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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최고의 유산’ ‘명진종합주방’ 하복진 사장
글 : 오성렬(자유기고가) / poi3275@naver.com
2013.02.01 13:58:40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명진종합주방’은 군산상고와 나운동KT건물 중간 쯤 대로변에 있는 제법 규모가 큰 그릇가게다.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하복진(河福珍/36) 사장은 주방 업계에서는 맨손으로 성공을 거둔 인물로 알려졌는데 이러한 오늘이 있기까지 삶의 우여곡절이 궁금하던 터라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약속을 잡고 그를 찾았던 날, 수수하면서도 활달한 인상의 그는 정중하면서도 반갑게 필자를 맞아주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삼학동. 부친의 연세 43세 때이니 한참 늦둥이인 셈이다.  당시 부친은 동네에서 연탄취급소를 운영하였는데 그 때만 해도 리어카로 연탄을 운반하던 시절이어서 그 일은 보통 힘든 중노동이 아니었다.  특히 삼학동과 흥남동 일대 고지대에 배달이라도 할라치면 힘에 부쳐 부친의 손수레를 뒤에서 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군산 중, 고를 다니는 동안에도 가정형편은 나아지는 게 없었고 오히려 연탄의 수요가 줄면서 궁핍한 생활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 일이 마치 천직인 양 항상 열심이셨고 어느 땐가는 그렇게 힘들게 배달해 준 연탄 값을 받지 않고 돌아온 일도 있어 어린 마음에 영문을 몰라 여쭤보니 어려운 독거노인이라서 그냥 드리는 거라고 하셨다.  첨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심이 깊기도 했던 부모님의 이런 성실함과 남몰래 실천하는 이웃 사랑은 훗날 하복진에게 큰 교훈과 자산으로 남게 된다.

 

그는 중, 고교 시절 스스로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이나 우유배달을 비롯하여 당구장 아르바이트 등 무슨 일이든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누구한테든 기죽지 않으려 애썼고 그래서 성격도 활달한 편이었다.  그렇게 고교 졸업 후 어렵사리 우석대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군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송부에 배치 받아 복무할 때에는 웬일인지 여러 가지 사고가 끊이지 않아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을 만큼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하려고 보니 등록금이 너무 비싸 그는 또 다시 업소의 웨이터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 됐건 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경남 김해에서 주방용품점을 하는 이모부께서 며칠 동안만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에 내려가서 가게 일을 도와주게 되었는데 처음 말과는 달리 그길로 무려 1년 반을 눌러 지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장사의 요령을 배웠고 주방용품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군산으로 돌아온 그는 어떻게 하던지 복학해야 되겠다는 일념을 떨칠 수 없어 무엇보다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기에 24세 되던 해 모 주방업체에 취직, 이후 7년을 근무하게 되는데 여러 가지 사정상 복학의 꿈은 이룰 수 없었지만 그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가히 모범이 될 정도였고 따라서 그 나름의 많은 거래처와 인맥을 쌓는 기간이기도 했다.

 

 


 

8년 이상 몸으로 부딪치면서 주방용품 사업에 대해서 어느 정도 터득하게 되자 그는 독립하고 싶었다.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직원 노릇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의욕은 넘친 반면 수중에 가진 돈이라야 고작 월세 보증금 정도도 되지 않았기에 한숨부터 나왔다.  때마침 어떻게 알았는지 몇 군데 업체에서 많은 금액을 제시하며 직원으로 오라는 제의도 있었던 터여서 잠시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한번 먹은 마음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그는 모 은행에 근무하는 친구를 통하여 5백만 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 그 돈을 밑천 삼아 미원동 어느 골목길에 허름한 창고를 얻어 자신의 가게를 개업하게 되었다.  개업 소식을 듣고 지인들이 찾아 와 초라하기 그지없는 가게를 쳐다보며 기가 막혀 한숨을 내 뱉던 그 순간을 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막상 개업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러한 뒷골목에서 장사가 될 리 없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약 3개월 정도 익산, 전주, 부안, 대천 등지를 무작정 돌아다니며 식당을 짓고 있는 것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다짜고짜 찾아가 견적이라도 받아줄 것을 사정하고 다닌 적도 많았는데 하지만 성과가 없으니 너무도 힘이 들어 당장 가게를 때려치우고 다시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아마도 자신의 명함을 받은 사람 중 누구이겠으나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려 3천만 원짜리 주방공사 발주가 들어 온 것이다.  그 뿐이 아니고 비슷한 금액의 발주가 두 건이나 더 들어와 한꺼번에 세 건의 수주를 한 셈인데 기쁨에 앞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당장 친구들을 불러 모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자축의 파티를 열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공사를 진행할 초기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안 사정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는 은행을 비롯하여 그간 쌓았던 인맥을 떠올리며 자금을 융통해보고자 했으나 은행의 문턱은 높기만 했고 지인들 앞에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한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친구와 후배, 지인들로부터 조금씩 융통이 되기 시작했다.  평소 정직하고 열심히 사는 그의 모습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도우려는 마음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그는 수주한 공사를 무난히 완공하게 되었는데 돌이켜보면 매 순간이 긴장과 고통의 연속선상 이었다.

 

첫 공사를 끝내고 나자 자신감도 붙고 경제적 여유도 조금 생겨 현재의 자리로 업소도 옮기고 본격적으로 주방의 설계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주방의 설계는 대개 도면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짐으로서 비효율성으로 인한 낭비가 많은 게 사실인데 그는 이것을 바꾸고 싶었다.  그러기위해서는 우선 설계 공부부터 해야만 했는데 선행적 교범이 따로 없으니 그는 자신의 산지식과 경험만으로 독자적 기법을 도입해야만 했다.  그는 먼저 캐드(CAD/ 컴퓨터를 응용한 설계 기법)관련 서적부터 구입했다.  그는 독학으로 기법을 스스로 배우고 익혀 설계의 초안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았으나 꾸준한 연습을 통하여 어느 정도 도면다운 도면을 완성해 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각종 공사에 이 도면과 함께 견적을 넣고 발주자에게 브리핑을 하기도 했는데 이렇듯 제대로 된 설계도면을 갖춘 경쟁자가 없었기에 그의 브리핑은 더욱 신뢰를 줬고 그 결과 관내 여러 대학을 비롯한 대형 레스토랑의 공사를 수주하는 개가를 부르게 되었으니 이런 과정을 통하여 시나브로 더욱 사업에의 자신감이 충만해져 가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업체 상호를 ‘종합주방’이라 한 것도 단지 용품을 판매만 하는 곳이 아니라 주방 설계에서부터 관련 설비, 그릇 판매 등 일체를 총괄한다는 의미로서 과거의 일반적인 그릇 점에서 진일보한 형태의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엔 개업하는 식당 수 못지않게 폐업하는 식당도 많아 중고 주방용품도 대량으로 양산되고 있어 이러한 중고 주방용품 만을 따로 취급하는 사업도 얼마 전부터 병행하고 있는데 향후 동남아에도 판로를 개척할 생각이다.  실제로 몽골이나 캄보디아 등지에 가보면 질 낮은 중국산 그릇들이 판을 치고 있다시피 한데 값은 의외로 비싸 그 틈새시장을 질도 뛰어나고 가격 경쟁력도 충분한 우리 국산 제품이 공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단순히 직원 몇 명을 둔 그릇가게의 주인이 아니라 주방에 관한 한 그 어떤 경쟁자보다도 한 발 앞서나가는 사업가로 위상을 굳히고 있다.  맡은 일에 부지런하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긍정적인 성격은 그의 내공을 더욱 담금질함으로써 남다른 수완을 발휘케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평소 제일 듣기 거북한 말이 ‘장사꾼’이라는 소리라며 ‘돈을 쫒으면 장사꾼’ ‘사람을 쫓으면 사업가’ 일진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꼭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말도 들려준다.  사람을 사귀기 위해서는 그만큼 사회활동도 참여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는 JC에도 가입, 작년에는 사무국장 직을 맡기도 했으며 군산경찰서 청소년지도위원 외에도 옥서지역아동센터에는 3년째 후원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평소 운동을 좋아하여 시간이 날 때면 골프를 치거나 당구, 탁구, 족구 등도 즐긴다고 말하는데 미모의 부인과의 사이에 2남을 두고 있다.

 

그에게 성공 비결과 앞으로의 꿈을 물어보자 자신은 성공은커녕 이제 겨우 가난이나 면한 정도라며 겸손해 하는데 어떻든 맨손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이르는 동안 제일 힘이 된 게 있다면 주저 없이 부모님의 사랑을 들겠다는 말부터 한다.  가난하지만 분수를 잃지 않고 깊은 신앙심으로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올곧게 평생을 살아오신 부모님의 모습들은 돌이켜보면 너무도 큰 무언의 가르침이었고 비록 부친이지만 존경심이 절로 솟는 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야말로 부모님이 자신에게 주신 큰 유산이기에 더 없는 소중함으로 간직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그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근면 성실히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얘기일 것인데 이 말을 들으며 ‘고기를 물려준 자식은 굶어 죽기 십상이지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 자식은 오래토록 잘 살 수 있다‘는 격언이 불현 듯 떠오를 만큼 절대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그는 앞으로 국내 제일의 주방업체로 성장하고야 말겠다는 포부와 함께 언젠가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게 되면 계획과 꿈은 있으나 밑천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꼭 도움의 손길을 주고 싶다는 말을 들려주는데 아마도 자신의 경험상 누군가는 그러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리라.

명진종합주방

군산시 나운동 743-2

063)446-5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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