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모 군이 하루를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 그는 언제나 휠체어에 앉아 있다. 혼자서는 걸을 수도 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승모 군이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에게서 전신 근육에 이상이 생기는 희귀병이 발견된 것은 다섯 살 무렵이었다. 특히 초등학교 입학해서는 해가 갈수록 상태가 더 악화되어 6학년 되면서 급기야는 휠체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됨으로써 당시 부모가 가졌을 청천벽력의 고통과 안타까움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을 터이다.
일찍이 간호대를 졸업하고 간호사 생활을 하던 승모 군의 엄마(김용화, 47)는 그로 말미암아 안정된 직장도 그만 둘 수밖에 없었고 비교적 개인적 시간이 여유 있는 자유 업종으로 직업도 바꾸었다. 그러나 한창 성장할 시기, 밝고 활달한 또래 아이들과 대별되는 아들을 볼 때마다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고 시나브로 우울증 증세마저 찾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엄마는 자신에게 닥친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는 점심때마다 시간을 내어 아들의 도시락을 날랐고 수업 시간 중 때로 위급한 상태라는 연락을 받기라도 하면 황급히 달려가 구급차를 부른 적도 있었다. 승모 군의 삼촌과 고모가 한의원을 하고 있어 꾸준한 치료를 받고는 있으나 워낙 세계적으로 알려진 난치병이어서 호전은 더디었고 그래서 부모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일본, 중국 등 이름난 외국 의료기관에까지 다니면서 치료에 매달리기도 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중 고 시절, 대체로 사춘기 학생들의 교내 생활에서 장애아나 약자에 대한 괴롭힘, 집단 따돌림이 사회 문제화 된 오늘의 현실은 부모의 또 다른 걱정이기도 했으나 승모 군은 그러한 우려를 떨치고 밝은 성격에 교우관계도 원활하여 그 문제로 인한 속 썩임은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승모 군의 경우 초, 중, 고 12년 동안 단 한 번도 수학여행에 참여해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 그러한 여행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승모 군은 모든 친구들이 여행을 떠난 그 텅 빈 기간에도 오로지 휠체어에 앉아 남모르는 외로움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으로 인하여 맘을 졸이는 부모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단 한 번도 불평이나 원망 섞인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보다는 대체로 그날 배운 과목을 반복해서 복습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시간이 날 때면 여느 아이들처럼 게임기를 가지고 열심히 오락을 즐기기도 했다. 또한 프로야구 중계는 거의 빠짐없이 볼 정도로 자신을 스포츠 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기아 타이거즈의 이용규 선수를 제일 좋아한다는 귀띔도 해준다.
승모 군이 신풍초등학교, 금강중학교를 거쳐 군산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승모 군의 엄마는 세 차례 이사를 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고사가 있거니와 이 경우는 가히 승모삼천지교(承母三遷之敎)랄까. 통학 거리도 먼 금강중학교를 선택한 이유 중에는 교사(校舍)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유일한 학교여서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승모군은 1, 2학년 2년 동안 나운동 집에서부터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등, 하교를 하기도 했는데 그토록 힘든 여건에서도 개근을 놓치지 않는 성실함은 학창 시절 내내 계속되었다. 승모 군이 일찍이 이토록 자립의 의지를 기른 것도 정기적인 치료를 비롯하여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일일이 신경 쓰고 챙기는 부모의 지극정성이 큰 힘이 되었음은 말 할 나위가 없을 터이거니와 특히 엄마의 보살핌은 단지 몸이 조금 불편하다는 것 빼고는 모든 면에서 밝고 모범적인 든든한 아들로 성장시키는 절대적인 원동력이었다.
양군은 중, 고 시절 거의 교내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단 한 차례나마 사설 학원 문턱을 밟아본 것도 아니다. 아니,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리라. 아직 장애아를 배려하는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것은 거의 모든 학교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건물의 상층 부에 위치하기 마련인 사설학원 역시 휠체어가 드나들기는 제반 시설이 너무 열악하여 그 역시 양군에게는 큰 장애였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에서 배운 공부를 그날그날 꼼꼼히 복습하는 습관을 들였고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선생님에게 물어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갔다. 불편한 몸으로 주변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 마련인 미안함이 큰 상태에서도 위축되거나 주눅 들지 않으려 애썼고 급우들과 잘 어울려 첨엔 거리감을 보여줬던 일부 급우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모두 그를 따뜻이 대해주었다. 고3때는 친구들과 함께 난생 처음 전남 담양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학창 시절 내내 단 한 번도 수학여행을 가보지 못한 그를 위하여 친구들이 나서서 주도한 여행이었다. 승모 군은 이러한 친구들이 너무도 고마웠고 그래서 그 여행은 영원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승모 군이 택한 대학 전공은 통계학(Statistics). 어려서부터 유달리 수학을 잘 한 탓일까. 집단 현상을 수량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그는 매력을 느꼈는지 모른다. 아직 은 졸업 후의 꿈이 명확히 있는 건 아니나 4년간의 대학 생활을 거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히며 모색할 생각이다. 다행히 서울대학교는 약 3년 전 장애를 가진 학생이 입학한 것을 계기로 휠체어가 드나들기 편리하도록 강의실과 기숙사 등 모든 건물의 턱을 없애는 등 시설을 보완함으로써 승모 군에게는 물론 부모 입장에서도 한결 마음이 가볍다. 또한 서울대학병원에서의 진단 결과 같은 병을 가진 다른 아이들보다 승모 군의 증상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는 소견도 한결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있다.
승모 군의 가족은 지역 내 모 병원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뒤 자영업을 하고 있는 아빠와 지곡동에서 부동산 공인중개사로 활동하고 있는 엄마, 그리고 한 살 아래인 남동생과 늦둥이로 태어나 아직 7살인 남동생까지 5명이다. 특히 연년생 동생은 부모 못지않게 형을 끔찍이 챙기고 있다. 그래서 부모는 둘째에게 항상 대견해 하면서도 미안한 맘을 가진다. 승모 군이 밝고 의젓한 모습으로 성장하여 명문대에 입학하게 된 것도 이처럼 단란한 가정환경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법하다. 승모 군은 혹시라도 동병상련을 지닌 자기 같은 후배 학생이 있다면 꼭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고 한다. “장애는 단지 남들보다 불편한 것일 뿐 모자란 것이 아니잖아요, 주변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거나 위축되지 말고 스스로 당당한 존재감을 가지려 애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열등감에 쌓여 동정이나 특별취급을 받으려 하는 마음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 한다면 원하는 꿈을 꼭 이룰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