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본 순간 참으로 편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지막하면서도 차분한 어투는 믿음을 줬고 연륜이 묻어나는 안정된 자세와 표정에서는 왠지 녹록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조전숙(55), 그녀는 수송동 제일아파트 인근에서 ‘리더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여성이다. 부동산 업소는 우리 시에만도 모르긴 해도 500개소 이상은 되지 않나 싶은데 경기 침체의 여파로 대부분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요즈음도 그녀는 항상 바쁘다.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녀의 전화기는 쉴 새 없이 울려댔고 간간이 찾아오는 방문객으로 이야기가 끊기기 일쑤였는데 도대체 그녀는 남과 무엇이 다르기에 그토록 바쁜 것일까.
김제에서 군산으로
그녀의 출생지는 김제. 평범한 농가의 3녀 1남 중 맏이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갑작스러운 가정사로 4학년 때 군산 구암동으로 이사, 구암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친께서 전답을 처분한 돈 전부를 사기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농촌에서는 한 해 벼농사를 정미소의 주선으로 장리(長利)를 놓기도 할 만큼 정미소는 마을의 금고이자 사랑방 역할도 했던 시절이어서,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던 부친께서 모든 전답을 처분하여 잠시 그 정미소에 맡겨 두었는데 어느 날 그 정미소가 야반도주하고 만 것이다. 평소 믿었던 사람에게 전 재산을 몽땅 사기당한 그녀의 집은 순식간에 청천벽력의 생활고를 맞게 됐고 부친은 정미소 주인의 행방을 수소문 하며 전국을 헤집고 다녔지만 그녀의 집뿐만 아니고 인근 3개 부락에 걸쳐 피해를 끼친 그 사기범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부친은 화를 삭이지 못하여 급속도로 건강마저 악화되어갔다. 이후 부친은 처자를 모두 이끌고 군산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가족들의 고생이 시작되기에 이른다.
일찍 철이든 어린 시절
그녀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부친께서 활발한 성격의 아이로 키우고자 애를 쓰셨는데 그 일환으로 택한 것이 웅변이었다. 그러한 부친의 바람이 통했던 것이었을까, 웅변을 하면서 성격도 활달하게 바뀌어갔고 교우관계뿐만 아니라 성적도 상위권을 맴돌았다. 부친은 때로 발성 연습을 시킨다며 인근 산에 데리고 올라가기도 해서 그때는 늘어선 나무를 청중으로 삼고 당차게 연습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각종 웅변대회에서 많은 상도 타게 되거니와,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자녀의 교육에 만큼은 남다른 열의를 가졌던 부모는 이렇듯 자신감에 찬 아이로 성장하는 딸을 보면서 무척 흐뭇해 하셨다. 학교에서는 예쁜 용모에 공부도, 웅변도 잘 하는 그녀를 담임선생님은 무척이나 귀여워하기도 했는데 이런 시기를 겪으며 그녀는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충만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그녀의 집은 대명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미처 몰랐지만 부친께서 예전에 마련해 둔 집이라 했다. 하지만 평소 심장병을 앓던 부친은 그녀가 중 2학년 때 어느 날 갑자기 별세하고 말았다.
졸지에 가정의 기둥을 잃은 가족들에겐 너무도 큰 또 하나의 시련이었다. 이후 자식들의 교육은 몽땅 모친의 몫이 되고 말았다. 사실 그녀의 모친은 그 시절로선 보기 드물게 피아노도 칠 줄 아는 인텔리 여성이기도 했으나 살림이 몰락하면서 남의 집에 품앗이를 다녀야 될 만큼 상황이 급전직하함으로서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자녀의 교육만큼은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그녀는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뛰어난 웅변 실력으로 더욱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자식들의 뒷바라지로 고생이 심한 모친을 보면서 어느 날 문득 자신의 학비만이라도 스스로 벌어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학업과 아르바이트가 쉬운 일은 아니어서 모친이나 교장선생님까지 모두 만류가 컸지만 나름 철이 들었다고 생각한 그녀의 고집을 꺾지는 못해서 그녀는 난생 처음 세무사사무실에 취업,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시작 당시에는 은연중 열등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결정으로 학비를 벌고 가정 살림에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면 스스로가 대견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일찍 세상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함으로서 돈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체득한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날이 갈수록 더욱 당차고 의젓한 아이로 철이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당시를 회상할 때면 처지가 어려웠던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언제나 밝게 웃으며 격려해주던 두 명의 친구가 특히 잊히지 않는다.
또 다른 현실 속으로
그녀는 26세 되던 해 결혼했다. 22세 무렵 친구의 언니가 소개한 남자가 있었는데 4년 만에 결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랑은 수산대 졸업 후 큰 해운회사 소속 원양어선을 타던 사람으로서 소개받았을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어 처음 2년간은 소원하게 지내다가 이후 2년 동안 서로 편지를 주고받게 되면서부터 가까워지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중앙로에 있던 나들이백화점에서 의류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남자의 본가인 부산에 내려갔다가 멋진 인품의 그 부모님을 보는 순간 결혼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결혼 후 그녀의 삶은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군산의 의류점도 다 정리하고 내려간 것이다. 하지만 말만 결혼이지 과부나 다름없는 생활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한번 항해를 떠나면 2년이 되어서야 휴가를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간이 허송세월처럼 여겨졌던 그녀는 남편의 월급 관리를 시부모에게 부탁하고 다시 군산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자신도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에 했던 의류점을 다시 열었다. 그간 남편이 번 돈도 상당했을 터여서 사실 자그마한 집이라도 구입할 생각이었지만 알고 보니 남편이 보내준 월급은 시댁에서 거의 생활비로 소진한 상태여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그때의 좌절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또다시 맨주먹으로 시작해야 되는 현실과의 맞닥뜨림은 예상치 못한 고통이었는데 그 와중에 첫째 아이도 태어났다. 그녀는 휴가 나온 남편에게 선원 생활 그만 접고 군산에서 같이 살 것을 종용했다. 남편도 미안했던지 그녀의 뜻에 동의해서 더 이상의 선박 근무를 그만두고 비로소 같이 살게 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직장이었던 부산의 해운회사 회장이 직접 집을 찾아왔다. 다시 배를 타도록 남편을 설득하러 온 것이다. 처음엔 정중히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설득과 제의를 끝내 물리칠 수 없었다. 당시로서는 집 한 채 값이라 할 수 있는 거금을 선뜻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마 후 그 돈으로 명산동에 건물을 구입, 의류점을 내게 되었고 남편은 다시 선원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 일로 미루어볼 때 남편은 평소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나 책임감이 대단했던 터여서 회사에서도 크게 인정받는 성 싶었다. 이후 남편은 약 4년간 선원 생활을 더 하고나서 해운회사를 퇴직했는데 퇴직 후 손댔던 사업이 실패하면서 한때 어려움을 겪다가 현재는 대천에 있는 모 해양개발회사에 선장으로 스카웃되어 직장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부동산중개업은 나의 천직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든 그녀의 절실한 바람은 무엇보다 가난으로부터의 탈피였다. 그녀는 의류점을 하면서도 돈이 얼마간 모이면 여기 저기 외곽 쪽에 조금씩 땅을 사두었다. 부동산이 재테크로선 제일 낫다는 것을 많이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얼마 되진 않지만 자신의 소유로 된 땅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은 남모르는 기쁨이자 삶의 활력소이기도 했다. 그사이 부동산에 관한 지식도 어느 정도 갖추게 되면서 문득 본격적으로 부동산중개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적성에도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관련 서적을 구입,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으며 공부에 매달렸다. 공부는 쉽지 않았지만 민법을 비롯하여 실생활에 필요한 관련 지식을 터득하는 것은 또 다른 소득이기도 했다. 결국 두 번의 도전 끝에 합격, 수송동에 부동산중개업소를 열게 되는데 그때가 어느덧 6년 전이다. 당시만 해도 수송동이 개발되던 시점이어서 고객도 많은 편이었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중개 요령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고 재미도 느껴져 이제야 천직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 무렵 그녀의 소개로 내흥동 보상 자금으로 수송동에 땅을 산 어느 노부인은 그 거래 결과에 얼마나 흡족해하는지 지금까지도 마치 친어머니 이상으로 정감 있게 대해주어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됐다. 그녀는 중개 경험을 쌓으며 자신의 돈벌이에 앞서 인간관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로 거래 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긴 안목으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중개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는데 게 중에는 빨리 수수료만 챙기려는 성급한 계약 추진으로 거래 일방에게 본의 아니게 불이익이 돌아가게 함으로써 불만을 야기하는 사례도 없지 않아 이런 경우를 가장 안타깝게 여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고객 가운데는 아무리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도 자신의 그릇된 판단과 고집으로 거래를 해놓고는 나중에 바랐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어이없게도 중개사를 원망하는 사례도 있는데 그렇다하더라도 매사에 정도와 본분을 지켜 스스로 떳떳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진심을 알아주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중개사는 1인 기업의 CEO
그녀에게 중개사로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묻자 두 말 할 것 없이 ‘신뢰’라고 대답한다. 너무 돈만 쫓다가 신뢰를 그르치게 되면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개사는 고객의 자산 관리를 도와주는 ‘1인 기업의 CEO’라는 자부심을 잃지 말고 정직한 자세로 객관적이고 공평한 견해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주장보다는 고객의 입장을 들어주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도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덧붙인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성실하고 믿음 있는 중개를 통하여 폭넓은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먼 장래로 볼 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할 때의 진지한 표정에서 그녀의 진정어린 내심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경제동향은 수시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전문 지식을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도 중개사로서는 필수 요건이라며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신문의 경제면이나 인터넷 등도 꼼꼼히 챙기고 있다.
앞으로의 역할에 대한 모색
그녀는 현재 바쁜 와중에도 중개사협회 군산지회의 총무 직을 5년째 맡고 있다. 총무는 회장을 도와 회원의 친목도모와 권익향상, 그리고 각종 공지사항에서부터 회원의 애경사에 이르기까지 관련 정보를 회원들에게 신속하게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라고 자평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야무지면서도 합리적인 일 처리를 지켜본 회원들 사이에서는 향후 군산 지회의 구심점으로서 보다 큰 역할을 할 인물로 내다보는 시각도 늘고 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 1녀 1남을 두었는데 딸은 정신과전문의로서 현재 중앙대병원에 재직하고 있으나 내년부턴 서울대병원 근무가 예정돼 있으며, 아들은 건축학을 전공, 관내 모 건설회사에 재직 중이다. 또한 수송동의 파티마성형외과 조상곤 원장이 유일한 남동생이기도 하다.
어려웠던 자신의 학창시절,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않던 모친께선 노후에 접어들어 슬하의 자식들과 손주들까지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더없이 흐뭇해할 듯하다. 이는 집안의 장녀로서 일찍부터 가족을 돌봐야 된다는 책임감과 자립심을 키우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온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지난 연말 ‘50만 국제관광기업도시군산건설과 부동산거래질서확립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군산시장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는데, 앞으로 불우한 노인을 비롯해서 미혼모나 그 아이, 그리고 고아들에게 미력이나마 힘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말도 들려준다. 그녀는 본래 단지 남에게 과시하거나 이해타산적인 행동을 못하는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 성격으로 무슨 일이든지 겉치레보다는 내실 있는 일처리로 상생의 결과를 거둠으로써 지인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녀의 사무실 안에는 일반적인 부동산 사무실과는 달리 이채롭게도 커다란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필자가 “아니, 다른 나라 땅도 취급하나 봐요?” 하고 농담을 건네자 “네, 한번 해보려고요” 하면서 웃는데 그 역시 농담이겠으나 그 말속에서 은연중 그녀의 포부나 배짱이 엿보이기도 해서 필자도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 공인중개사 제도가 시행된 지 어느덧 25년여 되었는데 현재는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늘 것으로 내다보여 부동산 중개업이야말로 여성이 할 수 있는 최적의 매력 직종이라면서 꿈을 가진 여성들의 도전을 권하고 있다. 앞으로의 지역 부동산 시장 전망을 묻자 작년부터 침체된 경기 여파가 아직까지 계속되고는 있으나 올 상반기부터 전, 월세 수요가 조금씩 늘고 있으며 매수 시장도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기지개를 켜는 기미가 감지된다는 희망 섞인 말도 들려주는데 이 말을 끝으로 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그녀는 밝은 얼굴로 또 바삐 어디론가 외출을 서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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