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0여 명의 학생들 모두 연령 50대에서부터 80대에 이르는 그 학교는 특별하다. 특별하기는 정미선(43)교장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열정 하나로 시작하여 헌신과 봉사로 지켜온 세월이 어느덧 20여년.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오룡1길(구 삼학동주민센터 건물)에 새롭게 둥지를 튼 ‘우리배움터한글학교’는 거의 고령층인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민간 자율학교다. 이 학교는 21년 전인 1992년도, 당시 지금은 해체된 민중당 소속 김종철 씨를 중심으로 군산 지역 약 2만 여명으로 추산되는 문맹자들에게 우리글을 깨우치게 하자는 취지로 설립되었는데, 초기에는 금광동 삼성아파트 인근의 건물을 임대, 헌 교과서를 구입하여 순수 자원봉사자들로 교사진을 구성, 출발하게 되었다.
초창기 학생 수는 약 200여 명으로서 소요 경비 충당이 쉽지 않아 월 5천 원 정도의 수업료도 받았고 뜻있는 인사나 기업체 등에서 일정 부분 후원도 뒤따라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당시에 비해 학생 수도 줄고 학비도 없앴거니와 후원도 적어져 어려움이 크다는데 지난 9월 12일, 21년 동안 정든 옛 건물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 새롭게 단장을 마치고 개소식을 가졌다.
당시 22세의 어린 나이로 설립 이듬해(1993년도)부터 학교의 간사 직을 맡아 운영 실무자로 참여해 온 정미선 교장은 설립자인 김종철 씨의 열정과 취지에 공감하여 몸을 담게 된 것인데 이후 대학에서 부동산학, 사회복지학, 교육학 등을 공부한 재원으로서 설립 당시의 관계자들 거의가 떠난 지금까지도 혼자 남아 초심을 저버리지 않고 학교의 맥을 잇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교육열이 뜨겁고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초등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빈곤한 나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우리 현실은 어린 자식들(특히 여성들)을 학교보다는 공장이나 식모(가사도우미) 등 온갖 노동력에 투입하여 식구를 하나라도 줄이거나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돈을 벌어오게 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글을 배울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희생자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대국 순위 10위권에 들 정도로 삶이 풍요로워진 지금은 사회활동이나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져 한글조차 깨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가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로서 남모르는 고민이자 열등감으로 작용하리라는 것은 짐작이 어렵지 않다. 이 한글학교가 설립된 것도 바로 이 세대 층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학생 수는 50대부터 80대까지의 연령대에 걸쳐 여성이 44명, 남성이 6명, 전체 50여 명으로서 초기보다는 많이 줄어든 편인데 수업은 주 4일, 오전 2개 반, 오후와 저녁 시간 각 1개 반씩 4개 반으로 나누고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한글수업, 목요일은 글짓기 수업을 하고 있다.
교사는 그간 간사를 거쳐 교감으로 재직하다가 오룡동 이전과 함께 교장 직을 맡게 된 정미선 교장과 2년째 재직 중인 이정신(53)교사 단 두 명으로서 오전, 오후 번갈아 수업을 진행한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던 사람에게 그것도 건망증이 심해져가는 노령 층에게 공부를 가르친다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로서 정미선 교장 역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갈등에 빠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인데 내가 포기하면 안 된다’ 는 다짐을 새롭게 하며 지금은 오히려 보람과 긍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 할 때의 표정에서 남다른 긍지와 숙연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이름자도 쓸 줄 몰랐던 사람이 이제는 글을 읽게 되고 일기나 감상문은 물론 편지도 쓸 수 있게 됨으로서 마치 소경이 눈을 뜬 것처럼 감격에 젖는 모습을 볼 때 교사로서 그 때처럼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없을 듯하다. 사실 감상문이나 편지를 쓸 정도의 실력을 갖추는 데는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통상 3년 정도의 학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느 70대 할머니는 글을 몰라 평생 동안 은행 업무를 아들을 시켜왔는데 몇 년 걸쳐 글을 익힌 뒤 처음으로 은행에 가 통장 정리를 해보고 나서야 그간 아들이 적잖은 돈을 삥땅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며 한숨을 쉬면서도 그래도 늦게나마 이제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은행이나 관공서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해맑아 보였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평생의 소원이던 운전면허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된 것도 이들로서는 복권 당첨보다도 더 신나기 그지없는 일이다.
10년, 20년 연령차가 다반사인 학생들이지만 반장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이나 소풍 등 자율적 행사도 갖거니와, 자신이 농사지은 고추, 상추 등 채소도 가지고 나와 동료들에게 나눠주는 모습도 인정이 느껴지는 정겨운 교실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들은 수업보다는 교우들과의 관계에 더 영향을 받는 성향이 있어 누구와 다투거나 반목이 생기기라도 하면 학교를 그만 두는 경우도 있다는데 비록 나이 들고 글은 모를지라도 자존심만은 어쩌지 못하는 노인들의 대체적인 성향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몇 달 후, 또는 몇 년이 지난 뒤 예전의 그 학생이 마음을 달래고 되돌아온 사례도 있고, 15년 전 제자가 전화로 학교 존속 여부를 확인하고 다시 찾아 온 흔치 않은 사례도 있는데 그럴 때면 정미선 교장은 두 팔 벌려 반갑게 그들을 다시 맞이한다. 어쩔 수 없이 학습 기간은 길어지게 되었지만 몰랐던 글자 하나하나를 배우고 익혀 책을 읽고 편지도 쓰게 된 뒤 자신감이 살아남으로써 성격도 밝게 변하였다는 심경의 고백은 대다수 학생들의 공통된 점이기도 하다.
정미선 교장에게 애로 사항을 묻자 ‘운영비’의 부족을 첫째로 들고 있다. 시에서 강사비조로 70만 원 정도의 지원금이 있긴 하지만 여타 후원금도 적어진 상태에서 건물 임대료나 인건비, 공과금, 집기나 교재비 등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원래가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사회봉사적 차원의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만큼 남다른 사명감 없이는 운영이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인데 이러한 여건에서 지난 21년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그녀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정미선 교장은 어려울 때 힘이 돼준 고마운 분들도 있다며, 초기부터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운영위원회를 비롯해서 한국유리 직원들, 산단 소재 주)진흥주물을 위시하여 중앙로타리클럽(회장 이종대)등에서도 일정액의 후원금과 집기 등을 보조해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한글학교가 앞으로 지역사회의 등불 같은 존재로 유지 존속되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열정 못지않게 주변의 관심과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인데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못 배우고 가난함 속에서도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마다 않은 우리 윗세대를 비로소 돌아보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힘든 여건에서도 초심을 버리지 않고 묵묵히 최선을 다 하는 두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배움터한글학교
군산시 오룡동1길 60
교무실 063)461-6481
정미선 교장 010-8644-6302
<후원계좌>
예금주 우리배움터한글학교
전북은행 557-13-0365002
농 협 351-0091-904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