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안도현-
흥남파출소 길 건너 골목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면 길가 모퉁이에 연탄취급소 하나가 있다. 오래된 건물에 낡을 대로 낡은 간판이며 새까만 연탄수레가 지난 40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고색창연한 이 가게의 주인은 금슬 좋기로 소문난 하동선(78), 이길윤(68)부부다. 하동선 씨가 연탄취급소를 연 것은 1973년도. 무겁기도 한데다가 다루기도 조심스러운 그 연탄 배달 일이 이제는 힘에 부칠 뿐만 아니라 수요마저 줄어 그만 접을 법도 하련만은 팔순을 코앞에 바라보는 그는 지금도 그 일을 놓을 수 없다. 어딘가 추운 방에서 애타게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젊은 시절
하동선 씨가 태어난 곳은 고창. 1936년도,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9살 되던 해 해방을 맞았는데 그 해에 전 가족이 군산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는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6년제이던 사범학교에 진학하였으나 너무 빈한한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다달이 월사금 내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더구나 부모님마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엄습하는 절망 끝에 급기야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교사가 되겠다는 꿈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3년 뒤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그는 직업을 택했다. 18세 때 구암동에 있던 북선제지(후일의 고려제지/현 페이퍼코리아)에 입사한 것이다. 군 소집영장을 받기도 했지만 체중미달로 면제를 받았다니 당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랐을 그의 몸이 얼마나 왜소했을지 짐작이 어렵지 않다. 그는 설계공작과에서만 13년을 근무했는데 꼼꼼함과 정밀함이 요구되는 그 업무는 그의 성격과도 잘 맞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는 정신적으로도 독립심을 키우며 조금씩 강인해져 갔다. 그러면서도 아래로 5남매의 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모두 어쩔 수 없는 그의 몫이었다. 삶이 너무 힘들 어서였을까, 스무 살을 넘기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만나게 된다.
삶의 전환기
당시만 해도 국내 최고의 제지공장으로서 잘 나가던 그의 직장이 예기치 않은 돌발 변수들로 인하여 경영난에 빠지게 된 것은 그의 나이 31세 무렵이었다. 어쩔 수없이 회사를 그만둔 뒤 이곳저곳 공장에도 다녀보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보았지만 형편은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렇게 약 7년여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동생이 연탄취급소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다.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당시만 해도 연료와 난방을 거의 연탄에 의존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어서 열심히만 하면 벌이가 괜찮을 듯싶어서였다.
나라가 가난했던 그 당시는 민간에서 마땅한 땔감이 없어 집집마다 볏짚이나 보릿단, 낙엽, 나뭇가지나 장작 등 원시적 형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고 관공서나 학교 같은 곳에서만 겨우 조개탄 난로 등을 사용하는 정도였는데 당시 군사 정부 중요 정책 중의 하나로 땔감 문화를 바꾸고자 추진했던 산물이 연탄이라는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이것은 더 이상 땔감 확보 차 산림을 훼손할 수 없는 시책이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산림녹화를 앞당기는 근간이 되었다. 비교적 값이 싸면서도 화력이 좋은 연탄은 하루가 다르게 수요가 증가하였다. 그래서 38세 되던 해 그는 지금의 장소에 ‘한일연탄공급소’라는 간판을 걸고 평생 천직인 일로 접어들게 된 것도 그런 세태와 맞물려서다.
그는 40세 되던 해, 지인의 중매로 열 살 연하의 지금의 부인을 만나 늑장 혼인을 했다. 앞뒤 돌아볼 새 없이 열심히 살며 동생들을 모두 결혼시키다보니 정작 자신은 노총각 신세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혼 생활은 연탄 나르는 일이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어차피 시작한 일, 열심히만 하면 웬만한 직장생활보다는 나을 듯싶었다. 그러나 그 일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고 너무도 힘들었다. 당시 연탄 한 장의 무게는 4kg정도여서 100장을 싣는 손수레로 10회 정도 배달을 한다고 칠 때 그 만 해도 그 작은 체격으로 하루 평균 4톤의 무게를 운반하는 고된 중노동이었다.
연탄수레에는 인정도 애환도 싣는다
일은 힘들었지만 부부의 성실함으로 거래처는 나날이 늘어 갔다. 연탄이 가득 실린 손수레를 남편이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숨 차는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주문이 들어오면 아무리 멀어도 배달했다. 지금은 도심을 형성한 나운동도 당시에는 외곽 농촌 지역이어서 가는 데에만도 40분 이상 걸림으로서 연탄을 내리고 쌓고 되돌아오면 2시간 이상이 소요되었고, 멀리 해망동에서 주문을 하는 이도 있었는데 그 동네 연탄취급소를 이용하지 않고 굳이 가까운 거리도 아닌 이들에게 부탁한 것은 평소의 근면 성실함과 정직함, 그리고 정겨운 부부애의 모습으로 남다른 인상을 준 것이 큰 요인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그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쉴 새 없이 일했다. 겨울철에는 저녁식사도 9시를 넘기기 일쑤였고 입은 옷과 두 손은 까맣게 물들어 아무리 씻고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다만 주일에는 부부가 손잡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라면 휴식이었다.
그러한 나날을 보내던 와중에 공진, 복진 두 아들도 태어났다.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단 하루도 쉬지 않는 그 연탄수레는 시내 구석구석 누비지 않은 길이 없을 정도였다. 남들은 꺼리던 고지대의 배달도 이들에게는 그저 고마운 고객으로 여겨졌다. 자식들이 학생이 되고 철이 들면서 한 때 부끄럽게 느꼈던 부모님의 직업에 떳떳함을 넘어서 존경심마저 갖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차남 복진 씨에 따르면 고등학생 시절 언젠가 아버지의 손수레를 뒤에서 밀고 흥남동 고지대 어느 집에 배달을 갔는데 그토록 힘들게 배달해 준 연탄 대금을 아버지께서 받지 않고 나오시더라는 것이다. 영문을 몰라 여쭤보니 홀로 사는 어려운 노인이라서 그냥 드리는 거라 하셨다. 자신의 형편도 어려웠던 터라 처음엔 이해가 안됐지만 돌이켜 볼수록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졌다. 평소 독실한 신앙심으로 자신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말없이 실천하는 하동선 씨의 이러한 모습들은 알게 모르게 자식들에게도 일생의 교훈으로 작용하여 넉넉한 심성과 자립심 충만한 성장을 이끌게 된다.
하지만 연탄취급소 일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연탄보일러의 확산 등으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급증하면서 군산에만도 7곳 이상의 연탄 공장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1975년도 무렵 1장에 38원 하던 연탄 값이 80년대 들어 157원으로 가격 상승을 몰고 왔는데 그와 함께 예기치 못한 파동도 닥쳐왔다. 정부에서는 연탄의 규격을 기존 4Kg에서 3.7Kg으로 줄이고 한 가구당 200장 이상 구매를 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는 시책을 폈다. 하동선 씨는 고객들의 어려운 사정과 원성을 외면할 수 없어 어떻게든지 주문량을 확보해 볼 요량으로 연탄공장마다 찾아다니며 통사정을 해보기도 했으나 거절당하고 힘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아찔한 순간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리막길에서 수레가 뒤집혀 실려 있던 연탄이 온통 박살난 것은 차치하고 하마터면 죽을 뻔 했던 일이며, 갑자기 쏟아진 비에 수백 장 연탄이 곤죽이 되어 하루 종일의 힘든 일이 허사가 되는가 하면 뺑소니 오토바이에 치여 큰 부상을 입은 일까지 돌발 사고는 항상 도사리고 있어 긴장을 늦출 새가 없었다. 그러나 고객 중에는 손을 씻을 비누와 수건을 건네는 사람, 나르는 일을 거드는 사람, 별도의 수고비를 주는 사람에서부터 식사를 대접해주는 푸근한 사람도 있어 그럴 때면 고마움과 함께 쌓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기도 한다. 반면에 괜한 트집을 잡는 사람, 외상 대금을 떼어먹는 사람도 있어 허탈함을 주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별별 사람도 다 있게 마련이어서 안 좋은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변화하는 세상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90년대 들어서자 유류 소비가 권장되면서 기름보일러가 등장하였다. 당시만 해도 유류 값이 쌌거니와 다루기가 간편하면서도 공간도 적게 차지하는 그 연료는 연탄을 대체하는 새로운 에너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가뜩이나 계절적 불황을 타는데다가 연탄의 거래가 급감하면서 생활은 다시 어려워져 갔다. 부인인 이길윤 씨는 공공근로에서부터 식당일까지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다행히 자식들은 건강하고 바르게 잘 자라주었다. 연탄 수요가 예전의 반에 반도 안 될 정도로 줄어갔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탄을 사용하는 계층 거의가 서민, 극빈층이어서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만 했고 어차피 그 일을 천직으로 여긴 만큼 힘이 다하는 날까지 하고 싶었다. 연탄은 단순한 땔감이 아니라 엄동설한 누군가에는 생명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급기야 90년대 들면서 7곳의 연탄공장들은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통폐합되어 한일연탄, 호남연탄 두 업체만 존속하게 되는데 그마저도 90년대 중반 들어 한 시절 호황을 누리던 옛 영화를 뒤로하고 모두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은 전북 도내를 통틀어 전주, 정읍 단 두 곳에서만 연탄이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유류가격 폭등으로 인하여 예전의 연탄이 다시 부활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가정집은 물론 이, 미용실, 식당 등의 자영업소를 비롯하여 특히 화원이나 화훼단지 등에서는 대량으로 난방을 연탄에 의존할 정도로 연탄의 몸값도 높아져 500원 대를 상회하고 있다. 그러면서 옛 거래처들로부터 다시 주문이 늘고 있으니 예측할 수 없는 인생사에 회한이 깊어지기도 한다.
해야 될 일이 있다는 즐거움
어느덧 이 일을 시작한지 40년이 된 하동선 씨는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이제는 자식들도 다 장성해서 손주도 보았고 그만 쉴 때도 되었지만 아직은 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얼마 전 큰 아들이 신차 운반트럭을 구입, 도와줌으로써 이제는 힘든 손수레를 쓰지 않아도 되고 멀리까지도 얼마든지 배달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연탄은 정읍에 가서 수천 장씩 싣고 와야만 되는데 차가 없었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그래서 그는 이 트럭이 너무도 든든하고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다. 나운동에서 ‘명진종합주방’을 운영하고 있는 둘째아들은 그만 부모님을 편히 쉬시게 하고 싶어도 놀면 뭐하냐는 말씀과 함께 평생 손에 익은 그 일을 즐기는 데서 건강함이 유지되는 것 같아 부모님 뜻에 따르고 있다는 말을 들려준다.
하동선 씨가 일생에 걸쳐 실어 나른 것은 연탄만이 아니라 신용과 인정이기도 했다. 이일을 접지 못하는 이유도 아직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평생을 한눈팔지 않고 근검성실하게 살면서도 자신보다 처지가 어려운 이웃을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그 심성은 경쟁과 탐욕으로 날이 지고 새는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가당찮아 보일 법도 하나 그래서 그는 올곧게 살아온 지난날과 스스로에게 항상 떳떳함으로서 지금의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모른다. 아직도 한겨울에 내의를 입지 않고 찬물로 샤워를 할 정도로 건강한 체력이 유지되는 데에는 이 같은 외유내강의 심성도 큰 요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약 60 수년도 더 지난 초, 중학생 시절의 통신표와 상장, 필기 공책 등을 그대로 다 보관하고 있다. 당시 종이 질도 형편없고 낡을 대로 낡은 공책이지만 마치 인쇄한 듯 꼼꼼한 글씨체의 공책은 아무리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이로 볼 때 그가 여건이 되어 더 많은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연탄취급소를 연 이래 지난 40여 년 간의 거래내역을 깨알 같이 적은 장부들도 빠짐없이 보관하고 있다. 그의 인생의 기록물이기도 한 이러한 것들은 그 개인의 것을 넘어 후대 언젠가는 역사적 한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지역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지닐 듯하다.
시간이 나면 주로 책을 읽거나 친구와 장기를 두는 것이 유일한 취미라는 하동선 씨. 평생의 노동으로 손마디는 거칠어보였지만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온화하고 건강한 인상을 주는 그가 건재한 한 이 겨울을 추운 방구들에서 가난과 외로움을 삭이는 불우한 이웃들로서는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 후년 팔순 잔치 때 두 아들은 부모님께 제대로 된 혼례복을 갖춰 입혀드리고 또 한 번 정식 혼례를 올려드릴 생각이라며 이제는 두 분께서 편히 여행이나 즐기며 사셨으면 좋겠다하는데, 여행을 가서도 연탄 고객들이 마음에 걸려 맘 편히 구경이나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일연탄공급소
063-462-7075
전북 군산시 삼학동 3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