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방.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 로비 한편에 있는 빨간 주전자의 애칭이다. 별다방은 매일 아침 9시 무렵 문을 연다. 갓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가 주전자에 가득 담겨 나온다. 은은하면서도 진한 그 맛이 좋아 이른 아침부터 복지관을 찾는 이용자들도 많다. 이용자들의 아침은 별다방에서 시작된다. 함께 따뜻한 커피를 나누어 마시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모두가 친구요, 모두가 가족이다. 별다방의 빨간 주전자에 담긴 것은 단순한 커피가 아니다. 함께 나누는 온정이고, 관심이고, 배려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매일 아침 빨간 주전자에 온기를 담아내는 별다방의 바리스타는 누구일까?
능숙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내리는 한 사람.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의 장상원 관장이다. 장상원 관장의 하루는 커피를 내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관장실 한편에는 작은 사이즈의 가정용 로스팅 기계(원두 볶는 기계)와 커피 그라인더(원두 분쇄기), 드립 포트(핸드 드립에서 사용하는 주전자)등 커피 전문점 부럽지 않은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용자들과 직원들까지 챙기다 보니 준비하는 양도 적지 않다. “제가 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있겠지만 누구든지 우리 복지관에 오면 차 한잔 편하게 마실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요즘엔 이용자 분들이 먼저 커피를 찾아요. 조그마한 우리 집(복지관)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함께여서 더 아름다운
장상원 관장과 장애인의 인연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생이었던 그는 1학년을 마치고 군대 입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시간이 있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전북지역 가톨릭 복지기관에 전화를 해 보기 시작했어요. 그때 인연이 닿은 곳이 지정환 신부님이 운영하시던 무지개 가족이에요.” 무지개 가족은 장애인들이 재활을 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다. 도울 일이 있겠냐는 장상원 관장의 물음에 지정환 신부는 어서 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장상원 관장은 그 길로 무지개 가족으로 향했다. “당시 무지개 가족은 인가시설도 아니었어요.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죠. 무지개 가족에서 장애인들과 먹고 자고 함께 생활했어요. 장애인들과 가까워 질 수 있었죠.” 장상원 관장은 군에 입대하면서 무지개 가족을 떠났다. 하지만 장애인들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하나회에서 수화로 미사를 진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정환 신부가 시작한 하나회는 장애인과 일반인이 하나 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상원 관장은 지금까지도 하나회에서 미사를 진행하며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앞으로의 10년을 꿈꾸다
2009년 9월 장상원 관장은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에 취임했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은 지역의 장애인들에게 상담, 진단, 치료, 교육, 훈련 등의 종합적인 재활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2000년 7월부터 사회복지법인 전주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 위탁 받아 운영하고 있다. 장상원 관장이 취임한 이후인 2010년은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이 문을 연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장상원 관장은 그 동안 지속되어 온 치료, 재활 중심의 서비스에서 한 단계 나아갈 필요성을 느꼈다. “바우처 제도가 생기면서 장애인들이 사설 치료 기관으로 많이 이동했습니다. 사설 기관과 맞물려서 돌아가는 복지관일 필요가 있느냐, 복지관이 가야 할 길을 새롭게 디자인해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우처 제도는 국가가 보조금을 지원해 치료비 일부를 부담하는 제도다. 사설 치료 기관이 많아지고 바우처 제도를 통해 치료의 편의성이 높아지면서 복지관을 찾는 장애인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작년 9월부터 11월까지 외부 전문가를 모셔서 매주 목요일마다 40시간 10주 코스로 공부를 했어요. 우리 조직이 어떤 시스템을 갖추고 일을 해야 할지,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무엇인지,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작업이었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찾아가는 복지관’은 직원들과의 연구를 통해 태어난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의 새로운 지향점이다. 기존에 복지관을 찾아오던 이용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던 것에서 벗어나 직접 발로 뛰며 지역사회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영역을 넓혀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는 구조를 만들어 줘야 해요. 장애인들이 마을에서 소외되지 않고,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고, 누구든지 만날 수 있는 그런 구조를 단계별로 개선해 나가야 하는 거죠.” 장상원 관장은 이에 대한 문제점으로 장애인을 ‘분리’하는 시스템을 꼽았다. “장애인들을 다른 사람들과 떼어놓고 뭔가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장애인들끼리 뭔가를 할 수 있게 만들려던 구조에서 비장애인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구조로 넘어가야 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간격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는 지역사회와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들의 사회성과 공동체성을 기르고 나아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장애․비장애 청소년 통합캠프 ‘소나기(소중한 나와 너의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매해 여름 운영하는 소나기 캠프는 장애․비장애 청소년들이 1박 2일간 함께 하며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캠프에 참석한 청소년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 외에도 미술대회, 열린 강좌, 나들이 프로그램 등을 통해 지역사회와 함께 할 수 있는 폭을 넓히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립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는 청년기 전환 교육반, 직업 적응 훈련반을 운영하며 성인장애인의 취업을 지원하고 있다. 장상원 관장은 전문 인력 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작년과 올해 두 차례 진행된 ‘나는 바리스타다’는 바리스타를 양성하는 맞춤형 직업 훈련 프로그램이다.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 지원으로 산타로사와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일주일에 2번씩 총 12회 동안 바리스타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기술, 에스프레소 추출, 라떼, 카푸치노 만들기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장상원 관장은 직업교육에서 멈추지 않고 수료생들이 앞으로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장애를 넘어서 전문가를 키워낼 수 있는 가능성들을 보고 있어요. 연습을 강화시켜서 내년에는 창업까지 해 보려고 준비 중입니다.”
평범한 복지관
장상원 관장이 최종적으로 꿈꾸는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가장 부담 없는 평범한 복지관’ 이라고 말한다. “이 집(복지관)이 특별한 집이예요. 장애인복지관이라는 명칭부터 특별한 집이죠. 그래서 이렇게 하지말자, 이 용어를 쓰지 말자, 명칭을 바꾸자 했어요. 이를테면 더불어 드림센터 처럼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서 함께 꿈꾸면서 살아갈 수 있는 집. 누구나 쉽게 찾아와 함께 이야기하고 만날 수 있는 집. 장상원 관장이 바라는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의 모습이다.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평범한 복지관, 행복한 복지관이었으면 좋겠어요. 늘 여기에 오는 것이 좋고, 기쁘고, 여기에서 꿈을 키워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곳. 그렇게 더불어 살 수 있는 집이었으면 해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장상원 관장은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을 ‘우리 집’이라고 불렀다. 직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이용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 덧 복지관은 그의 집이 되어 있었다. 커피 한 잔에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고, 서로에게 기대어 인생의 한 때를 보내는 사람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은 그렇게 모두의 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의 사람들을 만나다
빨리 취업하고 싶어요!
조심스레 들어간 교실 안에서는 한창 병원용 거즈 포장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직업적응훈련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장애인들이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다. 봉투의 입구를 벌리는 사람, 거즈를 봉투에 넣는 사람, 봉투를 밀봉해 포장하는 사람, 완성된 제품을 상자에 담는 사람. 세분화 된 작업 과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떤 일을 하고 있냐는 질문에 여기, 저기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고 자부심이다. 그 때 한 교육생이 주사기와 비슷한 제품을 들고 다가온다. 이게 뭔가 한참 고민을 하고 있자니 다시 교육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기들 콧물 빼는 거예요. 이렇게.” 생소한 물건에 호기심 가득한 기자의 표정에 교육생의 얼굴 역시 발갛게 물든다. 교육생들에게 물었다. ‘앞으로 바라는 게 뭐예요?’ 대답은 질문이 무색할 만큼 같았다. “빨리 취업하고 싶어요!” 적게는 1, 2년 길게는 10년. 교육생들은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직업적응훈련을 받고 있다. 긴 기다림 속에서도 교육생들이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나보다 더 어렵고 약한 사람 보면서 마음이 깊어지지요.
밝은 웃음이 인상적인 진호철 님은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의 터줏대감이다. 개관하기 전부터 인연을 맺었으니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진호철 님은 뇌졸중으로 몸의 좌측이 불편해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지속적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이 병이 운동해서 좋아지는 건 표가 잘 안나요. 하지만 운동하지 않으면 바로 표가 나요. 몸이 굳는다던가 그렇게.” 벅찬 재활 과정 속에서도 위안이 되는 건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동지라고 해도 되나. 나랑 같은 사람들이 있고,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시설도 좋고 그러니까 계속 오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재활치료를 기다리는 대기자들이 많아요. 예전에는 신청하면 바로바로 받을 수 있었는데. 사람이 많으니 어쩔 수 없지요.”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의 모든 프로그램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이용자들은 프로그램을 다시 신청해야 한다. 신청 후에는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 복지관 인력은 10년 전과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원래 다 건강하게 크는 줄 알았어요. 여기 와서 보니까 아픈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두 발로 건강하게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이더라고요.” 진호철 님은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을 찾으며 오히려 자신이 더 깊어졌다고 말한다. 자신보다 많이 배운 사람, 연장자인 사람, 더 어렵고 약한 사람을 보면서 스스로를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장애인 비장애인 통합교육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서로를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게 많을 거예요.” 진호철 님은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에 대한 바람도 덧붙였다. “우리가 오면 할 수 있는 게 쉼터에 앉아서 이야기 하는 것 밖에 없어요. 취미생활이라던가 뭐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시설들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 분들이 우리를 존재하게 해요.
이용자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낯선 이들의 방문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세세하게 신경써주는 이가 있었다. 바로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 기획운영팀의 이나영 팀장이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의 개관 전부터 함께 해온 이나영 팀장은 지나가는 이용자들 마다 이름을 부르며 오늘의 안부를 물었다. 이나영 팀장은 장애인들과의 일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나영 팀장은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이 개관할 당시 상담업무를 진행하던 그녀는 한 청년을 만났다. 20대의 젊은 나이였던 청년은 손잡이 부분만 겨우 깎은 긴 나뭇가지와 보호자에 의지해 복지관을 찾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때문에 보호자 분들은 일을 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그 분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집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죠. 보호자 입장에선 우리 아이가 장애가 있어서 손가락질 받을까봐 밖에 나가는 걸 못하게 했어요.” 하지만 청년의 표정은 밝았다. 어렸을 적 이후 처음 나와 보는 바깥세상. 밖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무척이나 큰 기쁨이었다. 재활 치료가 시급했지만 청년이 복지관을 방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혼자서는 거동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복지관에 리프트가 설치된 차량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보호자는 매번 청년과 함께 복지관을 방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외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 하던 청년의 모습에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는 정기적으로 동행이 가능한 차량자원봉사자를 구했다.
“혼자서는 계단 오르는 것도 불가능 하고, 한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였어요. 하지만 본인이 하려는 욕구가 대단했어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지팡이를 잡고 혼자 걷기 시작하더니 한글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셨죠. 나중엔 야학까지 다니셨어요.” 청년과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의 인연은 거기서 끊겼다.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올 뿐이었다. “저희 법인에서 장애인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었어요. 전동 휠체어 한 대가 저를 향해 달려오더라고요. 부딪치는 거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분이었어요.” 야학을 마친 청년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자신과 같은 이들을 돕기 위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저희가 해 드린 건 아무것도 없어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죠. 그 분은 알고 계셨던 거예요. 저희가 그분의 모습을 보면 기뻐할 거라는 걸. 기쁘다는 단어로는 부족한 것 같아요. 그 분은 복지관과 그 곳에서 일하는 저희의 존재 이유를 알려주신 분이예요.”
인터뷰 말미, 이나영 팀장은 10년이 넘도록 장애인 복지 관련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모두 장애인 분들 덕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이 지금까지 늘 같은 자리에서 두 문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진심으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 있었다는 것을.
군산장애인종합복지관
전북 군산시 산북동 3612-4
(063)466-79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