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삶을 지키려는 애향심, 미화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책임감, 시민들을 위한 희생정신,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도우려는 ‘측은지심’, 이런 마음이 있어야 시민들의 삶을 지켜나갈 수 있지요.”
시민들이 잠들어 있을 때 소리 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
어둠이 깨지 않았을 때 일어나 시민들의 고단한 삶을 지켜줘 온 ‘소리 없는 헌신’은 바로 그들의 몫이었다.
바로 (주)서해환경의 직원들이다.
21년 전 막둥이 사원으로 들어왔던 이희정 직원, 이제는 회사 노동조합의 위원장으로 성장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라는 말처럼 이 위원장은 모두가 인정하는 희생과 봉사의 아이콘이다.
그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리더십은 숱한 파고를 넘으면서 지금의 자리를 지켜 온 (주)서해환경의 성장 과정을 닮았다.
스스로를 낮추어 주변을 빛나게 하는 이 위원장의 과묵한 언행은 회사와 함께 동반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새벽을 지키는 사람들
벌써 수 십 년째 새벽마다 군산시내 골목골목을 쓸고 닦는 ‘보이지 않는 일꾼’들이 있다.
누구네 집 대문 앞은 물론이고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 시내 가게 앞과 건물 주차장 가릴 것 없이 관리 해주는 서해환경 직원들이 그 주인공이다.
환경미화원으로 불리기도 했던 직원들도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군산시로 부터 청소 용역을 위탁받은 이후 90년대에 150여명 정도였던 직원도 약 20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만큼 일이 많아진 탓이다.
요즈음의 서해환경은 기다려도 순서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취업 인기 직종이다. 그 때문일까. 직원들 또한 예년에 비하여 한층 젊어졌다.
“예전엔 나이든 분들이 다수였으나 요즈음은 30대~40대가 절반 이상이거든요. 젊은 층이 대거 입사하는 바람에 회사에는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고요. 직무에 대한 자긍심이 아주 좋다고 봐요. 투철한 직업의식이 없으면 헤쳐 나가기 힘들지 않겠어요?”
청소원에 대한 선입견이 없어지고, 복지는 물론 근로 조건과 여러 가지 복리후생이 좋아지면서 지원 희망자가 크게 늘어났다. 취업문이 좁아진 만큼 직업관이 뚜렷한 직원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군산시민들의 손과 발이 되어 온 (주)서해환경의 직원들. 그들이 청소 위탁 관리업체라는 한계에서 스스로를 갈고 닦으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진심으로 다가 서려는 회사의 오랜 경험과 직원들의 직업 정신. 그리고 박성윤 대표와 한 뜻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희정 노조위원장의 ‘새벽을 지키려는 마음’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21년 전 입사한 막둥이 사원, 제9대 노조위원장이 되다
지난 2024년 12월 제9대 노동조합 위원장에 오른 이희정 직원. 그는 2004년 7월, 약관 스물일곱에 입사했던 막둥이가 입사 21년 만에 노조 위원장에 올랐다. 모두가 내일처럼 축하해 주었다.
“아버지가 공직자이셨는데, 서해환경과 인연을 맺도록 해주셨어요. 2004년도인데 제가 스물일곱 되던 해였지요. 약 150여명의 직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막둥이였죠. 당시 기동반이라고 해서 청소 구역에서 벗어나 있는 외곽 지역, 혹은 민원 현장에 나가 뒤처리를 하는 게 업무였어요.”
막둥이 사원이었으나 정말 열심히 일했다. 6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기동반에서 일하다가 소독차로 이동했다.
시내권의 쓰레기 처리량이 워낙 많다보니 몇 군데에 ‘적환장’을 두고 현장에서 분리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소독하여 위생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그리고 요양원 등 위생 취약지역 관리도 맡았다.
2006년부터는 음식물 처리 차량에 동승해서 일을 했다. 입사 6년~7년 정도가 지나서 기사로 올라갔다.
소리 없이 일하는 가장 모범적인 직원, 그게 바로 이희정이었다.
(주)서해환경은 일반 회사하고는 성격이 다르다.
시민들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기에 조용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가 위원장으로서 적임자임은 말할 것도 없다.
(주)서해환경 노조위원장 최초로 정부 포상 받아
청소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기에 시민들은 깨끗한 환경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소란스럽지 않게 청소 업무를 해야 하지만 ‘내가 희생해야 시민들이 편안해진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런 의지와 신념이 없다면 아마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겁니다. 억지로 일 할 수는 없잖아요.”
2천년 초까지 생활쓰레기와 함께 음식물 처리도 했다. 당시에는 음식물이 분리 배출되지 않아서 수거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일반 쓰레기에 음식물이 섞이면서 썩는 것은 물론 악취가 말할 수 없었다.
이 위원장은 그런 과정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만큼 시민들에 대한 봉사와 회사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다.
(주)서해환경 노조 위원장은 9대에 걸쳐 이어져왔다. 임기가 3년씩이니 오랜 세월이 지났다.지난 2024년 박성윤 대표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회사로써는 영광이었다. 이희정 위원장은 노조위원장으로써 최초로 지난 5월 고용노동부 장관상을 받았다.
“자체 신협을 만들어 조합원들이 1만원~15만원까지 출자를 하도록 했어요. 모아진 기금으로 회사 직원에게 시중은행 보다 싸게 대출을 해주고 이익금이 발생하면 출자 배당도 하거든요. 나름의 복리증진 사업인데 이런 활동이 어필했다고 봅니다.”
노조위원장의 정부 포상은 개인으로써는 영광이자, 회사로써도 대표의 포상에 이은 겹경사.
“저희 회사는 군산시가 사용자이고 위탁된 업무를 대행해주는 업무를 합니다. 때문에 노동조합과 회사는 융화를 잘 하고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시민들을 위한 무한 봉사가 우선이고요.”
마흔아홉의 이희정 노조위원장은 정년까지 12년이 남았다.
입사 21년 만에 노조위원장을 맡았으니, 앞으로의 역할이 더욱 기대된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일
시민들이 잠들어 있을 때 조용히 일을 하는 게 서해환경 직원들이다.
90년대 중반 시·군 통합 과정을 겪으면서 일부 골목 청소가 시범사업으로 갈라져 나갔다. 시민들이 잠잘 때 일을 마쳐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일관성이 있어야 했다.
그 당시 다른 도시에서도 유행처럼 경쟁 체제를 도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골목마다 쓰레기가 넘쳐났고 주변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고 시민들의 불편을 해소해 온 건 바로 (주)서해환경의 직원들이었다.
잠깐의 혼란기를 마무리 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그들의 힘이 컸다. 군산시의 신뢰와 시민들의 지지도 더욱 커졌다.
요즈음 주택가 혹은 시내를 지나다 보면 젊은 미화원들이 수거 차량 앞뒤로 뛰어 다니며 쓰레기봉투와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도로가 붐비면 혼잡해 지기 때문에 관할 구역을 다 돌 수가 없어요. 숨이 턱에 차고 땀으로 범벅이 되기도 하죠. 물론 힘들지만 시민들이 불편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뛰어다니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스스로의 인생에서 새벽잠을 반납한 건 어쩌면 그들의 숙명이다.
군산시민들의 만족감은 서해환경 직원들의 이런 희생정신과 직업의식이 가져다 준 결과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쉬운 길이었을까.
깨끗한 거리를 만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새벽마다 현장을 돌며 아쉬웠던 곳을 체크하고 조용히 정리할 수 있도록 하는 박성윤 대표의 섬세한 관리.
여기에 막둥이 직원에서부터 한 발 한 발 성장하여 오늘의 노조 위원장에 오른 이희정 위원장의 조용한 리더십이 어우러졌기에 가능했다.
오늘날의 깨끗한 거리는 시민들의 관심과 서해환경 직원들의 헌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옥구중학교에 다닐 때 육상 선수를 꿈꾸기도 했어요. 약 2년 정도를 ‘죽기 살기’로 달리고 또 달렸죠. 실력이 부족해서 약간 실망도 했으나 어느 순간 맏이로서의 책임감이 더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77년 임피면 보석리 448-2에서 태어난 그는 술산초, 옥구중을 거쳐 군산동고를 나왔다.
동고를 졸업할 때쯤 전자과를 졸업하면 취업이 잘된다고 했다. 얼른 졸업해서 가계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당시 군장전문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군 입대, 그 과정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버지는 평생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임피에서 식당을 했다.
“어머니가 임피에서 중앙식당을 했는데, 가까운 지인이 중매를 섰어요. 군대 제대할 무렵인데 어청도가 고향인 지금의 아내(이재숙씨)를 만났죠. 마음에 들었으나 제가 성격탓에 별로 내색하지는 않았어요. 인연이 된 걸 보니 이심전심 마음이 통했나보죠”
서글서글한 눈매가 매력적인 이 위원장은 그녀를 만나 2002년 월드컵의 해에 백년가약을 맺었다. 지금도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 금슬 좋은 부부로 소문나 있다. 귀하고 귀한 딸만 둘을 두었다.
이희정 위원장은 3형제 중 맏이로 어릴 때부터 집안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장항 한솔CNS의 협력업체 풍성실업에서 물류 배차 업무를 봤다. 이후 세아베스틸의 전신인 기아특수강에서도 일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서해환경 막내로 입사한 것이다.
딱딱하지만 거를 수 없는 ‘새벽 조회’
서해환경 전 직원들은 기본을 지키는 데 익숙하다. 그 것은 이희정 위원장은 물론이고 평생을 회사에 헌신해 온 박성윤 대표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모아 성실하게 주변 정리를 해 나가는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면 모든 구호는 공명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본의 시작점은 바로 ‘새벽 조회’이다.
매일 ‘조회’를 하는 (주)서해환경, 마치 군대 용어 같지만 많은 인력이 현장에 투입되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이 과정을 빼먹을 수는 없다.
그 날 그 날 현장에 투입되는 직원들을 파악하고 아픈 직원은 없는지, 결원은 누구로 대체할 것인지 확인하고 업무에 투입하는 중요 과정이다.
딱딱하지만 거를 수 없는 ‘새벽 조회’는 이 회사의 생명 줄과 같다.
그 시간에 맞추려고 직원들이 집을 나서는 시간은 대부분 새벽 5시 이전이다. 씻고 아침을 가볍게 먹는다 하여도 적어도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늦어도 5시30분 안에 공항로의 노종조합 휴게소 강당에서의 전 직원 조회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는 업무의 특성상 내조하는 아내의 역할이 크다.
“차량마다 기사 1명에 작업 2명으로 구성되는 데, 현장 투입하기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거든요. 민원사항, 유의 사항 등등을 전달하기도 하죠. 하루 일과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 바로 ‘새벽 조회’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죠.”
길거리 작업이 대부분이라서 어느 정도 긴장감을 주어야 했다. 직원들이 안전하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과정은 필수.
롱런의 지름길 ‘초심’을 잃지 않는 것
(주)서해환경이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직업군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워라벨이 별거인가요. 직장이 안정되고 일한만큼 월급을 받고, 복리후생이 잘되고, 취미 활동이 보장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가면 그만이지요.”
회사는 직원들을 위하여 오식도와 월명동 도심에 ‘근로자 쉼터’를 만들었다.
예전의 ‘적환장’ 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근로자 대기실도 그대로이다. 미성동의 본사 건물 외부, 미룡동 군산대 뒷편 원당마을, 경장동 교육문화회관 옆 등 3군데에 만들어 놓았다.
손수레를 끌고 골목골목 청소를 나가는 직원들의 경우 이 현장으로 출근하도록 했다.
우수사원을 뽑아 국내여행은 물론 해외여행도 내보내고 있다. 회사 안에 여러 봉사 단체가 만들어졌다. 직원들은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우리가 이 일(청소원)을 하면서 나중에 느끼는 점이 무엇일까’라고 질문하거든요. ‘내가 있음으로써 군산시가 이렇게 깨끗해졌다.’라고 하는 자긍심이 생기더라고요. 신입일 때는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스스로 ‘천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차량과 함께 2명의 직원이 뛰면서 도심 주변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걸 보는 게 낯선 일이 아니다.
그 대 그 때 분리해서 압롤 박스에 넣거나 재활용품으로 분리하기도 한다.
직원들이 뛰면서 일 하는 건 혹시라도 도심에서 청소 차량으로 인해 교통 흐름이 방해가 될까봐서이다.
이희정 위원장과 박성윤 대표, 그리고 직원들 모두의 ‘초심’은 롱런의 지름길이다. 그런 마음이 시민들의 가슴에 흘러들어 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