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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구의 독서칼럼: 책과 사람 그리고 세상 이야기 안희경. 「인간 차별: 그러나 고유한 삶들의 행성」. 김영사, 2025.
글 : 공종구 / kong@kunsan.ac.kr
2025.10.02 11:14:4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그러나 고유한 삶들의 행성


   나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근대소설을 전공한 인문학자이다. 40여 년을 인문학자로서 살아온 나는 인문주의자의 정체성을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인문주의의 핵심 고갱이는 무엇일까? 비판과 저항의 정신, 그리고 타자의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인문정신의 핵심 고갱이를 이 세 가지로 압축하면서, 나는 과연 이 세 가지의 인문정신에 얼마나 투철한 삶을 지향하고 실천해왔는가? 자문해본다. 이 세 가지 정신 가운데 비판과 저항의 정신, 특히 저항의 정신에 맞닥뜨리면 나는 그냥 부끄러워지기만 할 뿐이다. 생래적으로 소심한 자유주의자의 정체성을 가진 나는 집단 행동이나 집단주의 정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방어막을 내세워 사회의 부조리나 폭력에 용기 있게 맞서야만 되는 상황에서 그에 합당한 행동이나 발언을 해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항의 정신에 관한 한, 기껏 그리고 고작해야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하면서 종당에는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는 일만 반복해온 나는 모래와 바람과 먼지와 풀만큼 작은 존재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항상 뒷전에서 때늦은 분노나 불만을 토로하거나 야유나 냉소로 일관하는 냉소주의자의 삶을 살아왔던 나는 그래도 타자의 상상력에 관한 한 인문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타자의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타자들 특히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의 어려운 처지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는 감수성이나 태도이다. 사실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일은 그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다. 저마다 하나의 독자적인 우주를 지닌 개인들은 모두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게 우리의 윤리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 또한 바로 그 윤리 때문이다. 나는 영원히 타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설가로서 끝내 실패할지 모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로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세계????, 2007년 여름호)라는 김연수의 진술은 경청할 만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타자의 상상력의 또 다른 측면은 타자의 슬픔이나 아픔을 기꺼이 자기화하려는 공감의 감수성’, 그리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다. 갈수록 한국 사회는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자도생의 정글로 변해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사회의 변화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내 코가 석자라는 생각과 가해자 의식보다는 피해자 의식에 더 민감한 구성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와 연동되어 악풀이나 악성 댓글에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혐오와 차별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면서 그들을 자신들의 분노나 공격적인 감정의 배출구로 투사하는 구성원들 또한 늘어나고 있다. 아울러 알고리즘 편향이나 확증 편향 오류 또는 가짜 뉴스로 인한 공론장의 왜곡이나 오염으로 인해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 종언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 공통감각’(common sense)의 지반은 약화되고 있다. 안희경의 ????인간 차별: 그러나 고유한 삶들의 행성????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인간 차별이라는 제목에서부터 그 문제의식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 책에서 차별은 키워드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안희경은 200231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백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중의 소수자 정체성을 겪으면서 다양한 차별과 혐오를 경험한다. 주변부적 타자로서 곱다시 겪어야만 했던 그러한 실존의 주름과 그늘은 혐오와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벼리게 만들었고 결국 이러한 책의 출판으로 결실을 맺게 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만나 많은 이주민들, 특히 이주 결혼 여성들이 겪었던, 아니 겪어야만 했던 온갖 차별과 배제의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을 압축요약하고 있는 머리말에서 그는 그들 삶의 이야기로 차별의 겹을 실타래 풀 듯 헤쳐 보이고자 에세이라는 장르를 택했다. 독자인 당신의 마음 속에 있을 초라함의 기억, 이방인의 시간과 연결되고자 내 이야기까지 길어 서술했다면서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일지라도 당신의 공간이 안녕하도록 통념을 변화시키고자 몰입한 작업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심결에 나도 그렇지!’라는 탄성이 새어 나오는 순간으로 통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우리는 모두 다름을 안고 살아간다’(9)는 진술로 마무리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복잡한 추론을 싫어하며 단순하면서도 극단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일반화의 오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주화의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것도 뇌의 그러한 속성 때문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대상이 지닌 독자적인 개별성을 하나하나 따지지 않고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판단하는 것이 유전자의 핵심 동인인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정이 그러하다고 해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정당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 말고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젊음도 건강도 모두 한때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체의 노화나 각종 질병과 사고 등으로 인해 크고 작은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전혀 예기치 않은 그리고 결코 원치 않은 각종 재해나 사건 또는 전쟁으로 인해 난민이 되기도 한다. 또한 학력이나 사회경제적 지위, 젠더나 외모, 국적이나 인종, 나이나 장애, 성적인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 등의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되어 온갖 차별이나 혐오 또는 배제나 폭력의 대상으로 타자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그러한 타자화의 표지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표지는 관계적이고 상대적이며 따라서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어느날 갑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을의 위치로 전락하여 차별과 혐오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누구나 다름을 안고 살아간다. 그 다름이 초라함의 길목이 되지 않도록 마음으로 연결되는 관계가 두루 스며들길..,그래서 우리의 다름이 결코 위험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129)“우리는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느닷없이 들이치는 차별에 예민해지고 난처한 사람을 보살펴야 한다. 누군가의 난처함에는 내가 겪을 곤란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외면은 나의 어느 날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재난이 끊이지 않는 시대, 편 가르기 본성을 방치하기엔 우리의 안전이 위태롭다. 누구나의 안전 속에 나의 안전이 있고, 개인의 삶이 모인 합이 오늘의 세계다.”(180-181)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다. 그러한 이치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이웃과 긴밀하게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웃이 안전해야 나도 안전하고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법이다. 2000년에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마지막 처연한 장면(비행기 사고로 무인도로 표류해온 주인공은 비행기 화물이었던 배구공에 얼굴을 그린 후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이후 유일한 절친으로 생활하던 중 함께 뗏목을 타고 가다 바다에 빠져 멀어져가는 윌슨을 목놓아 부르던 처연한 장면, 전치형, ????한겨레????, 2024.5.31. 참조)이 극명하게 압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외딴 섬에서 홀로 외로이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더불어 비인간 생명체를 포함한 타자들과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관계적 존재이다.

쥐도 막다른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되면 이판사판 고양이를 무는 법. 현재 우리 사회의 권력 위계와 서열의 사다리에서 맨 아래에 위치한 이주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혐오와 차별의 대상으로 타자화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 연장선에서 최근 유럽 사회에서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이주민들의 테러나 폭동을 강 건너 불 보듯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세 혈관이 건강하지 않고서 대동맥이 결코 건강할 수는 없는 법. 모세혈관의 건강을 방치한 이후 대동맥의 건강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까? 불거진 사건 속에서 일상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애쓰지만, 그보다 더 균일하게 일상을 버텨내는 바탕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질 속에서 사고는 사건으로 견딜 만해지고, 사건은 세상살이 속 그러려니 하는 일상으로 잠잠해지기 때문이다.....우리 사회도 이제 관계를 보살피는 행정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산다”(209-212)는 저자의 당부로 이 글을 매조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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