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gun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홈 > ARTICLE > 사회
군산의 태권도, 아메리카에서 피어나다
글 : 오성렬(자유기고가) / poi3275@naver.com
2012.08.01 14:05:2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국기 태권도가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201개 회원국, 약 8천만 명의 동호인을 확보하고 있을 만큼 뿌리를 내려 올림픽은 물론 수많은 국제대회를 치르면서 종주국으로서의 국가적 위상을 드높이는데 커다란 기여를 해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오늘이 있기까지 낯선 이국땅에서 오로지 태권도 사랑 하나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입지를 굳힌 태권도 전도사들의 불굴의 의지는 저마다 한 편의 인간승리의 드라마로 회자되기도 한다.  지난 7월10일, 약 40여 명으로 구성된 캘리포니아 주 주니어대표팀을 이끌고 고향 군산을 찾은 전영인(全永仁/58)사범도 그 중 한사람이다. 

 

이제 그는 미국에서 Grand Master로 통한다.  현재 LA 근교에 거주하면서 캘리포니아 주 태권도협회장 직을 가지고 있기도 한 그는 한때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미국인 제자가 올림픽에서 두 차례나 금메달을 딴 전력도 있을 만큼 그 위상은 대단하다.  하지만 그는 태권도 못지않게 고국이나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도 남다르다.  72년도 군산고등학교를 졸업한 전영인은 인천에서 대학을 마친 뒤 해병대에 복무할 때에는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더 넓은 세계로 나가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 싶은 포부가 일어 80년도에 급거 미국으로의 이주를 결행한다.

 

막상 미국에 들어가긴 했으나 문화도 언어도 다른 낯선 이국땅에서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시급했다.  이주 첫해에는 건설 현장의 막노동 등 무슨 일거리든 찾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고생을 견딜 수 있었던 굳은 의지는 언젠가는 꼭 태권도로써 성공을 거두고 말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이후 어느 정도 이국 생활에 적응이 되자 보다 전문적인 업종을 해보고 싶어 페인트 공사 업을 시작, 약 9년여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차차 안정을 찾기에 이르며 그러다가 1990년도에 미국 대학대표팀 코치직 제의가 들어와 비로소 본인이 그토록 열망했던 태권도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또한 이듬해에는 LA근교 다이아몬드 바(Diamond Bar)시에 자신 소유의 도장도 개관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태권도 전도사로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데 이 도장은 이후 미국 청소년대표 및 국가대표 선수를 양성하면서 미국 내 제일 실력이 뛰어난 도장으로 인정받을 만큼 위상이 정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1997년도 및 2000년도 두 해에 걸쳐 미 올림픽위원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코치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으니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그는 미 대학대표팀 및 국가대표팀 헤드코치 직을 13년간 역임하면서 2000년도에는 한국인 이민 1세로는 처음으로 시드니올림픽 미국대표팀 감독이라는 중책을 맡음으로써 미국 이주 20년 만에 명실 공히 최고의 지도자 반열에 오르게 된다.  더구나 이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인 제자(스티븐 로페스)가 자신의 체급에서 종주국인 한국을 따돌리고 첫 금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하는가 하면 다음 대회인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함으로써 스티븐은 일약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이후 전영인은 2006년도 들어 캘리포니아 태권도협회를 창설, 현재까지 협회장 직을 맡기에 이른다.  사실 훨씬 이전인 1994년도부터 삼성전자가 후원하는 ‘삼성월드태권도페스티벌’이라는 국제대회가 창설되어 운영돼오고 있었고 중간에 LA오픈, ‘전영인 초청대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운영되다가 2008년도부터 미 태권도협회가 주관하고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인터내셔널태권도페스티벌’로 이름을 바꿔 선수 약 1,500명, 관중 및 임원 5,000여 명이 참석하는 대회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내셔널대회 다음으로 큰 규모의 대회이다.

 

현재 전영인의 도장엔 약 300여명의 수련생이 열심히 기량을 연마하고 있는데 물론 미국인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라틴계, 아시아계 등 국적도 다양한 편이다.  그는 앞으로 선수들만 전문으로 육성하는 대규모의 수련 센터를 설립하고자 현재 추진 중에 있다.  그가 이번에 주니어대표팀을 이끌고 군산을 방문하게 된 것은 7월 7일부터 11까지 닷새간 전북 무주에서 열린 ‘제6회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종주국에서 개최되는 이 대회는 24개국, 1,000여 명의 선수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주니어대표팀도 참가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합 일정이 없는 하루 시간을 내어 선수단을 인솔하고 고향 군산을 찾아 자신의 태권도 은사인 김혁종씨를 비롯하여, 관내 체육인들을 초청하여 시내 모처에서 식사도 함께하고 오후에는 동고(東高)로 이동, 군산의 학생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갖기도 했는데 태권도 관계자들과 더불어 문동신 군산시장도 참석하여 축사를 해주었고 사제 간에 감사패와 기념패를 전달하는 등 훈훈한 정을 나누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30년 동안 한국계 미국인들이 미 태권도협회를 창설, 이끌어 오다가 2003년도 들어 관계자들 사이의 알력과 내분으로 인하여 당시의 회장단이 퇴출되기에 이르고 따라서 협회 자체가 권위와 힘을 잃음으로써 이후 미 대표 팀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동메달 하나도 따지 못할 정도로 침체기를 겪게 되자 자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청소년대표나 국가대표 팀도 외국 시합에 출전하여 많은 경험을 쌓음으로써 실력과 전열을 재정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이번의 친선경기도 그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다.

 

 


 

또한 그는 앞으로도 국가대항전 뿐만 아니라 클럽이나 도장 중심의 팀 경기를 통하여 모든 선수에게 국제무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수련의 기회를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태권도의 경기 방식 등도 현실에 맞게 고치는 것도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 2006년도, 한국 실업태권도연맹이 창안하여 국내에서 선보인 5인조 단체전은 작년 세계태권도대회 때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어 널리 알려진 뒤 이제는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앞 다퉈 도입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데, 각 팀 5명의 선수가 한 조를 이뤄 처음에 상대팀과 1 : 1로 경기를 치르다가 상대 선수의 기량이나 체급, 몸 상태 등을 고려하여 감독이 선수를 수시로 바꾸는, 마치 프로레슬링의 태그매치와 유사한 기존에 없던 이 방식이 도입된 이후 태권도 경기는 재미없고 따분한 것이라는 인식이 불식됨으로써 감독의 작전 여하에 따라 승패가 좌우될 만큼 정교한 수 싸움이 주는 긴장감과 흥미진진함으로 인하여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에 그치지 않고 태권도의 저변 확대와 활성화를 위한 보다 창의적인 기법들이 더욱 개발되어 원조 한류답게 한층 즐겁고 박진감 넘치는 태권도로의 모색에 태권도인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한다.  그것만이 언젠가부터 태권도에 대한 매너리즘으로 답보 현상을 보이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새롭게 어필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향후 기회가 되면 미국 태권도협회장 직을 맡아 고국이자 종주국인 한국과 미국 태권도의 상호 교류 및 협조를 통하여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폭 넓게 태권도의 뿌리를 내린 미국에 다시 한 번 자랑스러운 우리의 태권도 문화가 부흥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고향인 전라북도와 군산시 태권도 발전에도 힘닿는 데까지 기여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인다.  또한 국내 태권도 대학에서 연간 1,000여 명의 사범이 배출되고 있는 한국의 도장 현실은 이미 과포화 상태여서 운신의 폭이 좁은 만큼 졸업생들이 활동의 폭이 넓은 미국 땅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자 구상 중이라는데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에서 든든함과 함께 남다른 애향심이 엿보인다.  그는 부인 조미희 씨와의 사이에 2녀1남을 두고 있는데 도장의 운영이나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돕는 매니저 역의 따님도 있다.  이렇듯 태권도에 관한 한 커다란 위치와 성공을 거둔 듯이 보이는 그지만 정작 개인적으로 경제적 상황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자신의 포부와 목표는 오로지 우리의 태권도가 전 세계에 널리 전파되는 것이며 이를 통한 개인적 잇속 추구는 가능치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관심도 소질도 없어서 그렇다 한다. 

      

 

 

군산 태권도의 뿌리 김혁종(金赫鐘)

이렇듯 미국 태권도계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있는 전영인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은사가 있다.  바로 김혁종(70)씨다.  김혁종씨는 전영인 사범의 고등학교 11년 대선배이기도 한데 젊은 시절 장미동에 호남체육관을 열어 당시 태동 초기였던 태권도를 통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 낸 태권도계의 대부이기도 하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의 전영인을 체육관의 청소도 도맡아 할 만큼 성실하고 착한 제자로 기억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19회째 이어가고 있는 ‘인터내셔널태권도페스티벌’도 후에 ‘김혁종컵 대회’로 명명할 만큼 전영인은 그의 옛 사범을 일생의 은사로 예우하고 있다.  그래서 이 대회가 열릴 때면 제자의 초청을 받아 여러 차례 태평양을 건너 행사를 참관한 적도 있으며 그 때마다 전영인은 수많은 미국인 제자들을 세워놓고 자신의 위대한 은사(Grand Master)라 소개하고 정중한 예를 갖추게 하고 있다.  김혁종 씨는 젊은 시절 호남체육관 뿐만 아니라 군산의 미공군비행장에서 약 8년간 미군들을 지도한 경력도 있는데 그 제자들만 해도 어림잡아 천여 명은 될 것이라 하며 옛 제자인 전영인이 미국에서 태권도를 통하여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위상을 드높이는 것을 보면서 감회가 새롭고 큰 성취감과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처럼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김혁종씨는 지금은 장미동 소재 주)동아 One(옛 호남제분)의 관재(管財)이사로 재직 중이며 전북야구협회 전무이사와 군산시체육회 이사직도 역임할 정도로 체육계의 원로로 위치를 굳히고 있다.  

오성렬(자유기고가)님 기사 더보기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댓글 목록
댓글 등록

등록


카피라이터

주소 : (우)54020 전북 군산시 절골3길 16-2 , 출판신고번호 : 제2023-000018호

제작 : 문화공감 사람과 길(휴먼앤로드) 063-445-4700, 인쇄 : (유)정민애드컴 063-253-4207, E-mail : newgunsanews@naver.com

Copyright 2020. MAGAZINE GUNSAN. All Right Reserved.

LOGIN
ID저장

아직 매거진군산 회원이 아니세요?

회원가입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아이디/비밀번호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