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뭐라고, 우리 자매의 우정에는 실금이 갔다. 지지리 많이 싸웠던 어린 시절은 싹 잊고, ‘절친’으로 지낸지 십 수 년 만에 일어난 변고였다. 제부는 밥보다 과일과 고구마를 더 많이 먹는다. 내 자매는 햇고구마가 나오면, 불로초 찾듯이 고구마를 사 들여서 감별한다. 그러다 우리 집에서 맛 본 ‘나포 김연정 고구마’, 마침내 “유레카!”가 터져 나왔다.
그 고구마는 살 수 없다. 얻을 수만 있는 고구마였다. 염치가 있는 고구마라는 뜻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품위를 버렸다. 고구마를 간청했다. 얼마 뒤에 우리 자매는 비닐봉지에 가득 든, 두 개의 ‘나포 김연정 고구마’ 앞에 섰다. 동화 <의좋은 형제>처럼, 덜 가지려고 서로의 낟가리에 제 볏단을 옮겨놓는 폭풍감동은 없었다. 우리 자매는 서로의 처지만 내세웠다.
“네 조카(우리 아들 꽃차남)가 고구마 좋아하는 것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가져가고 싶냐?” “자매는 일옹(제부)이가 이 고구마 아니면 안 된다고 한 것 알지? 그러면 하나라도 더 얹어줘야 하는 것 아니야?”
‘나포 김연정 고구마’는 나포가 친정인 김연정(31세, 전업주부)이 농사 지었다. 직장 다닐 때는 놀러 다니느라고 남 일처럼 여기고 지냈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 혼자 지내는 친정엄마를 ‘볼 줄 아는’ 눈이 생겼다. 세 살, 다섯 살인 아이들과 함께 고구마도 캐 보고, 토마토도 따는 곳. 개와 고양이도 있고, 아이들이 맘대로 놀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친정집 나포.
“저는 디스크가 그렇게 아픈 건지 몰랐어요. 진짜 너무 아팠어요.”
김연정은 올해 농사 지은 훈장으로 허리 디스크를 얻었다. 친정 엄마가 하는 일을 거드는 거니까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쪼그리고 앉아 고구마를 캤다. 골반이 아팠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의원에 가서 9cm 짜리 장침 5대를 맞았다. 그래도 아프길래 정형외과에서 처방해 준 근육통 약을 먹었다.
비 오던 날, 일 나간 친정 엄마의 부탁으로 고추, 깨, 버섯 널어놓은 걸 거두러갔다. 다 마치고 지후를 안아 대문턱을 넘는 순간, 찌릿했다. 그녀는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CT 사진을 찍은 뒤에 디스크라는 병명을 알았다. 연정은 당분간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무조건 쉬어야 하는 기간은 최소 일주일, 입원만이 답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쉴 형편이 안 돼요. 애들 볼 사람이 없어요.”
연정의 몸은 마음과 딴 판, 거동이 불가능했다. 병원에 누워 일주일을 지냈다. 두 아들은 일 다니는 친정 엄마와 퇴근이 늦는 남편 서재욱(35세, 삼성화재 근무)님이 번갈아 돌봤다. 아이들은 어쩐지 짝이 안 맞는 옷을 입고, 머리가 덥수룩해진 채 유치원에 갔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병원으로 온 친구들이 디스크 환자인 그녀를 씻겨주었다.
그녀를 돌봐 준 친구들은 동네 친구, ‘나포 소녀들’이다. 고등학교 때는 버스를 타고 군산시내로 같이 통학했다. 학교까지 50분, 한 번씩 버스를 ‘떨키면’, 완전 지각이었다. 김연정은 고3 때에 일찌감치 취업 나갔다. 그런데 같이 다니던 ‘나포 소녀들’ 중 한 명이 대학에 간다고 했다. 그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대학을 새롭게 뜯어봤다. 가고 싶어졌다.
“엄마, 나도 학교 가야겠어요. 서해대요.”
“군산대(국립)도 아니고, 학비 비싼 데를 뭐 하러 가?”
“내가 알바해서 다닐 거예요.”
“안 된다니까.”
연정은 사흘 동안 엄마 이은숙 여사님을 졸랐다. 드디어 유아교육과에 입학했다. 생활비와 용돈은 김연정이 알바로 꾸려나갔다. 방학 때면, 논산에서 세탁소 하는 언니네 집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 학기 중에는 초밥 집에서 써빙을 했다. 소바와 새우튀김을 만들었다. 알바로 단련된 몸이었지만 갈비 집은 몹시 힘들어서 며칠 만에 그만뒀다.
학교 다니는 3년 동안 공부와 알바를 같이 했다. 고되지 않았다. 잠이 부족했지만 ‘나포 소녀들’과 엄청나게 놀러 다니면서 활력을 찾았다. 취업도 잘 됐다. 국공립 어린이집, 첫 월급 132만원. 부모님과 할머니께 빨간 내의를 선물해 드렸다. 나머지 돈은 통 크게 써 봤다. 스물세 살 아가씨의 패기였다. 그 다음부터는 달마다 60만원씩 엄마한테 드렸다.
“어린이집 일이요? 아주 잘 맞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저는 그냥 애들이랑 같이 지내고, 가르치는 일이 수월했어요. 돈 버니까 친구들이랑 놀러도 더 자주 가고요. 대천 머드축제에 놀러갔는데 거기서 남편도 만났어요. 2년 동안 쫓아다녔어요. 아침저녁으로 문자하고, 전화하고요. 오빠 동생으로 지내다가 결혼했어요.”
큰애 임신 8개월째에 직장을 그만뒀다. 2년 터울로 둘째를 낳았다. 아기를 키워야 하니까 집에서만 지냈다. 남편 서재욱 씨는 일이 많아서 늦게 퇴근했다. 그녀는 해 질 무렵이면, 답답하고 우울했다. 어디라도 갔다 와야 그 마음이 가실 것 같았다. 남편이 주말마다 아이들을 책임지고 맡아보는 시간이 늘어나자 연정의 숨통은 조금씩 트였다.
역시, ‘나포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을 만나서 아가씨 때처럼 놀면서 주말을 보내는 날은 인생의 보너스 같았다. 집안 살림과 애들 기르는 것에 더 힘이 났다. 전공을 살려서 아이들의 몸에 범벅이 되도록 물감 놀이를 한다. 아이들이 방바닥에 뻥튀기를 흘리면, 아예 집안 가득 쏟아놓고 놀게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애들 키우는 집이 항상 정돈되어 있다.
“제가 더러운 걸 잘 못 봐요. 근데 그렇게 깨끗하지 않아요. 진짜 꼼꼼하면, 각 맞춰서 딱! 놔야죠. 저는 물건들이 안 보이게만 정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하게 깔끔한 편은 아니죠.”
연정의 큰아들 시후는 우리 꽃차남과 같은 어린이집에 다녔다. 아이들이 소풍갈 때마다 그녀는 우리 꽃차남 도시락까지 싸 줬다. 화요일에는 우리 꽃차남이 시후네 집에 가고, 금요일에는 시후가 우리 집에 와서 논다. 아래 위층 사는 애들은 속옷 바람으로 서로의 집을 오간다. 놀면서 싸운다. 유치원처럼 사회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서 원초적으로 싸운다.
나는 처음으로 ‘내 새끼’가 아닌 아이를 똥 닦아주고 씻겨봤다. 시후도 이제 내가 밥숟가락 위에 김치나 호박을 올리면, “싫어요, 안 먹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어느 순간, 우리 꽃차남은 시후 동생 지후가 기저귀를 떼는 것, 말 하게 된 것을 신기하고 여기고 자랑스러워했다. 자기는 형아인데 지후가 이름을 부른다고 속상해도 한다.
아이들은 완전한 기쁨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일은 돈 버는 것보다 힘들다. 지시와 요구만 있다. 깊은 대화는 없고, 행동의 제한만 있다. ‘나’라는 존재는 점점 작아진다. 마음속도 좁아진다. 엎지른 우유, 쏟아놓은 장난감, 읽어달라는 책과 갖가지 투정 속에서 신경이 곤두선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도, 어느새 소리를 빡빡 지르고 있다.
“애들을 어디다 맡길 데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시간이 없는 거예요. 하루 종일 애만 봐야 하고, 나가려면 애를 데리고 나가야 하고요.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운동이라도 하고 싶은데 시후 아빠가 늦게 오잖아요. ‘그러면, 나 새벽에 일어나서 수영 다니겠다’고 했죠. 그 시간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다니면, 집에 피해 가는 것도 없고요.”
그녀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수영하러 다닌 적도 있다. 지난 한 시절, 나도 그랬다. 큰애 젖 떼고부터 학교 들어갈 때까지, 새벽마다 월명공원에 갔다. 내 친구는 직장 다니면서 애 키우는 게 힘들어서 “빨리 마흔이 됐으면 좋겠어. 그러면, 애들이 컸을 거 아냐?”하며 울기도 했다. 이 세상에 없던 여린 생명을 불러와 낳고 키우는 일은 헌신만이 필요했다.
막막하고 외로웠던 그 시기를 지나고 보면(나는 큰애와 10년 터울로 꽃차남을 낳아서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지만)얻는 게 있다. 내 아이만 들여다보고 살았는데도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훨씬 따뜻한 눈으로 보게 된다. 길에서 아기가 떼쓰며 제 엄마를 들들 볶는 모습까지도 예쁘다. 그래서 아이들을 다 키운 엄마들은 젊은 엄마들을 격려하며 웃어준다.
“애기들 키울 때가 진짜 좋은 때지. 최고로 예쁜 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