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얼음이 얼고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도 지나고 찬바람이 제법 콧잔등을 시리게 한다. 매서운 추위와 칼바람으로 고개를 움츠러들게 하는 동장군의 기세가 피부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엊그제는 취재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따끈따끈한 어묵 국물이 생각났다. 해서 전문식당과 분식집이 밀집된 군산 공설시장(구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재래시장 고객 확보와 소비자 관심 촉발을 위해 지난 3월 블루오션으로 새롭게 단장한 군산 공설시장은 1918년 군산시 장재동에 처음 개설, 1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그래서일까. 새롭게 등장한 장보기용 카트는 옛날 어머니들 장바구니와 비교되면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게 한다. 그렇게 시간여행을 즐기다가 먹을거리 코너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0년 가까이 기억에서 사라졌던 분식집 ‘써비스 분식’과 박 아주머니(73)를 만난 것.
1980년대 이후 발길이 끊겼던 분식집 간판이 30년 지우처럼 반가웠다. 박 아주머니는 필자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형수’라고 부르며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여서 반가움이 더했다. 시장에서 반찬가게를 하는 시부모를 도와 콩자반도 만들고 단무지도 담그는 등 평생 또순이처럼 일만 하면서 살아온 분이어서 애잔함이 밀려오기도. 1970년대 중반 분식집으로 업종을 변경해서 7남매(1남 6녀)를 키웠고, 지금은 큰딸(강혜자)이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박 아주머니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험한 세파에 시달리며 살아온 한 여인의 지난한 삶과 아픈 흔적들이 짧은 이야기 속에 점점이 박혀 있어서였다. 아주머니는 “틈이 날 때마다 가게에 나와 얼굴도 내밀고 종합병원 청소부로 일하러 다니는데, 요즘은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칠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에게서 느껴지는 또순이 기질에 가슴이 뭉클.
박 아주머니는 초중고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의 ‘형수’다. 1977년 11월 친구 어머니 회갑 잔칫날 참석해서 장수를 기원하는 헌수(獻壽)도 올리고 기념사진도 찍어드리면서 하루를 즐겼다. 1979년 9월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몇 년 후 병환으로 몸져누워있을 때는 문병하러 다녔으며, 돌아가셨을 때는 사흘 밤을 꼬박 새우면서 부의금 접수도 하고, 장지도 알선하는 등 사연도 많고 인연도 꽤 깊다.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박 아주머니는 ‘써비스 상회’, ‘써비스 분식’ 등 50년 넘게 사용한 상호에 ‘써비스’가 들어간 내력도 알려주었다. 원로가수 최희준의 데뷔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가 공전의 히트를 하던 1960년대 초, 구 시장 모퉁이에서 소규모로 운영하던 반찬가게가 일본을 오가는 기름배에 반찬을 납품할 정도로 번창하여 간판을 달아야겠는데 마땅한 상호가 없어 찾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미료를 대주던 거래처 직원이 요즘 유행하는 ‘서비스’를 넣어 ‘써비스 상회’라고 하면 좋겠다고 해서 지어졌단다.
함께 일하는 젊은 아낙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큰딸 ‘혜자’(51)라고 해서 놀라웠다. “수줍음 잘 타고 착하기만 했던 여고생 혜자씨가 결혼도 하고, 아들도 둘이나 낳고, 가업을 이었네!”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50대로 접어든 혜자씨도 “처음엔 누군가 했는데 삼촌이시네요!”라며 따끈한 어묵 국물을 한 공기 내놓았다. 순간 아련한 추억들이 슬라이드 영상처럼 한 장면 한 장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엄마는 저의 ‘멘토’이자 미인이고, 여장부죠
착한 여고생이던 혜자씨의 하루를 조금 더 엿보고 싶었다. 해서 다음날에도 공설시장 ‘써비스 분식’을 찾았다. 여고 1학년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드리면서 요리기술을 익혔고, 결혼 후 가게를 물려받은 혜자씨. 그는 “김밥, 족발 등 모든 재료를 집에서 직접 만든다.”며 “가까이 사는 동생들이 김밥을 말아주거나 채소를 다듬어주는 등 일손을 보태주고, 건축 공사장 드라이비트(외벽공사) 기술자인 남편도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면서 활짝 웃었다.
“어머니 이쪽으로 앉으세요. 잔치국수랑 잡채랑 맛있게 만들어드릴게, 잡수고 가세요. 족발도 있어요.” 혜자씨는 대화 도중에도 나이 든 노인이나 젊은이들이 지나가면 맛있게 해드리겠으니 잡수고 가라고 권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그의 엄마였다. 그는 “단골손님은 10대 청소년에서 팔순 노인까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며 “개중에는 ‘오늘은 왜 어머니가 보이지 않느냐’고 묻거나 ‘어머니를 빼닮았다’며 음식을 주문하는 손님도 있다.”고 했다. “엄마가 장사하던 시절을 추억하며 안부를 묻는 손님도 있는데, 그때는 이상하게 슬퍼진다.”며 표정이 바뀌기도. 매콤하고 달달한 잡채가 생각나기에 한 그릇 주문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슴에 남는 상징적인 이미지랄까. 엄마를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나요?” “엄마는 저의 훌륭한 ‘멘토’이자 미인이고, 여장부죠. 몸이 부서져라, 일하면서 7남매를 잘 키워주신. 아들(남동생)만 대학에 다녔고, 딸 여섯은 고등학교만 졸업했죠. 그래도 원망스럽지 않아요. 시장에서 얌전하기로 소문난 엄마는 장사욕심도 많았어요. 트럭에 싣고 온 배추와 무를 아빠와 함께 온종일 나르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은 쉬실 나이인데도 손수 김치를 담가주고, 틈틈이 일하러 다니시거든요. 공영주차장 관리인으로 근무하는 아빠(76)보다 더 고생하는 것 같아서 항상 죄송스러워요.”
“엄마를 도와드릴 때나 함께 분식집 하면서 의견충돌은 없는지?” “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거의 함께 보내면서도 마찰이 없었어요. 엄마가 저를 돌봐주다시피 하니까 장사도 수월했죠.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나이 탓인지 가끔 짜증을 내십니다. 몸과 행동이 마음대로 안 따라주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이제 엄마도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요. 제가 엄마 뜻을 잘 받아들이고 지혜롭게 풀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늘 죄송스러워요.”
우리 엄마가 젤 좋아하는 노래는 <여자의 일생>입니다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겠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엄마가 젤 좋아하는 노래가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입니다. 슬픈 노래죠. 아마 죽도록 고생만 하셔서 그런 노래를 즐겨 부르신 것 같아요. 여고 1학년 때 겨울이었어요. 그날도 학교가 끝나고 가게에 나갔죠. 시장에 쳐놓은 천막들이 ‘윙~윙’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펄럭일 정도로 눈보라를 동반한 강풍이 불던 날이었죠. 가게에 도착하니까 엄마가 19공탄 화덕에 손을 쬐면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거예요. 눈물이 왈칵, 우는 얼굴을 엄마에게 보이기 싫어서 참느라 혼났어요. 천막 사이로 쏟아지는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장사하던 그때 엄마 모습은 죽도록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여고 때 내가 ‘착하고 예쁜 혜자씨’라고 놀리기도 했는데 기억하세요?” “(수줍은 표정으로) 네 기억합니다. 학교가 끝나면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마를 도와드리는 것을 담임선생님이 아시고 엄마에게 ‘장한 어머니’ 상(賞)을 주셨거든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운 어른이 타야 할 상을 젊은 엄마가 받으니까 이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께서 위로와 격려 차원에서 주신 것 같아요. 주위에서는 ‘장한 어머니에 효녀 학생’이라고 칭찬했지만, 저는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상장이 어머니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되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에요.”
“성장한 20대 아들 둘이 있다고 했죠, 훗날 며느리가 분식집을 물려받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남이 보기엔 하찮은 분식집이겠지요. 하지만 존경하는 할머니·할아버지 그리고 엄마·아빠가 여름엔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와 싸우면서 일궈낸 수확이자 귀중한 열매에요.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정신과 혼이 고스란히 담긴 가업을 잇겠다고 하면 훌륭한 생각이니 적극 밀어줘야죠.”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영업에 방해될 것 같아 따끈한 어묵 국물로 입가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줍음 잘 타는 가녀린 여고생에서 분식집 주인으로 변신한 혜자씨가 대견해 보였다. 중간에 분식집으로 업종을 바꾸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3대째 가업을 잇는 주인공이자 4대로 이어질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은 당찬 엄마로 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