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물러나고 완연한 봄기운이 물씬나는 계절 속에서 무한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 곳은 한 목표를 향해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며 열심히 노력하고 연습하고 곳이기도한 군산유일의 예술분야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아토’를 찾아가 고동우 대표를 만났다.
예술에 꿈을 담다
어릴 적 동네 형이 연주하는 사물놀이를 듣고는 그 이후로 국악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꿈을 키워나갔다. 국민학교시절 친구들이 음악시간 리코더 시험을 볼 때 혼자서 단소로 시험을 보겠다고 떼를 썼고 중학교 때는 사물놀이반을 결성한다는 음악선생님의 말씀에 그동안 모은 용돈으로 사물북을 사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런 꿈을 가진 소년이 제대로 된 국악을 접하고 본격적인 시작을 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고동우는 그 이후 줄곧 국악이라는 세계에 몸을 담고 살아오고 있다.
꿈은 변할 수도 있기에
울산에서 태어난 고동우는 어린 시절 천체물리학자가 되는게 꿈이었다. 수학을 좋아했고 과학실험에 누구보다 진지했으며 나름 학교나 학원에서 인정받는 우등생으로 자랐다. 하지만 글씨를 잘 못 쓴다는 이유로 과학경시대회에 나가지 못하는 일이 생겼고 이후 조금씩 공부벌레에서 노는 벌레로 변태하기 시작했다. 사춘기 시절엔 집안환경과 여러 가지 상황으로 중학교를 3군데를 다니면서 공부는 먼 세상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놀 궁리만 하면서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어른들한테는 착하고 말 잘듣는 청소년으로 보였을테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만가지 불량스런 일들은 다하고 다녔다.
노력은 헛되지 않아
군산에 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3학년 때부터였고 오자마자 치룬 시험에서 반에서 3등을 하는 바람에 쓸데없는 기대감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고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하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군산고등학교 진학을 추천했지만 고동우는 군산제일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순전히 축제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드디어 운명적인 동아리에 들어가게된다.
‘도꼭지’ - 어느 방면에 가장 으뜸이 되는 사람(들) 이란 뜻을 가진 군산제일고 사물놀이 동아리는 고동우에게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게 한 엄청난 기점이 되었다. 학교 공부보다는 동아리 활동과 다른 학교 사물동아리와의 교류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고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 대학진학을 국악과로 선택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예술에 물들다
‘동남풍’ 이라는 전통타악을 연주하는 팀의 리더인 ‘조상훈’ 선생님을 만나 대학을 가기 위한 준비를 했고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이 2명 더 생겼다. 그 둘 또한 도꼭지 5기로 같은 기수에 3명이 국악을 하겠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좋은 대학 보내야하는 학교 선생님들께서 사물놀이동아리를 뭐라고 생각하셨을지 정말 궁금하다.
우여곡절 끝에 백제예술대학을 진학해서 인생 중 가장 재밋는 기억이 많은 날들을 보내게된다. 사물놀이밖에 몰랐던 머리 속에 국악의 다른 분야들 지식들을 배우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그런 와중에 2001년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첫 해를 맞이해서 전국순회 홍보단으로 ‘동남풍’을 선정해 전국 각지를 다니며 세계소리축제를 홍보하는 공연도 함께 했었다. 전북도립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으며 2002년에는 중국에 가서 공연까지 할 수 있어 국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기였다.
다져진 예술감각으로
지금도 1년에 1번 이상은 만나고 있는 정말 좋은 대학동기들을 만나 국악이 재미있다는 것을 느끼고 배우고 반성하는 날을 보내다보니 2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다 하는 것이라 생각한 편입을 했지만 학교를 계속 다닐 수는 없었다. 미루어뒀던 군대를 다녀와야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음악을 하는 남자들은 군악대를 가고 싶어했다. 4명을 선발하는데 20팀이 뭔지도 모를 악기까지 싣고와서 시험을 보니 많이 부족한 고동우는 군악대를 가지 못했다.
사물놀이를 같이 하던 동고등학교 친구놈이 공군을 동반입대할 수 있다해서 그냥 신청했고 면접을 봤고 시험을 봤고 나만 붙었다. 그 녀석은 떨어졌다. 23살.. 당시엔 군대 가기엔 이미 늦은 나이라 그냥 혼자 가기로 하고 공군 병 590기로 방공포대에서 2년5개월이라는 시간을 그 곳에서 보냈다. 군대에서도 남다른 사고방식으로 선임들을 힘들게 했고 남들은 하는 결혼을 상병 때 하기도 했다. 아마 일반 병사로 결혼휴가 14박15일 받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당시 제 빈자리를 채워주신 선임과 동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달콤한 행복의 시작
제대 후 위기가 찾아왔다. 결혼도 했고 애도 있으니 25살 청년은 장구치고 북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는데 제대 이후 뭘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몰랐다. 한동안 놓았던 악기를 연주하는 것보다 현재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것이 더 큰 숙제로 다가왔고 급하게 이런저런 일들을 하려고 노력하다가 아버지의 소개로 동ㅇ화재보험설계사로 일을 시작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렇게 열심히 설계사 생활을 하지는 못한 것 같다. 전혀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며 보이지 않는 보험이라는 상품을 설명하는 것이 당시 25살에게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물론 주변의 도움으로 2년 가까이 버티며 보험이라는 것을 잘 배우고 나오게 되었다.
보험설계사를 하는 와중에 ‘예술강사’ 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예술의 길을 걷다
예술강사는 학교나 복지시설(보육원,장애인시설)에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 예술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예술을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 가장 효율적인 예술수업의 형태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인들이 참여해 대한민국의 예술 수준이 상승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예술인의 경제적인 부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2006년부터 사회문화예술강사로 시작해서 2007년부터는 학교예술강사도 겸해서 예술강사호 활동을 했고 2008년에는 우수강사로 도지사표창까지 받았다. 예술강사를 하면서 공연활동도 꾸준히해서 2009년에는 대구에서 열린 사물놀이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국악을 전공하고 국악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또 다른 예술분야에도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2006년에 찾아왔다. 군산에 있는 극단 동인무대에서 남자배우를 구하고 있었고 연극인으로 활동하는 배우자 ‘김복임’의 소개로 조연으로 연극무대에 서게 된다. ‘유정천리’라는 악극으로 시작한 연극배우의 삶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고 지금까지도 연극배우로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군산에서 배우활동을 하다가 소극장 연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익산에 있는 ‘작은소리와동작’이라는 극단에서 단원으로 2009년 ‘나의라임오렌지나무’부터 2014년 ‘스트립티즈’까지 배우와 스탭 극단관리 등을 하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예술의 터를 잡다
2014년이 되면서 예술활동에 대한 고민들이 많아지면서 나만의 공간에서 연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공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15년 다니던 교회 집사님의 도움으로 지곡동에 ‘국악놀이터 아토’ 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열게 되었다.
공간의 이름을 짓기 위해 이런저런 우리말을 찾다가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이 있다하여 ‘아토’라는 이름으로 확정했다. 몇년 뒤 순 우리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이름이 가진 의미를 ‘아(ART의 앞글자)토(흙,터전)’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국악놀이터아토로 하고 싶었던 활동을 시작했고 군산에 있는 예술인을 모아 공연도 진행했다. 1년 뒤인 2016년에는 ‘협동조합 아토’라는 이름으로 법인설립까지 하여 본격적으로 군산의 예술인들과 일반시민들이 예술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협동조합 아토는 2016년부터 최소 1명에서 최대 12명까지 예술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하여 안정적인 공연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그 활동이 사회적기업까지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공연과 교육활동 통해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에는 한국예총 군산지회에서 공로상을. 2021년에는 군산시에서 사회적경제활성화 공로상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협동조합 아토는 예술인들이 모인 협동조합법인으로 국악과 연극을 필두로 다양한 예술분야의 회원들이 존재하며 지속적인 창작공연을 무대에 올려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5년 ‘별주부의별난여행’ 2016년 ‘아!토리주머니’ 2017년 ‘ 별주부의 더히스토리’ 2018년 ‘팥죽할머니와호랑이’ 2020년 ‘얼뚱이’ 2023년에는 ‘누가떡을먹을까?’ 라는 작품으로 군산뿐만 아니라 다른 타도시에서도 공연을 진행했으며, 익산야행이나 부안야행처럼 지역문화축제에도 아토의 구성원들이 대거 참여하여 지역의 예술을 무대화시켜 관객과 관광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비전을 가진 예술로
예술활동은 정해진 것이 없다. 공연을 많이 하는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공연을 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때가 있고 안될 때가 있고, 사람이 있어서 공연을 할 수 있을 때가 있고 사람이 없어서 공연을 할 수 없을 때가 있고...
이렇게 예측이 불가능한 예술산업에 코로나 팬데믹은 너무나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아토는 성장을 위해 연습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넓은 공간으로 이사를 하고 1년이 채 안된 시점에 팬데믹이 시작이 되었고 이는 아토의 어려움의 시작이자 방향성을 변경하는 시점이 되었다. 코로나라는 단어가 뉴스에서 나오면서 공모에 선정된 사업조차 취소되고 반려되고 무기한 연기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는 고스란히 타격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경영 상의 어려움을 직원에게 전가하지 않기 위해 팬데믹 상황에서도 인원의 변동은 있었지만 직원들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소독하는남자들’ 직원이 지은 이름이다. 이 코로나 상황을 우리 손으로 빨리 종식시키고 최대한 빨리 예술활동을 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고 예술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인든지 할 수 있다는 인생의 기조가 생긴 것이다.
시기에 맞게 소독사업은 호황이라 생각보다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코로나 시기가 끝나자 매출은 떨어졌고 그간 쌓인 수익은 아토 유지비로 다 소진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예술활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공연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시도하고 새로운 공연을 만들고 연습을 하였다. 2022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축전에서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도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고, 2023년에는 ‘누가떡을먹을까’ 가족국악극을 만들어 찾아가는 공연으로 전국을 다녔다.
2024년은 코로나는 끝났지만 고동우도 아토도 힘들었던 시기였다. 공연 횟수는 줄어들고 줄어든 만큼 매출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토를 유지해야 공연도 할 수 있기에 많은 고민 끝에 오전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20대에 경험한 보험설계사이다. 삼성생명에서 일하는 연극선배의 추천으로 시작했고 곧 있으면 만1년이 되어간다. 주변에서 예술하는 사람이 무슨 보험설계사까지 하냐는 말고 하지만 난 설계사라는 직업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내가 하는 예술을 지속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생의 기조에 걸맞는 직업이다. 아픈 사람들이 빨리 나아야 공연을 보러 올 것 아니겠는가.
예술은 영원하다
군산에서 예술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없었던 ‘예술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을 만들려고 한다. 어려운 길을 또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모임을 통해 군산예술이 한층 성숙해지고 다툼이나 시기가 없어지고 진실한 마음으로 예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이 모임에 좀 더 많은 예술인과 시민들이 참여해주셨으면 한다.
지금까지의 고동우의 인생이 어찌보면 물 흐르듯이 살아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란만장하게 살고 있지만 이것이 고동우라는 사람이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을 하다보면 정말 여러직업을 경험하게 되고 다양한 사람이 되어본다. 연극 안에 한 조각의 인생이 있다면 인생이란 여러 편의 연극이라는 역발상을 하게 된다.
고동우는 아마 죽을 때까지 예술인으로 살아갈 것이며, 죽을 때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지면서 재주꾼으로 살아가지 않을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