찬성이라고 하더군요. (웃음)
그렇게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선이 됐는데.
제 덕으로 의원이 됐겠습니까? 사람들이 “아 그 목욕탕 집 막내딸? 그 집 딸이라면 믿을 수 있어. 그 부모를 보면 알지.”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도와주시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그동안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알게 됐던 분들이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 없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회의하고, 알아서 스스로 일하고, 저는 학교에 수업하러 가고. (웃음) 어느 날 엄문정 의원이 “박정희! 민주당에 입당 해보지 않겠어?”라고 권유해주셔서 당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열린우리당이 대세였는데 민주당으로 당선이 된 거죠. 제가 잘나서가 아니고 부모형제 덕, 함께하던 자원봉사자들 덕분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정치계에서는 다들 깜짝 놀랐지요. 그 당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기에 말도 많았고 억측도 많았는데, 세월이 지나니 많은 분들이 저라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사랑해 준 덕분에 군산시 최초 여성 지역구 재선의원이 되었고 최초 여성 상임위원장(행정복지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설마 지금도 대학 강의를 하시나요?
네, 물론입니다. 현재 호원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군장대에서도 10년 넘게 강의를 하고 있고요. 의정활동이 아무리 바빠도 강의는 웬만하면 안 빠지고 합니다. 후배들에게 사회복지의 개념을 확실하게 심어주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사회복지사는 전문가로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존재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해야 됩니다. 또한 그들 때문에 먹고 사는 게 아닌, 오직 그들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필히 인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강의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강의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다보니 다른 의원들과의 소통이 부족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의원님은 원도심전문가로 더 알려져 있는데?
제 별명이 ‘원도심’입니다. (웃음) 의원이 되니 복지전문가인 저에게 복지 일만 하라고 하진 않더라고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원도심살리기’라는 어마어마한 일이었지요. ‘원도심 지역 의원으로서 원도심을 살려야 할 책임이 있다.’라는 것이죠. “도대체 원도심을 무슨 재주로 살려야 하는가?”라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의 다양한 사례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국내 ‘원도심살리기’ 사업을 시행한 지역을 모두 다니며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원도심 활성화 용역을 맡겨서 마스터플랜을 잡고 원도심을 블록 별로 나눠봤습니다.
원도심을 블록별로 나누셨다고요?
제 지역이 행정동으로 4개(월명, 삼학, 신풍, 중앙)동이고 법정동으로 24개동입니다. 각각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 특성들을 살려서 근대역사를 기반으로 여러 가지를 추진했습니다. 근대역사 경관지구로 지정사업을 한 ‘고우당’을 계획했을 때는 그저 세트처럼 구경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제가 고집을 피워서 실제로 사람들이 숙박을 할 수 있게 되고 식사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머무르며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되면 원도심에 사람들이 더 오랜 시간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으니까요. ‘고우당’은 한마디로 견본처럼 주변 상인들에게 ‘아 저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모여 드는구나!’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의미가 큽니다. 자기 집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개발을 하게끔 자극제가 되어주는 거지요. 스스로 개발할 능력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 지금 시에서 하고 있는 ‘1930 시간여행’처럼 건물의 겉모양이라도 바꿔드리는 사업 등을 하고 있는 거지요.
‘대한민국경관대상’받은 것도 의원님 공이 크네요.
이제 조금씩 그 결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지만, 벌써 ‘대한민국경관대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고무적이죠. 우리 시장님도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주셨고,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식민지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내항 일대의 조선은행이나 일본 제18은행이나 박물관은 일제에 항거했던 식민지역사의 교육장으로 복원하였는데 근대역사박물관에 1년 동안 2만2천명이라는 외지 관광객들이 찾아와 준 덕분에 원도심 집값도 오른편입니다. 이제는 떠나간 원도심주민들이 다시 돌아와 공동주택건설과 원주민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주거 조건을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현재 시의원 중 서로 마음이 잘 통하시는 의원이 있다면?
사심 없이 군산시 발전을 위하여 일하는 몇 몇 의원들과는 속마음을 터놓고 함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유선우 의원이나 설경민 의원 같은 젊은 의원에게는 소신과 청렴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최선을 다해 일하면 더 큰 정치를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조언을 합니다. 정치 선후배를 떠나서 사회 누나로서 아끼는 마음이 앞선다고 할까요.
정치인으로서의 목표는?
요즘 저보고 도의원으로 출마할 뜻이 있느냐고 많이들 질문합니다. 아마 일반적인 수순이라서 자꾸 물어보시는 것 같은데,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딘지, 보람 있는 일을 할 곳이 어딘지 가 저의 목표지점입니다. 제가 정치에 큰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정치를 마쳤을 때 내 자신과 자식들, 또한 주변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일한 의원으로 평가받고 싶은 게 지금으로서는 저의 목표입니다. 작년 수해를 겪으며 신풍동으로 중앙동으로 삼학동으로 월명동으로 정신없이 다니며 비통해하는 주민들을 보며 다짐한 것은 열악한 원도심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꼭 필요한 의원이 되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지금 매진중이고요.
마지막으로 군산시민들께 하실 말씀은?
원도심 개발이 없이는 군산시에 미래와 행복은 없다고 봅니다. 역사를 잊은 국민에게 미래가 없듯, 많은 시민들이 신도시 수송동과 미장동으로 이사를 떠나는 게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군산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원도심이 공동화되면서 침체의 악순환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사람들이 돌아오는 원도심을 만들기 위해 힘들게 뛰고 있습니다. 우리 군산시민들께서도 조금이나마 동참을 해주신다면 군산의 새로운 역사가 다시 만들어 질 거라고 믿습니다. 물론 신도시는 깔끔하고 세련됩니다만, 우리 원도심에는 신도시가 가지지 못한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맛과 정이 있습니다. 대형마트보다는 푸근한 인심으로 덤을 얹어주는 재래시장을 찾으시고, 전통 맛 집에서 식사도, ‘고우당’에서 커피도 마시면서, 근대역사박물관 구경과 함께 ‘동국사’도 산책해 보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여러분, 원도심으로 다시 돌아오세요!
긴 시간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드리고, 지역의 참된 언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매거진군산에도 큰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