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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隱者)의 구름언덕,이색 찻집과 디오게네스
글 : 오성렬(자유기고가) / poi3275@naver.com
2012.07.01 10:31:2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가까이 다가가 보면 작은 팻말에‘구름언덕’이라 씌어있기는 하지만 있는 듯 마는듯한 간판, 7~8평이 채 될까 말까한 작고 어둑한 공간, 말이 찻집이지 묵은 때가 번질거리는 낡은 송판 몇 장을 이어붙인 탁자 서너 개가 전부인 그 공간은 무심코 들어왔다가도 선뜻 앉기를 주저할 지경이다.  우선 좁기도 하려니와 예사롭지 않은 집기며 장식물들이 낡기도 한데다가 부조화를 이루고 벽면 한쪽에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구닥다리 카세트 옆으로 기타가 놓여 있는가 하면 작은 불상(坐佛)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벽을 돌아가며 얼기설기 만든 책꽂이엔 온통 오래 된 책들인데 거의가 웬만한 사람은 알아보지도 못할 영문 원서(原書)다.  모든 것이 범상치 않거니와 일견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이 집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그에겐 이름이 없다.  아니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라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불러 주지 않으니 그 조차도 자신의 본명을 잊고 산지 오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무심(無心)스님’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에겐 ‘나자로수’라는 또 다른 별칭도 있다.  그는 나이도 모른다.  나이가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 역시 그에겐 필요치 않은 숫자일 뿐이다.  그는 결혼도 해 본 적이 없다.  박박 깎은 머리에 하얗게 기른 수염, 온화하면서도 꾸밈없는 웃음과 함께 엿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 그리고 승복을 걸친 모습에서 그가 구도자이거나 수도승일 거라는 것만 짐작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벽에 걸린 십자가는 또 뭐란 말인가.   

 

 



 

그의 어린 시절

그가 태어난 곳은 충남 서천의 어느 시골 마을. 조부께서 향교(鄕校)의 유장(儒長)을 지내셨다는 것으로 봐서 대단한 유교적 가풍을 지닌 가정이었을 것으로 읽혀진다.  1890년대 중반, 당시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했던 군산의 멜볼딘 여학교에 다니던 방년 17세의 모친과 서울의 휘문고보에 유학중이던 부친의 혼담이 오갈 때에는 조부님의 반대도 심했지만 결혼 후 모친께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부친의 병간호를 극진하게 하는 모습에서 결국은 조부님의 마음이 움직여 조부 역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하는데 모친의 이러한 간호 실력은 신학문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간호학도 학교에서 배울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 후 군산으로 이주한 그의 집은 조부께서 모처에 교회도 설립할 만큼 독실한 기독교적 가정으로 변했고 그를 포함한 8남매 모두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게 되는데 그 역시 학생 시절에는 어려서부터 교회 청소를 도맡아 할 만큼 교회는 곧 생활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미국행과 신학공부

하지만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예기치 않은 변화를 겪게 된다.  미국에 들어가 살던 형의 권유였다고는 하지만 70년대 중반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여 학생 운동이 치열했던 시절이어서 혹시 그런 정치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만 드는데 그가 밝히지 않으니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친께서는 그에게 기왕 미국에 가게 되었으니 신학을 공부 할 것을 권유하였고 그는 미국에 들어간 후 부친의 뜻을 받들어 목회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이로써 그의 형제 8남매 중 3명만 빼고 모두 신학을 전공하게 된 셈이다.

 

 

 


 

불교와의 만남

그의 나이 40대 후반이던 20 여 년간의 미국 생활 어느 무렵 그는 동남아를 거쳐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더 넓은 세상을 돌아보며 다양한 문명과도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인데 이는 겸해서 비교종교학 공부도 해보고 싶은 학구열의 일환이기도 했다.  국토도 크거니와 인더스문명 발상지로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지닌 낯선 인도에서의 여행은 과연 그에게 새로운 시야와 정신세계를 일깨우는 전환점이 되었으니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승려와의 인연에서 기인한 것이다.  어느 땐가 산간 오지를 걷던 중 돈도 떨어지고 몸도 쇠약해져 지치고 힘들었을 때 찾아들어간 이름 모를 작은 사찰에서 자신을 따뜻이 맞이해준 건 어느 노승이었다.

 

그는 목사 공부중임을 밝혔지만 노승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돌봐 주었다.  국적도 인종도 종교도 초월하여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그 노승에게서 그는 현자(賢者)의 모습을 보았고 몸과 마음의 평정을 얻어가고 있었다.  그는 불교 공부와 함께 자연스레 동양 철학에 천착할 수 있게 되었는데 기독교 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서양철학과 더불어 동양의 현자들과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통한 약 5년여에 걸친 이러한 폭 넓은 공부는 그의 내면을 일깨우며 새로운 자아를 찾는 여정이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외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던 것, 기독교인으로서 지금껏 자신의 종교 틀 안에서 바른 신앙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얼마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었는지를 돌아보는 거듭남의 여정이기도 했다.

 

 


 

경전과 도그마(Dogma)

대저 어떤 종교든 그 고유의 교리를 담은 경전을 신앙의 근간으로 하는바 불경, 성경, 코란 등이 그것이다.  유교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4서5경은 종교라기보다는 인간 도리의 윤리규범으로써 우리 일상생활에 녹아들어 있기도 하다.  경전은 성인의 가르침과 교리를 집대성한 책이긴 하지만 너무 거기에만 매몰되거나 집착하는 것을 그는 경계한다.  경전은 당시 성인의 말씀을 곁에서 누가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기록해 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 제자들의 구전에 의하거나 추종하는 후세인들에 의해 첨삭된 것으로서 경전이나 복음서마다 내용이 부분적으로 다르거나 또한 각 종파나 교단에 따라 각기 해석을 달리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이적(異蹟)들, 오늘날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현상들은 신성을 과시하거나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며 핵심은 메시지 속에 담긴 진리가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경전의 문자적 교리만을 절대적인 것인 양 신봉함으로써 아집(Dogma)에 빠지는 것은 순진무구한 초보적 신앙 단계로 자칫 편협하고 배타적인 종교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에 매몰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답답함을 넘어서 불편함까지 준다는 말도 덧붙인다.  천국이란 용어만 해도 서기 1,100년경 이후 성서에 최초로 등장하는데 그 이전 일반적으로 쓰였던 아람어(Aramamic Language)나 히브리서(Hebrew 書)에는 그 어디에도 천국이란 단어는 없으며 다만 ‘아버지의 나라’로 표기되어 있을 뿐으로 단테가 그의 저서‘신곡(神曲)’에서 아버지의 나라, 또는 내세(來世)라고 기술한 것을 이후 로마교황청에서 천국으로 바꾼 것이라 한다.

 

불경도 마찬가지인 면이 있다.  기원전 400~500년경에 인도를 중심으로 아리안 지역에서 한 때 쓰였던 옛 산스크리트(Sanskrit/梵語)로 대승불교에서 경전을 만든 것은 경전의 시대적, 고전적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측면이 강하다보니 그 과정에서 상당 부분 왜곡이 가해졌다는 말도 한다.  정수(精髓)를 꿰뚫지 못하고 문자적 교리에만 머무르거나 고집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일생을 가난하고 병든 자, 핍박받는 자.  죄 지은 자 편에 서 세상의 모든 죄업을 대속(代贖)하고 짧은 생을 살다 가신 예수님을 떠 올릴 때면 지금도 마음이 숙연해진다는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평생 수천 번도 더 읽었을 성경을 요즘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읽는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늘 이웃과 남을 위한 것일 뿐 자신을 위한 기도는 없다.

 

 


 

현실 속의 신앙

그는 새벽 시간 몸가짐을 정갈히 하고 예불도 드린다.  최근엔‘다라니’를 읽는데 이 불경은 밀교(密敎)의 진언으로서 탄트라라고도 한다.  사실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을 통해서 전해진 밀교의 영향을 대단히 크게 받았다. 삼국시대 초기 전래된 불교는 1,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포교 과정에서 우리의 토속 문화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빠르고 깊숙이 자리 잡은 반면에, 불과 130여 년 전인 1880년대 후반 서양인으로부터 전래된 기독교는 교육이나 의료, 청년 계몽 등을 통한 봉사적 선교를 기반으로 급속도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나 다만 우리 문화를 일부 배척함으로써 (예: 제사문화 따위)문화적 충돌을 겪는 면도 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깊은 나라에서 자신의 것을 배격하면서까지 외래 종교를 받아들인 나라가 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떻든 우리나라에서 짧은 기간 동안 기독교가 폭 넓게 확산된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종교는 넘쳐나는데 반해 경제가 발전하고 교육 수준도 높아진 오늘의 사회가 너, 나 할 것 없이 제 잇속만 챙기려는 배금주의로 흐르고 계층 간 양극화의 심화, 서로를 못 믿는 인간관계, 고착화 된 부정부패, 높아진 범죄율과 자살률, 음주율, 이혼율 등으로 골머리를 앓게 된 것은 종교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비판적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다.  종교 자체를 문제 삼는다기보다는 사찰이나 교회 등 신앙매체에서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을 팔아 잇속을 챙기거나 반인륜적 행위들이 빈번하게 노정되고 부패 정도가 심화됨으로써 사회문제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언론 보도만을 놓고 볼 때 그런 것이지 실상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타인을 교화하고 구제한다는 종교가 이제는 거꾸로 개혁 대상의 주체로 거론되고 있는 세태를 바라보며 일부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도 한데 왜곡된 신앙을 금과옥조인 양 붙들고 있거나 평소의 삶은 전혀 신앙인답지 않으면서도 교회만 나가면 복을 받고 천당에 간다는 유치한 믿음 따위를 버리는 것이 절실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더 오래 지속될수록 오히려 종교에 등을 돌리는 세상을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의 소리도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위한 지상천국이 존재한다면 현재의 덴마크와 스웨덴이 바로 그곳일 가능성이 높다.  이 두 나라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도시들, 아름다운 숲, 건강한 민주주의 체계, 낮은 범죄율과 부정부패, 뛰어난 교육 제도, 강한 경제, 탄탄한 지원을 받는 예술, 성공적으로 발현되는 기업가 정신, 깨끗한 병원, 무상 의료, 평등한 사회정책 등이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별로 없다(필 주커먼 著, 신 없는 사회)”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한 바가 크다.  사실 중세 때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인 유럽 사회는 언제부턴가 이처럼 목회 관련 사업이나 종교적 열정 등이 쇠퇴기에 접어들어 마치 종교 자체가 없는 듯 한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는데 이는 신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빙자하여 점점 사악해져 가는 세상을 보면서 종교 무용론이 심화된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니체가 그의 저서‘신은 죽었다’에서 설파한 것도 실존적인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본 적 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후세인들이 멋대로 형상(우상)화 하고 이를 내세워 타인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그러한 신은 죽었다는 의미로서 오늘의 우리가 모두 깊이 음미해야 할 내용이다.  오죽하면 종교가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분열이 있고 파벌이 있고 다툼이 있다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소위 종교인이라면 더구나 교역자라면 존경을 받지는 못한다 해도 지탄의 대상이 된대서야 체면이 말이 아닐 터다.  자리나 직위는 돈으로 살 수 있다 해도 존경까지 살 수는 없다는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나자로수, 그리고 무심(無心)

‘나자로수’란 이름은 미국에서 목회자가 되면서 그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그래서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 그를 ‘나자로수’라 불렀다.  예수께서 태어난 ‘나사렛’ 마을사람이란 뜻으로 그의 예수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알려진 대로 중세기 경 기독교가 일찍 전파된 서구사회는 오늘날 종교가 생활 그 자체일 뿐 구원이 교회에만 있다고 믿지도 않으며 따라서 주일에는 헌금 들고 꼭 교회에 가야 한다거나 예수를 믿으면 내게 복이 온다는 기복 성 신앙 따위를 버리는 추세다.  그러나 그들은 평소 어려운 이웃에 대한 봉사, 기부, 헌신 등과 같은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삶의 바탕에 깔고 있어 우리의 현실과는 다른 신앙세계를 보여준다. 대표적 기독교 국가이자 우리에게 기독교를 전파해 준 미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의 유학 시절만 해도 집세도 너무 비쌀 뿐만 아니라 교회를 찾는 신자가 우리와 달리 극히 적어 교회를 설립, 운영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러다보니 무엇보다도 우선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시급했다.

 

그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는데 그러나 어렵게 일자리를 구했다 해도 업주 중에는 같은 기독교이면서 자신의 종파가 아니라하여 다른 이유를 들어 며칠 만에 쫒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편을 가르고 벽을 쌓는 짓은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이러한 모습에 실망과 한계를 느낀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더 폭 넓고 참된 진리를 터득하고 싶었고 인도로 떠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지혜와 자비, 일체의 평등, 증오와 집착을 낳는 광신의 배척, 관용과 베풂을 덕목으로 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더불어 또 하나의 큰 울림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혜안을 틔우고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나자로수’라는 이름을 가진 기독교 목사로서 ‘무심(無心)’이라는 법명의 승려이기도 한 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체로 많이 받는 질문도 그 부분이라 한다.  그는 한마디로 두 종교의 융합을 설파한다.  공부를 할수록 깨닫는 이치가 있으니 예수님과 부처님이 각기 다른 두 분이 아니고 한 분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일찍이 예수의 모습에서 싯달타 고타마(부처)의 모습을 발견했고 부처의 모습에서 예수를 발견했다는 것인데 다만 후세인들이 두 분을 분리하고 벽을 쌓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집 뒷마당이나 파보고 나서 마치 지구에 대해서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얄팍한 신앙의 잣대로 그를 판단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면 항상 부처의 모습이, 불경을 읽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진다는데 그 초월적 신성 속에 내재된 사랑과 희생, 관용과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가르침과 진리는 같지 않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 간의 벽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배타심을 버리고 서로 인정하고 상생하는 사회가 되기를 그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부처와 예수, 예수와 부처는 결국 같은 한 분이기 때문이다.

 

벽에 꽂힌 원서(原書)들은 거의가 세계적인 문학작품이거나 철학서, 복음서 등의 인문학서다.  그는 경전 말고도 매일 많은 책을 읽는다.  ‘구름언덕’은 그에게 있어 차를 파는 업소이자 마음수련의 도장이기도 하다.  녹차, 백련잎차, 쑥차 등이 있기는 하지만 차를 파는 것이 주목적도 아니고 장사가 되는 것 같지도 않다.  가끔 찾아주는 제자나 지인들만이 그의 세속적 벗이다.  그들과 향기 그윽한 한 잔의 차를 앞에 두고 나누는 담론들 속에서 드러내는 선각적 정문일침(頂門一鍼)은 그의 내면이 엿보이는 형형한 눈빛과 더불어 알 수 없는 조용한 이끌림을 준다.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생활을 실천했던 그리스의 철학자 시노페의 디오게네스.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자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 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듯 세속의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고 경건한 심신으로 유유자적하는 그의 모습에서 기원전 4세기경 디오게네스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그를 만나고 싶다면 오후 5시 이후가 좋을 듯하다.  하지만 부질없이 햇빛이나 가릴 양이면 그를 찾지 않는 게 좋다.  ‘구름언덕’은 나운동 궁전예식장 부근(군경묘지로 통하는 뒷길)에 있는 작은 찻집이다.

 

 

구름언덕

전북 군산시 나운2동 1225-8

(063)465-8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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