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과거로의 여행_내안의 원도심(元都心) / 오성렬(자유기고가) poi3275@naver.com
40~50년전만 해도 당시의 군산 시가지가 오늘날 구도심(舊都心),또는 원도심(元都心)이라는 명칭으로 불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 후 급격한 산업화를 겪는 와중에 도시가 팽창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군산도 나운동 방향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조성됐고 모든 상권이나 인구가 신시가지 쪽으로 집결되면서부터 원래의 지역은 구도심화 되어 빠르게 사양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나운동도 이제는 수송,지곡동 방향으로 시가지가 확장되어 나가면서 서서히 구도심화 돼 가고 있어 당초의 옛 시가지는 원도심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채 쇠락이 고착화 된 상태다. 따라서 나이 50중반 이후 세대에게 있어 학창시절의 추억이란 곧 원도심에서의 추억을 말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필자의 중,고 시절인 60년대만 해도 군산은 인구 11만 내외 되는 활기 넘치는 도시였다. 당시 군산 경제의 중심축이었던 기업체로는 구암동 소재 지금의 ‘페이퍼코리아’ 전신인 ‘고려제지’를 비롯해서 ‘한국합판’ ‘백화양조’ ‘경성고무’ ‘청구목재’ 등이 있었고 그 때만 해도 모든 산업설비가 거의 인력에 의존하던, 지금에 비하면 엄청난 고용 유발 효과가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고려제지는 광대한 회사 부지 안에 직원들 사택과 축구장이 갖춰져 있었으며 연료와 자녀들 학용품까지 회사에서 제공해 주었고 급여도 한 달에 두 번으로 나누어 지급했는데 월 중간에 받는 급여를 ‘간조’라 했다. 또한 명산동 현 공영주차장 자리에 있던 구암병원을 지정병원으로 하여 직원과 그 가족들의 건강관리에도 신경 썼는가 하면 영동에 있던 문학서점과 제휴하여 직원 자녀들은 그 곳에서 얼마든지 책을 구입해 읽게 하고,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등 기업의 후생복지 수준이 전국에서 최고라 할 정도로 선도적이어서 고려제지의 직원이라는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던 시절이었다.
전국의 명소가 되다시피 한 경암동의 철길은 지금은 녹이 슬대로 슨 추억의 철길이 되었지만 고려제지가 운영되던 당시는 펄프원목을 엄청나게 실은 기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적을 울리며 왕래하던 바쁜 철길이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지금은 하구둑 방향으로 가는 대로로 변한 고려제지 앞 도로는 당시만 해도 플라타나스 가로수 늘어선 아래로 자그마한 내가 흐르던 아담하고 정취 있는 길로서 필자의 통학로이기도 했다. 간혹 달밤에 그 길을 지날 때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필자는 어느 가로수에 기대어 가곡이나 팝송 등을 목청껏 부르기도 했는데 근처 살던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어느 여학생이 러브레터를 보내오기도 했으니 필자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길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 후 경영주였던 김원전 사장의 국회의원 낙선, 광산사업 실패, 경쟁 업체의 속출 등으로 사업이 내리막을 걷다가 73년도 초 한국합판으로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며 지금은 전성기를 구가했던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주변 환경이 변한 상태다.
01_전국의 명소가 된 경암동 철길 02_옛 고려제지 앞 전경-현 페이퍼코리아
경암동 지금의 E마트 자리 일대에 있던 한국합판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서 원목을 수입하여 합판을 만들던 회사였는데 그 시절만 해도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합판의 수출과 내수를 충당하느라 호경기였던 때라 처음에 공장 하나로 시작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제3공장까지 증설 하는 등 융성기를 맞아 아침 저녁 출, 퇴근 시간대에는 파란 유니폼을 입은 수 많은 여공들이 인근 도로를 가득 메우는 것도 진풍경이었으니 모든 산업설비가 자동화되어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지금의 세태로 보면 그 또한 아련한 추억의 편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원목 수출에 의존하던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자국 경제보호 정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원목수출을 중단하고 직접 합판 제조에 나섬에 따라 원자재 수급 길이 막히고 수출과 내수도 줄게 되자 경영이 악화되어 고려제지를 인수한 후 상호를 바꾼 세대제지와 80년대 중반 합병하기에 이르면서 상호를 다시 ‘세풍’으로 변경, 이 후로도 회사 내 일개 합판사업부서로 존재하며 명맥을 잇다가 세풍 역시 후에 무리하게 투자한 신규 사업의 실패 등으로 회사가 파산 상태에 이르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결국 2000년대 초 M&A 를 통하여 지금의 ‘페이퍼코리아’로 경영권을 넘겨주게 된다. 우리의 젊은 시절, 군산을 키워 냈던 위 모든 향토기업들은 이렇듯 일부는 외지 타기업에 인수합병되거나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군산시민이라면 누구나 아쉬움과 함께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느끼리라 생각된다.
또한 당시는 어업이 활발하여 금암동이나 해망동에 있던 어항(漁港)이 연일 북적였으며 지금은 매립되어 대로로 변한 중동 사거리에서 돌산(石山)아래 문짝목공소길로 들어가는 곳 까지도 강줄기가 통해 있어 ‘서래포구’로 불리던 그 안쪽까지 어선들이 들어오곤 했는데 경암동이나 구암동 방면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포구를 가로지른 속칭 ‘서래물문다리’가 시내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행로 였다. 서래포구와 구 군산역 사이에 웅장하게 서 있던 돌산(石山)은 최근 다 사라지고 구 역 방향으로 직선도로도 뚫렸지만 해방 직후 현재의구암동 세풍아파트 뒷산에 근사한 서양식 석조건물을 지었던 미국인 선교사가 멀리 돌산을 바라보며 ‘지금은 한낱 돌산이지만 언젠가는 돈산이 될 것이다’ 라고 말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후에 그 돌산에서 채석을 하여 많은 돈을 번 사람이 생겼으니 ‘돈산’이라는 그의 예언이 맞은 셈이다. 또 지금은 폐항되다시피 하여 토사만 가득 쌓인 채 ‘해양테마공원’으로 탈바꿈한 내항까지도 수 만톤급의 거대한 국내,외 무역선들이 자주 입항하여 학생복을 입은 우리들은 그 배의 선원에게 통사정을 하면 간혹 배의 내부를 견학시켜주기도 했는데 처음 보는 그 웅장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가하면 지금도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부잔교(浮棧橋/뜬다리)나 제방 위에서 엉성한 낚싯대로 망둥이를 낚던 재미도 쏠쏠했거니와 가끔 농어 같은 생선도 걸려들 때면 환호성을 지르면서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엔 기후 변화에 따른 생태계 전반의 이동 현상으로 근해에서 옛날처럼 고기가 잡히지 않아 어업 역시 사양산업이 됨으로써 항구도시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어항이나 어시장에서의 예전의 활기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지금은 장미동이나 영화동이 완전 슬럼화 되었지만 그 시절만 해도 특히 영화동은 미군들이 많이 북적이는 활기 띤 동네로서, 마치 지금의 서울 이태원거리 같은 풍속도를 지닌 곳이었다. 그래서 상점의 간판도 거의 영문으로 되어 있었고 그 미군들 상대로 수입을 얻는 윤락녀들도 흔히 미군과 함께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시민들은 미군을 대개는 ‘양키’라 불렀으며 윤락녀들은 ‘양공주’ 또는 그보다 더 비하해서 흔히 ‘양X보’라 했는데 국제결혼으로 미군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간 경우도 있고 혼혈아만 남긴채 미군이 본국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혼자서 그 2세를 키우며 윤락생활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가슴 아픈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 또한 영화동에는 완전 벗다시피한 무희들이 야릇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미군전용클럽(주점)이 있었는데 한국인과 달리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미군들 상대만으로는 영업이 잘 안된다하여 슬적 슬적 내국인을 더러 입장시키기도 하였으며, 과연 한국인들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나체춤에 호기심도 있던 터였고 앉았다 하면 기본 몇 십병씩은 매상을 올려주는 호기가 있어 주인 입장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어떻든 그 미군들이 뿌려주는 달라($)도 군산 경제의 한 축을 이루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자녀 교육상 문제가 많다는 등의 시민들의 거부감으로 인해 시에서는 영화동의 모든 미군 상대 유흥업소를 미공군비행장과 가까운 미성읍에 ‘실버타운’이라는 마을을 따로 조성하여 이주시켰는데 주 수입원이었던 미군이 빠져나간 뒤 영화동은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한 채 급격히 공동화되었으며 실버타운 역시 후에
‘아메리칸타운’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수 년전부터 미군들의 발길이 끊기고 이용객도 현저히 줄어 유명무실해진 모습이다.
영화동 외에도 당시의 상권은 영동에서부터 평화동 일대, 그리고 구 시청 부근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으며, 대명동의 구시장(공설시장)과 명산동의 유곽시장도 활기가 있었다. 송방골목이라고도 하였던 영동은 최상의 상권이었으며 지금의 국민은행 앞쪽으로 파출소가 있었는데 나이 든 분들은 그 파출소를 왜정 때 관습대로 ‘영정(永町)파수막’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평화동 상권과 연결된 일명 ‘양키시장’엔 학생복과 군복을 취급하는 옷가게가 주를 이뤄서 군산의 학생들 치고 양키시장을 안 가본 사람은 거의 없지 않나 한다. 또 형편이 어려워 옷조차 변변히 사 입지 못하는 사람은 값 싼 군복을 사서 염색하여 입기도 하였다. 양키시장의 상인들 중에는 한국전쟁 후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그들은 남 달리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운 데가 있었으며 그 중 몇 곳은 오늘날까지 가업을 이어 영업을 계속 하고 있으나 평화동이나 양키시장 모두 옛날의 전성기가 믿기지 않을 만큼 한산한 지역이 되어버렸다.
학생시절 추억이 깃든 곳으로 중국음식점과 빵집을 빼 놓을 수 없다.
지금은 말만 중국집이지 실제로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업소가 거의 전부이나 당시에는 화교(華僑)가 직접 운영하는 업소가 많던 시절이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장미동의 만춘향, 빈해원을 비롯해서 중앙로의 영취루, 중앙각, 평화동에 있던 쌍성루, 태평각 등이 생각나며 그 곳의 짜장면이나 탕수육 맛은 전국에서도 알아줄만큼 유명했다. 용돈이 궁했던 학생들 중에는 무작정 중국음식점에 들어가 음식을 배불리 시켜먹고 냅다 도망을 치는가 하면 차고 있던 손목시계 등을 맡기고 나오기도 하는 등 오늘날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도 다반사였지만 학생이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는 용인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빈해원만 남고 모두 문 닫고 말았다.
또한 제빵과 아이스케익을 판매하는 큰 업소로는 이성당을 비롯해서 중앙로에 있던 조화당과 남풍당, 평화동의 대화당, 구시장 사거리에 있던 군산당, 개복동의 풍년당, 명산동의 금주당, 그리고 대명동엔 백만당이라는 빵공장이 있었는데 그 역시 모두 폐업하거나 업종을 바꾸었고 현재는 이성당만 남아 성업중이다. 지금은 학생들이 이성을 만나는 장소가 다변화되었지만 당시에는 대개 빵집이나 중국음식점을 이용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추억이 서린 장소이기도 할 터다.
필자도 중3때 동급생인 J여중 여학생으로부터 제의를 받고 만춘향 2층 방에서 단둘이 만났던 적이 있는데 여드름도 귀엽게 몇 개 돋은 미인형의 그 여학생은 쑥맥이었던 나와 달리 조숙한 티가 났으며 이성교제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단 둘이 있는 그 시간이 그저 어색하고 지루하기만 했다. 그 이후로도 그 여학생의 집이 있는 성산면까지 가서 달밤에 뒷산에 올라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나는 적극적이었던 그 여학생과 달리 체구는 컸지만 이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었고 매너도 모를 만큼 순진아였던지라 그 여학생에게는 실망만 안겨줬을 게 뻔하며 결국 몇 차례의 의미 없는 만남을 끝으로 헤어지고 말았는데 만일 지금 그 시절로 다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글쎄, 그 때처럼 바보(?)같이 굴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50~60년대 당시 군산에는 몇 개의 극장이 있었다. 그 중 제일 추억에 남는 곳 중의 하나가 장미동에 있던 ‘문화관’이란 곳으로서 문화관 말고도 개복동에 소재한 ‘남도극장(후일의 국도극장)’ 과 ‘군산극장(후일의 우일극장)이 있었는데 타 극장은 극장의 면모를 갖춘 곳이었던 반면에 문화관은 노천극장에 지붕만 씌운 듯한 일종의 ‘가설(假設)극장’이었다. 관객 의자도 나무 벤치였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풍기는 악취도 심했던 열악한 곳 이었으나 입장료가 싸고 때로 어린 학생들도 입장을 시켜줬던 관계로 초등학교 때였는지 중 1 때였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몇 차례 갔던 기억이 있다. 당시만 해도 문화관에서는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시절이라 전속 변사(辯士)가 있었다. 변사는 혼자서 대화를 주고 받고 장면 장면의 정황을 설명해주는 사람으로서 때론 감격조로, 또 때론 강조조나 비탄조 등의 어조로 관객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 당시로서도 흔치 않은 전문인이었다. 문화관의 전속 변사는 필자의 동급생 부친이기도 했던 마정봉씨였는데 그 방면에서는 전국에서도 알아줬던 분으로 김희갑, 박노식 등 초창기 원로영화배우들과도 교분이 꽤 두터웠다고 한다. 하지만 변사도 때로는 화면과 맞지 않는 엉뚱한 설명을 하는 실수가 있기도 했으니 그럴 때면 관객석에서 야유와 폭소가 나오기도 하는 등, 이 또한 두고 두고 옛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일화 중의 하나다. 문화관에서는 그 당시 청소년들이 제일 재미있어 한 서부활극 영화를 주로 상영해서 학교에 가면 전날 본 영화 얘기를 침을 튀겨가며 장황하게 늘어놓던 친구 생각이 난다. 군산에는 미공군비행장이 있는 관계로 필름을 제공받을 수 있어 유달리 미국 영화를 많이 접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초창기 무성영화는 50년대 이후 발성영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부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가설극장도 60년대 초 쯤 문을 닫음으로써 이제는 아련한 추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재 그 자리는 모 가구점이 들어 서 있다. 당시 남도극장이나 군산극장에서는 청춘콤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신성일,엄앵란 주연 영화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인기가수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던 나훈아, 남진 쇼를 보러 관객이 몰리던 시절이었다. 또한 극장 입구에 ‘기도’라 불리는 건장한 체구의 직원이 서서 표를 사지 않고 은근슬적 막무가내로 입장하려는 건달이나 ‘학생불가’ 영화를 관람하러 온 학생이 있으면 제지하거나 쫓아내기도 하였고, 극장 안 맨 뒤 벽쪽에 경찰관과 해당 공무원을 위한 ‘임검석’이라는 별도의 자리가 마련 돼 있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당시 시대상에 비춰볼 때 불온한 사람을 검문하거나 장내 질서유지를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들어 장미동 지금의 그랜드사우나 옆에 잠시 존속했던 제일극장과 수준이 좀 낮았던 미원동의 현대극장도 있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고 국도극장과 우일극장은 그 후로도 면모를 바꾸어가며 활로를 모색했으나 수 년전 결국 모두 문을 닫고 말았으니 현대에 들어와 영화산업은 전반적으로 더 발전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겠으나 재벌회사에서 운영하는 새로운 형태의 전국적 복합상영관 등장과 더불어 비디오와 인터넷 등의 확산으로 안방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 된 것도 기존 극장사업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요인으로 풀이 된다.
지금은 세련된 커피숍 등의 출현으로 전통 다방이 대부분 사라지고 풍속도도 많이 바뀌어명맥만 겨우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나 60~80년대만 해도 호황을 누리던 다방이 많았다. 필자의 청소년 시절 중앙로2가에 있던 여정다방, 만원다방을 비롯해서 우체국 부근에 있었던 YMCA다방, 아카데미다방, 구 시청 부근의 심지다방, 국일다방, 개복동의 초원다방, 평화동의 물망초다방, 대지다방 등이 기억나는데 그 외에도 구 역 부근의 역마차다방, 잉꼬다방, 미원동의 정다방 등도 대체로 장사가 잘 되는 업소 축에 들었다. 그 시절만 해도 다방은 사사로운 잡담에서부터 사업적인 얘기까지 온갖 만남이 이루어지는 요람으로서 수 많은 소문과 에피소드를 양산해 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어느 업소나 마찬가지겠지만 다방도 연령별, 취향별로 자연스럽게 단골이 형성되어 예컨대 문인들이나 엘리트층이 주로 모이는 곳이 있는가 하면 대학생을 비롯해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다방도 있었고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실업자나 건달들이 모이는 곳도 있었다. 심지다방이나 잉꼬다방 등은 한 때 DJ를 둔 음악다방으로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다. 그 당시는 유명 다방일 수록 소위 ‘가오(얼굴)마담’이라고 일컫는 여자와 그 아래급의 ‘B마담’, 그리고 찻심부름을 하는 ‘레지’를 비롯해 이제 갓 들어와 배우는 ‘하꼬비’ 등의 종업원을 두고 영업을 했는데 그 서열에 따라 보수에도 큰 차이가 났다. ‘마담’의 경우 용모가 출중하고 고객확보 능력이 뛰어난 몇 사람은 지명도에 따라 몇 개월 보수의 선금을 주고서라도 영입 대상이 되곤 했으며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짐짓 우아함을 뽐내며 한 번 온 고객은 절대 놓치지 않고 단골로 만드는 영업수완을 보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따라서 어느날 인물이 반반한 마담이나 여종업원이 새로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던지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그 업소에서 종일 살다시피 하면서 온갖 선심을 쓰는 사람도 있던 낭만어린 시절이기도 했으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할 일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사회가 급속도로 산업화되면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시설과 컨텐츠로 무장한 커피숍과 주점, 그리고 노래방이나 마사지 업소 등 여성들이 비교적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신종 업소들이 늘어가자 다방 인력의 대부분이 타업종으로 전직하는 일이 많아져 구인난으로 인해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었는데 게다가 어딜 가나 흔하게 설치된 커피자판기며 손쉽게 타 먹을 수 있는 일회용 커피의 출현 등 급변해가는 세태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대부분의 업소들이 문을 닫고 말았다.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몇몇 옛 다방은 노후한 시설에 대개 나이 든 여성이 종업원 없이 혼자서 최저생활비라도 벌겠다고 영업 하는 곳이 대부분으로 가끔 그 앞을 지나칠 때면 불현듯 잠시 그 옛날의 회상에 젖어보곤 한다.
또 하나, 추억 속에는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사라진 것 중의 하나로 윤락가를 들 수 있다. 대개 어느 도시나 기차역을 중심으로 윤락가가 형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 군산역 주변에도 역과 구시장 사이에 집창촌이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대명동사창가’가 맞을 듯 하나 흔히 ‘X팔이 골목’으로 통했으며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X팔’의 발음 ‘18’을 영어로 변역해서 ‘에이틴(Eighteen)’이라는 그들끼리만 통하는 기발한 은어를 만들어 통용하기도 했다. 또 같은 대명동이면서도 시장통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반대쪽에 속칭 ‘감독’이라 불리는 유흥가가 형성되었는데 그 곳은 주점의 형태로 운영하면서 윤락도 겸하는 곳으로 한 때는 호황을 누리기도 했던 곳이다. 감독이란 말은 옛날 그 곳에 감을 거래하던 큰 시장, 즉 감도가(都家)가 있었던 관계로 줄여서 감독이라 했던 것인데 발음상 감똑으로 들리기도 한다. 또 한 군데는 개복동과 창성동 일대 산자락에 형성돼 있었던 집창촌이다. 그 곳은 지대가 높다 하여 일명 ‘오백고지’로 불렸으며 산비탈을 타고 누추한 집들이 미로를 따라 게딱지같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아래쪽 군산극장 주변에도 윤락을 겸하는 주점촌이 형성되어 활기를 띠었다. 집창촌을 찾는 고객들은 연령이나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오랫 동안 육지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뱃사람이 많았던 듯하며 미군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들 대개는 성적인 욕구를 풀고자 하는 사람들이겠으나 게중에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는데 고등학생의 경우 버젓이 교복을 입은 채로 드나드는 시쳇말로 일찍 까진 학생도 있었다. 어떤 때는 학생과 교사가 그 곳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서로가 적잖이 당황했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학생보다는 교사가 더 느꼈을 낭패감과 민망함이 짐작이 간다. 그 시절엔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친구따라 그 곳에 갔다가 얼떨결에 동정을 버리는 경우도 많았고 숫총각의 딱지를 떼 준 윤락녀는 재수없는 일이 생긴다는 그 세계의 징크스가 있어 딱지를 떼인 고객이 문을 나가기가 무섭게 소금을 뿌리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한다. 그러다보니 이 곳을 매개로 한 온갖 성병이 만연했고 특효약으로 알려진 어떤 마이신은 입소문을 타고 유독 많이 팔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윤락가는 독버섯처럼 뿌리내린 채 우리사회의 음지에서 오랜 세월 굳건히 존속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 했다. 지난 2000년도 및 2002년도 두 해에 걸쳐 연달아 일어난 개복동 및 감독 주점촌 윤락시설의 화재로 철창 안에 수용되어 지내던 약 20여명의 나어린 윤락녀들이 희생된 참사가 그것이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들어 여권이 신장되면서 본격적으로 패미니즘이 공론화되던 차에 터진 이 사건은 특히 여성계의 큰 공분을 불러 일으켰고 ‘성매매방지법’ 제정의 촉매재 역할을 하였다. 결국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대부분의 집창촌을 폐쇄하기 시작함으로써 지금의 개복동은 주점촌이 사라지고 옛 산자락은 새로운 환경으로 탈바꿈되어 고층아파트가 들어 섰으며 대명동의 감독 역시 사람의 발길이 끊긴 한산한 지역으로 변했는가 하면 속칭 ‘에이틴’은 인적조차 찾기 힘들만큼 흉물스런 폐가로 남아 있다. 위 윤락업소들은 지역에 따라 30~50여년 이상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누군가에게는 눈물을, 또 누군가에게는 희열이기도 했을 숱한 애환이 범벅된 ‘시대의 뒤안길’이기도 했으니 당시로서는 일정 부분 자생적인 필요악이었지 않나 여겨진다. 그러나 집창촌 폐쇄 후 우려했던 풍선효과 등으로 그 부작용과 폐해가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혹자는 윤락행위가 오히려 더 은밀하면서도 다양한 형태로 변종화 되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출구가 막힘으로써 성범죄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발생한다고 진단하기도 하는데 당장의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떻든 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안고 가면서 고민해야 할 골치 아픈 숙제가 아닌가 한다.
02 100년 역사 간직한 구 조선은행의 발자취_정밀한 복원사업으로 근대사 교육의 장으로 거듭나야 / 조종안(시민기자) chongani@hitel.net
군산시 중앙로 구 경찰서 로터리에서 내항으로 가는 언덕길(동영고개)을 넘으면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투구를 연상시키는 구 조선은행 건물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회사 어음을 결제하느라 하루에도 수천, 수억의 돈다발이 오갔던 은행 건물이 흉물스럽게 변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2008년 7월 국가등록문화재(제374호)로 등록되어 관리되어오다 복원공사 마무리 단계에 있는 구 조선은행은 1923년에 신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0년 4월 상량문과 출근부가 발견되면서 1920년 12월에 상량식을 가졌고, 1922년 7월 완공됐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은행에 대한 기록화 사업 중 지붕 아래에서 발견된 상량문은 한식 건축물이 대들보에 기록하는 것과 달리, 나무 송판 전면에 ‘조선은행군산지점상동식’이라 쓰고, 뒷면엔 지배인 이름과 시공사, 설계자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출근부에는 1908년부터 1925년까지 은행 직원들 출근내용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1권 62장으로 엮은 출근부는 당시 직원들 근무현황 파악은 물론 근대 은행역사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형식과 미관이 뛰어나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 아래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건물로 소문이 자자했다 한다. 그런데 해방 이후 한일은행 군산지점 건물로 사용되다 1980년 이후 나이트클럽, 노래방, 가라오케 술집 등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찢기고 발겨져 찾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은행 건물 건축 양식은?
군산지역 근대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자료로 관심 받는 구 조선은행 건물은 건축 양식이 서울에 있는 상업은행 본점과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군산세관, 나가사키 18 은행, 미두장(米豆場) 등과 함께 군산의 ‘본정통’(중심가)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였다.
군산문화원 이복웅 원장(67세)은 “건물 외관은 전체적으로 서양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수직성이 강조되고 경사지붕으로 처리되어 장중한 느낌을 준다”며 “외벽은 원래 붉은벽돌 조적조였으나 후에 부분적으로 타일이 붙여졌다.”고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정면엔 평아치가 5개로, 양옆엔 중앙부보다 돌출되어 반원으로 되어 있는데, 측면 앞쪽의 평아치 세 개와 뒤쪽 반원 아치는 꼭 상하층이 연결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만큼 정교하게 지어졌다는 뜻이죠. 창문 주변과 상하층 창문 사이에 시멘트 모르터로 기둥과 인방 형태를 만들어 백색의 뿜칠로 마감하여 붉은 외벽과 대조를 이루게 한 것도 시선을 끕니다.
외벽 중간에는 보 머리를 상징하는 화강석을 끼워 장식했고, 지붕은 우진각 형식으로 함석판 잇기로 마감되어 있는데 물매가 상당히 급합니다. 지붕의 경사면 중간에 고창이 있어 자연채광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건물만의 특징이지요.”
이 원장은 설명을 마치고도 못내 아쉬워했다.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학생 및 시민들의 학습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도록 복원공사를 진즉 시작했어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데려온 자식 쳐다보듯 버려두었다는 것이다.
문화재다운 문화재로 보존해야
전 군산대학교 사학과 천형균(76세) 교수는 유서 깊은 건물을 걸레조각처럼 찢겨지고 망가지도록 30년 가까이 방치해온 데 대해 안타까워하면서도 건물을 쌓은 붉은 벽돌들이 대부분 상하지 않고 보존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문화재다운 문화재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천 교수는 “한국에 이만한 수준의 건물을 지을 건축 기술이 없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등이 무너진 것에서 알 수 있듯 부정과 비리로 얼룩져온 세월이었으니, 해방 이후 작품 소리를 들을만한 건축물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며 개탄했다.
복원공사 마무리를 앞두고, 일제강점기 은행건물이라는 눈요기 차원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시각으로 관찰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군산의 근대 역사를 한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해서 건물이 세워지게 된 배경과 은행 업무의 변천 과정을 자료를 통해 좀 더 심층적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신축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시공에 참여했다는 주장은 일치하면서도 설계한 사람이 둘로 나뉘어 유감이었다.
하나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인질로 잡혀온 독일인들이 설계하고, 중국인 석공들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일인(日人)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興資平)가 설계했고, 지붕 공사 때 중국인이 사고로 떨어져 사망한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중국인이 공사에 참여했다는 시각이어서 전문가들의 세밀한 자료 조사와 연구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구 조선은행'과 '우리은행' 관계는?
(우리은행 개성공단 지점 모습(2008.1)
군산시 장미동 23번지에 위치한 구 조선은행은 1903년 11월 설립한 ‘다이찌은행’(제일은행) 군산 출장소 업무를 1909년 한국은행(대한제국 국책은행)이 인수받았으나 1910년 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바뀌고 1916년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승격된다.
당시 군산에 개점한 중앙은행 7개 지점 중 규모가 가장 컸으며,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는 푸른 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로 묘사되고, 고객의 돈을 유용해 미두와 주색잡기에 빠져 남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 죽임을 당하는 고태수의 직장으로 등장한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현재 영업 중인 어느 시중은행과 연을 맺고 있는지, 뿌리는 어디까지 내렸는지 살펴보았더니 2004년 개성공단에 지점을 개설한 ‘우리은행’이었다. 해서 ‘우리은행 군산지점’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우리은행은 대한제국 시절(1899년 1월30일)에 황실 자본과 조선 상인이 중심이 되어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대한제국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한천일은행’은 우리나라 최초 은행이자 주식회사로 기록되고 있다. ‘대한천일은행’은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격인 탁지부대신에게 제출한 창립청원서에 “돈을 원활하게 융통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근본”임을 창립이념으로 삼고,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팔 수 없다”고 명시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외세로부터 은행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정하였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조선 상권이 피폐화되었던 백동화사태 때에도 일제에 저항하며 휴업을 단행했으며, 1907년부터는 일본에 진 나랏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모금액을 관리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국권침탈 이후 조선총독부는 ‘대한천일은행’을 ‘조선상업은행’으로 변경시키는 등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족적 애정은 사그라지지 않아 1919년 3·1운동 때에는 본점 앞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조선신탁주식회사’(1932년 설립)와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1936년 설립)도 한 축으로 자리 잡았으나 한국전쟁으로 이북 지역의 51개 영업점을 상실하는 쓰라림을 겪었다. 주로 서민과 소기업금융을 담당했던 두 회사는 해방 후 ‘한국흥업은행’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1960년에는 우리은행 전신인 ‘한일은행’으로 탄생했다.
구 조선은행의 어제와 오늘
01_상단 좌측에서 시계방향으로.
(사진1)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주변.
(사진2)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사진3) 한일은행 군산지점.
(사진4) 우리은행 군산지점
구 조선은행은 일제강점기(1922년)에 건물을 신축하여 영업을 해오다 해방 이후 한국은행으로 명칭이 바뀌어 전주로 이전하고, 1950년 6월 ‘조선중앙무진회사 군산지점’으로 은행업무가 인수된다. 1953년에는 ‘한국상공은행(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1955년 9월에 ‘한국흥업은행 군산시점’으로, 1960년 1월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다시 업무가 인수된다.
‘한일은행 군산지점’은 1980년 1월 장미동 시대를 마감하고, 중앙로 2가 신축 건물로 이전하여 영업을 해오다 외환위기 시기인 1999년 1월 ‘상업은행 군산지점’과 점포를 통합하면서 ‘한빛은행’으로 바꿨다가 2002년 5월 ‘우리은행 군산지점’으로 거듭나는데, 우리은행은 2004년 12월 분단 이후 은행권 최초로 개성공단에 지점을 개설한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개성공단 지점은 파견 직원 3명과 현지 고용인원 3명 등 6명이 입주 업체와 주재원들을 대상으로 여·수신 및 송금, 현지 급여 송금 등 업무를 해오고 있다”면서 “천안함 사태(2010년 3월) 이후 입주기업이 줄면서 여신 업무도 줄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은행 군산지점’ 원류는 1940년 11월 群山府 大和町(현 영화동)에 개설했던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 군산지점’이 되겠는데, 1954년 10월 ‘한국흥업은행 군산지점’으로, 1960년 1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구 상업은행은 1917년 ‘조선상업은행 군산지점’이란 이름으로 群山府 全州通 34에 점포를 개설하는 것으로 군산과 인연을 맺는다.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1950년)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5년 12월 정부지시로 폐쇄된다. 1968년 9월 중앙로 2가에 건물을 신축하고 영업을 해오다 1999년 1월 한일은행 군산지점과 통합한다. 구 조선은행 건물에 입주해서 영업해온 금융기관들의 업무 인수, 통합, 폐쇄, 이전 등 복잡한 역사는, 반세기 가까운 일제 탄압과, 남북분단에 이어 1천만 이산가족을 생산한 한국전쟁, 군사정부의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불러온 IMF 금융위기 등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지럽고 가슴 아팠던 역사를 보는 듯하다. 구 조선은행 건물은 시민의 애환이 서린 금강을 등에 업고 군산의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어, 대할 때마다 반가워야 함에도 그렇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치욕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헐벗고, 굶주리고,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였다.
100년 가까운 영욕의 세월을 거치면서 일어났던 사건들과 인연의 끈이 닿아 있는 ‘구 조선은행’ 건물. 군산시 관계자는 복원공사를 마치면 군산의 새로운 명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디 뼈아픈 근대사 교육의 장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