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가을이구나! 했는데, 10월하고도 하순이다. 된서리가 천지를 뽀얗게 뒤덮는다는 상강(霜降)이 지난 지도 닷새. 찬이슬 머금은 국화꽃 향기가 그윽해지면서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진다. 겨울의 문턱 입동(立冬)을 열흘쯤 앞둔 요즘 농촌은 벼 수확하랴, 찬 서리 내리기 전에 고추 따랴, 깻잎 따랴, 고구마 캐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웃집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들이 족두리 차림의 새색시 입술처럼 앙증맞다. 물기 빠진 줄기에 위태롭게 매달린 누런 호박 세 덩이는 하잘 것 없는 농작물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제 수확한 나락을 도로에서 말리는 김씨 아저씨는 늦가을의 짧은 해가 밉기만 하다. 농민들은 연이은 태풍으로 여름 내내 가슴을 졸이며 보냈으나 수확의 기쁨이 있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끼는 자식에게는 돈이 아니라 책을 물려줘라'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 어느 개그맨은 “천 번 고생하면 몸이 마비된다는 뜻”이라고 풀이해서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가을은 책을 벗 삼는다는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 ‘독서의 계절’로도 불린다. 이때쯤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는 백일장 대회, 독후감 쓰기, 시 낭송 등 독서 관련 행사가 풍성하게 펼쳐지기도 한다.
유치원생 자녀를 둔 30대 엄마는 이해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그림동화책을 읽어주느라 시장에 갈 시간도 없다고 투덜댄다. 독서가 성장기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 어디 성장하는 아이들뿐이겠는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던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하루도 책을 읽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다.”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 서점에서 판매되는 도서는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란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서의 계절을 맞아 군산시 중앙로 1가에 있는 군일서점(대표 오인찬)을 찾았다. 인터넷 서적의 범람과 도심권 이동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반세기가 넘게 이어져 내려오는 군산의 대표적 토종서점이다. '아끼는 자식에게는 돈이 아니라 책을 물려줘라'라는 말이 있는데, 오인찬(53) 대표가 바로 그 사람. 군대를 제대하고 52년 전 부친이 창업한 서점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어서다.
오인찬 대표 부친(고 오형보)은 평남 진남포 출신으로 한국전쟁(1950)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10년 가까이 군에 복무하면서 강원도 춘천지구와 인제지구 전투의 전공으로 화랑무공훈장(54년)을 받은 국가 유공자다. 군일서점 창업 후에는 군산지역 군부대에 진중문고(陳中文庫), 군산대 해양대학 실습선 ‘해림호’에 선중문고(船中文庫)를 설치해서 지역 도서관 역할을 했다.
군일서점은 책을 팔아 얻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1980년부터 군산시를 비롯하여 군산대학교, 벽지학교, 교도소, 노인종합복지관, 구세군 군산 후생원, 개정보육원, 신광모자원 등에 2만 5000권이 넘는 교양도서와 영유아 도서를 기탁, 책을 통해 어려운 이웃과 사랑을 나누어 왔다.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소년소녀가장, 보호시설 원아, 무의탁 홀몸노인 등에게 장학금과 생활보조금을 지원해서 주위를 훈훈하게 하기도.
오인찬 대표가 추천하는 베스트셀러 세 권 맛보기
오인찬 대표는 “초등학교 시절 각종 도서가 수북하게 쌓인 서점 창고에 처박혀 책을 재미있게 읽던 시절이 새롭다”며 옛 추억을 떠올린다. “서점에서 쉴 사이 없이 일하시는 아버지를 도와드리다 보니 책방 주인이 되었다”며 허허롭게 웃는 오 대표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며 “나이를 먹다 보니 서점운영이 천직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말한다.
올가을에 꼭 읽어야 할 책 세 권만 추천해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오인찬 대표는 “군산 시민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책으로, 독서 습관을 기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지와 사랑>(일신 서적출판사),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군산시청 김중규 학예연구사의 <군산역사 이야기>(도서출판 안과 밖) 등 세 권을 추천도서로 지목했다.
세계명작 100선(選)에 든 <지와 사랑(Narziss und Goldmund)>
세계적인 문호 헤르만 헤세(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는 독일 출신으로 1930년 <지와 사랑>을 발표한다. 그 후 헤세의 대표작이 된 <지와 사랑>은 수도원장으로 냉철한 철학자인 나르치스와 애욕의 편력을 일삼는 예술가 골드문트의 대립과 갈등, 열망에 대한 소설로 두 사람의 우정 이야기는 나르치스의 손에 의해 전개되고 매듭지어지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중심은 골드문트에 있다.
<지와 사랑>은 서양 문명의 행방에 대한 회의와 동양 사상에 대한 접근 등을 작품에 용해시켜 ‘참다운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답한다. 또한, 정신과 영혼, 예술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헤르만 헤세의 섬세하고 투명한 필치가 작품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소설은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유감없이 나타난 걸작으로 김민영 교수가 옮겼다.
아름다운 신동 나르치스가 있는 수도원에 들어간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이미 이성과의 쾌락을 경험한 그는 수도원을 뛰쳐나와 방랑하면서 많은 여성과 애욕 편력을 계속하며 목조가가 된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자기가 추구하는 참다운 예술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참다운 예술은 성스러운 마음과 사랑이 융합되어야만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수도원장이 되어 있는 나르치스에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스무 살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쓴 김난도 교수는 서울대 법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USC)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97년부터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소비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우수강의’에 선정되고 ‘서울대학교 교육상’을 수상하는 등 강의와 학생 지도에 대한 열의를 인정받았다. 학생들은 ‘교수님’보다 ‘선생님’이란 호칭을 더 좋아하는 그에게 ‘란도샘’이라 부른단다.
김난도 교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지금,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청춘이여! 코앞의 1% 이익을 쫓는 트레이더가 아니라 자신의 열정에 가능성을 묻고 우직하게 기다리는 투자가, 열망하는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우둔한 답사자가 되라!”고 충고한다. 그는 “내가 만약 스무 살의 나에게 전화를 걸 수 있게 된다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빨리 성공하고 싶어 한다. 젊은 나이에 빨리 출세하는 것이 예로부터 최고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빨리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기 위해 자꾸만 시계를 본다. 하지만 시계보다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다. 삶의 성공이란 퍼즐의 마지막 피스를 채웠을 때 판가름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나아가 나침반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거울이다. ‘지금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를 수시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울보다 나침반을, 나침반보다 시계를 더 찾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146~147쪽에서)
김중규 학예연구사의 군산역사 이야기
<군산역사 이야기>는 인류가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선사시대부터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 혼돈의 해방정국을 거쳐 한국전쟁(1950)까지 장구한 역사 속에서 군산이 변화되는 과정을 옛 지도와 사진 등을 곁들여 흥미진진하게 풀어간다. 군산과 인연을 맺고 있다면 한 번쯤 필독해야 할 책으로 제1부 ‘땅 그리고 사람들’, 제2부 ‘사진 속의 멈춰진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과 숨겨진 야사들을 주제로 고대부터 물류유통의 중심도시 역할을 해온 군산의 정체성과 숨겨진 관광자원을 소개하고 있다. 제2부에는 개항(1899) 이후 군산지역을 촬영한 사진과 당시를 살아왔던 어른들 구술을 녹취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근대문화 도시 군산의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저자 김중규 학예연구사는 <군산역사 이야기>는 향토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군산의 옛 지도와 19세기 후반 이후 군산을 찍은 사진의 해석, 토박이 어른들의 녹취 등 세 가지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 ‘역사는 승자의 기록.’ 등 수많은 역사에 대한 정의를 접해왔음에도 자신에게 군산 역사는 “이 땅(군산)과 이 땅의 모습에 자신을 스스로 맞추며 살아온 일반 백성의 흔적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고 덧붙인다.
김 학예연구사는 “이 책을 통해 자연환경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역사라는 줄기 속에 유기적 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리고자 했다”며 “근대시대에 조성된 도시라고 인식된 군산이 고려 시대 이후 물류유통의 중심지이며 자주적 근대화의 현장이었음을 밝히고자 했다”고 부연한다. <군산역사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 역사서와 달리 독자가 쉽게 이해하도록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군산의 향토사 주인은 바로 시민이다!”고 강조하는 김중규 학예연구사는 군산을 12개 코스로 나눠 누구나 쉽게 각 지역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찾아볼 수 있도록 꾸민 <군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도서출판 나인)도 펴내 직장 동료는 물론 시민으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기자 역시 <군산역사 이야기>와 <군산답사·여행의 길잡이>를 읽으면서 군산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과 자라나는 아이들임을 깨닫게 되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