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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군산시 명장 전기권 회장 ‘44년 창호 외길’, 장인정신 계승
글 : 최승호 / gsport11@naver.com
2025.10.16 12:14:0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주)중일 전기권 회장

 

군산시는 지난 911‘2025년 군산시 명장으로 선정된 중일 전기권 회장에게 명장 인증서와 인증패를 전달했다.

군산시 명장심의위원회(위원장:부시장)은 지난 8월 서류 및 현장 심사로 자격을 검증하고 최종 후보자에 대한 심의·의결을 거쳐 전기권 명장을 선정했다.

시는 2021년부터 한 분야에서 오랜 기간 산업현장에서 종사한 숙련 기술자의 사기 진작과 자긍심 고취를 위해 군산시 명장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 명장으로 선정된 중일 전기권 회장은 군산시에서 44년간 창호 제작과 시공 분야에 종사해오면서 12건의 특허 등록, 11건의 전시회 출품 및 기타 우수 발명품 개발 등 최고의 기술을 가진 전문가로 우수한 기술력과 끊임없는 연구개발을 통해 업계를 선도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임준 군산시장은 수여식에서 해당 분야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한 길을 걸어온 전기권 명장의 열정과 노고에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며 축하하고 격려했다. 이어 지역 산업 발전은 현장에서 기술을 갈고 닦아온 기술자들의 땀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명장제도를 통해 지역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명장심의위원회 한 전문위원 역시 전기권 명장의 기술이 관내 최상의 수준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세기 가까이 창호 외길을 개척하며 지역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장인정신 계승에 앞장서 온 전기권 명장의 인생을 만나본다.

 

 

 

 

지독한 배고픔의 설움을 견디며

 

진안이 고향이다. 54년생이고.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그 시절엔 대부분 다 그랬다. 특히 배고픔의 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궁핍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나는 또래들보다 훨씬 밥양이 컸다. 그래서 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15살 청소년 전기권은 드디어 고향 진안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서울 고모네 집에서 운영한, 공장이라고 할 정도도 아닌 소규모 작업장에서 함석 일을 배워갔다. 지금의 삼선동에서 그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우리나라는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첫 일을 시작한 후 2년 뒤 봉급 4천 원을 받았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명절 때 고향에 가는 기대와 설렘으로 참고 또 참고 끝까지 버티며 서울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 봉급을 모아 모아서 고향 부모님께 드렸다.

 

군 입대와 의병제대

철공소로 직장을 옮겼다. 지붕 개량일에 손을 댔다. 당시 새마을운동에 힘입어 작업 물량은 많았다. 일당 1,300~1,500원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몸과 마음이 아팠던 시절, 그는 군에 입대한다. 머리가 너무 아파 쓰러져 정신을 잃고 6일 만에 깨어났다. 뇌수막염 진단이 내려졌고 4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도 완치되어 6사단에 배치되었다.

 

군 생활 역시 춥고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자대 생활하면서 선임자들 역시 그의 편은 아니었다. 결국 의병제대를 한다. “그땐 많이 힘들었는데 예비군훈련이 면제되고 민방위훈련만 받게 되었다. 이후 사업에는 오히려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인생사 새옹지마를 새삼 느꼈다.”

 

24, 군산에서 중일(重一) 창업

 

제대 후 바로 고향에 가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충북 괴산에 3년 정도 정착했다. 돈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19살 청춘이었다. “배고픔 없이 (잠시 울컥했다.)배만 부르면 못 할 것이 없었다.” 이후 큰 도시인 대전으로 옮겨 비로소 평생의 업이 된 창호 일을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성공에 대한 목표가 생겼다.

 

모진 객지 생활을 정리하고 24살 그는 군산으로 발길을 향했다. 지금의 그의 분신이자 역사가 된 중일(重一)’을 창업했다. 27살에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에도 골인했다. 성공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따뜻한 보금자리도 만들었다. 회사 이름의 뜻을 물어보니 중일, 무거울 중자와 한일자곰곰이 생각하면 답이 나올 것이라 답한다.

 

LG샷시 대리점을 운영했다. 정확한 판단이었고 선택이었다. 처음으로 선보인 하이샤시는 창호로서 제대로 인식되지 않아 깨지고, 뒤틀리고, 약하다등 일반인들의 인식 외에 경쟁사인 알루미늄 업체의 유언비어 등으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계속 홍보한 결과 나중에는 잘돼 하루에도 꽤 많은 계약을 성공시켰다. 다른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이겨나가며 사업을 키워나갔다.

 

제법 자금을 모았다. (나중에 사업을 확장할 계획으로) 부동산을 조금씩 매입했다. “그때 서울 쪽에 땅을 사놨으면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산은 땅값이 많이 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투기목적이 아니었기에 만족한다.(허허)” 큰 웃음소리에 묻어 나오는 그의 인생의 한 대목이 그려질 듯하다.

 

탄탄대로는 거기까지였다. LG에서는 총판 하나를 더 개설하여 시장은 이원화가 되었고 우리 업체에서는 타 브랜드사인 한화, 금강, 제철 회사 제품 외에 같은 LG회사와도 경쟁해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결국 화가 나서 대리점을 자진 반납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제자리에 그냥 서 있을 수만은 결코 없었다. 그의 인생에 포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일의 성장과 부흥!

 

현재 성산면에 있는 회사는 익산 춘포와 군산 선재리에 공장터를 잡았으나 적절하지 않아 1997년도 지금 부지에 전시효과와 교통 접근성을 고려해서 결정했다. 다른 쪽으로 눈을 팔 겨를도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다.

 

그의 부지런함과 절실함,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사업 규모가 커지고 분야도 점차 다양하게 넓혀가면서 직원들도 늘었다. 그 무렵이었다. 정부에서는 에너지절감의 일환으로 창호 에너지 등급제를 실시했다.

 

대기업에서는 브랜드 광고 위주로 창호 사업을 하던 시기였고 누구보다 창호에 취약성을 절감한 나는 특허를 출원하고 제품을 개발하고 에너지 시험성적서를 받는 등 창호 개발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창을 많이 개발했다.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각종 인증서, 특허 관련한 다양한 액자들이 중일의 역사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지난 나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돌이켜 생각해보면 건설업이 부도 발생률이 높아 부실채권이 많다는 경험으로 인하여 자연스레 사람과 일을 대하는 자세가 신중해지고 보수적이 되었다. 그런 태도와 실천이 실패하지 않고 나름 성공한 이유가 됐던 것 같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구개발에 집중했다. 관련해서 총 5회 지원받아 개발했다. 특허 분쟁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 킨텍스 전시장에서 일어난 일인데, 손님 중 한 사람이 중일에서 출품한 제품이 특허 침해했다고 주장했으나 확인 결과 중일에서 먼저 출원한 것으로 판명이 되어 명예 회복과 최강 기술력 인정, 둘 다 잡은 셈이 됐다.” (특허받을 때는 침해와 방어를 고려해야 한다.)

 

특히 2012년 중소기업청에서 주관하는 기술개발사업에서는 슬라이딩 단창(미서기)을 개발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소에 시험 의뢰하여 창세트 에너지 1등급 성적서를 발급 받았다. 당시 연구소에서는 슬라이딩 단창으로 1등급은 믿을 수 없어 하며 시험체를 해체하여 도면과 시험체를 확인하고 성적서를 발급했다.

 

현재 중일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큰아들, 작은아들, 사위가 총결집했다. 창호 (설계)제작과 시공 등 각각 한 분야씩을 담당하고 있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탄탄한 직업을 가지고 잘나가는 자녀들을 아버지가 하나둘 불러들였다.

 

자녀들 모두 회사 근무, 도전과 성취에 경의

 

특히 큰아들에게 조언과 쓴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다. 대표자, 경영자로서 신중한 행동과 결정을 강조한다. 대표로서 결정을 존중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과정이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화합을 강조한다. 가족들이 잘해나가고 있어 고맙고 자랑스럽다.” 전 명장은 유달리 화합의 가치와 의미를 말했다. 가족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호흡과 단합력으로 중일을 키워나가고 모습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보고 있다.

 

군산의 명물 중의 하나인 월명산 수시탑 밑자락에 있는 오래된 시민들의 휴게 공간이 있다. 그곳에 군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월명산전망대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 건설사업에 중일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전문 분야인 1년 이상의 창호 설계에 참여하고 있다. 군산의 상징적인 건물의 하나가 될 전망대에 설치할 중일의 창호 제품의 멋진 디자인과 기능을 언제든지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인터넷 바둑을 즐기는 전 명장은 다른 여가생활이나 운동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 쁘게 살아왔다. 바둑이 유일한 취미이자, 운동인 것 같다.” 그의 표정과 웃음소리엔 70년 인생을 살아오며 자신만이 느끼고 부딪히며, 울고 웃었던 삶의 조각이 엿보이고 묻어있는 것 같다. 그리고 굳게 버텨온 인생을 오롯이 담고 있다. 전기권 명장의 도전과 성취에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독자와 함께 경의와 박수를 보내드린다.

 

군산시는 올해의 명장으로 선정된 전기권 명장을 위해 시 홈페이지 명장 코너 등재

각종 매체 홍보 명장 특강 프로그램 운영 등을 진행하며 해당 직종에 관심 있는 일반 시민들과 관련 직종의 종사자들에게 명장의 숙련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할 계획이다.

() 重 一

대표이사 전 현 석

|본사| 전북 군산시 성산면 만동2170

063-453-9206

|지사|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58-49

031-235-9207

|홈페이지| http://중일.cr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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