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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는 나의 인생, 김기봉 회장
글 : 채명룡 / ml7614@naver.com
2025.02.25 15:58:2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한 걸음 또 한 걸음, 40년을 지켜 온 ‘신사의 품격’ 

 

군산을 지키는 버팀목은 무엇일까. 

군산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군산에서 어른답게 살아 온 이가 과연 누구일까.

 

흙수저를 자처했지만 스스로를 낮출수록 은은히 빛났던 사람. 험한 세상에서 기부와 선행의 아이콘으로 살아 남은 재단법인 군산사회복지장학회 김기봉 이사장. 

벽돌 한 장을 쌓듯 군산 지역사회와 함께 견디어 온 그를 오늘부터 ‘군산의 신사’, 젠틀맨으로 부르려고 한다.  

【젠틀맨은 자신의 몸을 잘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 자심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중략)

 특히 어느 상황에서도 분노를 표출하면 안 되었다. 분노를 드러내는 일은 나약함의 표식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젠틀맨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기보다 오히려 축소해서 표현해야 했다.】

연세대 사학과 설혜심 교수가 2024년 7월 6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신사의 조건 - 흙 수저라도 스스로 ‘부 – 품위 – 교양’을 갖추면 젠틀맨”이라는 칼럼 내용이다.

거친 시절을 지나 고희를 넘어 선 오늘까지 어려운 이들의 삶의 무게를 나눠 진 김기봉 회장. 

그는 젠틀맨 칼럼 내용처럼 ‘나약하지 않게’,  ‘과장되지 않게’ 봉사의 길을 걸어온 참 군산 사람이다.

 

군옥장학회 현판식(1994.4.27)

 

스스로 강해져야 나를 지킬 수 있다. 

 

봉사와 희생으로 세상을 살아 온 그가 막 고희(古稀)를 넘겼다. 묵어갈수록 신사의 품격을 은은히 발산하는 김기봉 이사장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가 태어난 1955년, 아버지는 65세 어머니가 47세였다. 기적적으로 세상 빛을 보게 된 늦둥이 중의 늦둥이가 바로 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먹고 살기조차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2학년인 그와 한 살 위 누나를 줄포의 큰형 집에 맡겼다. 

곰소초까지 30리길을 걸어 다녔으니 학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어린 나이에 ‘가다 말다’를 반복하면서 배움과는 점점 멀어졌다.

“한 겨울, 손과 발에 얼음이 박혀서 신발도 신지 못했어요. 누나와 함께 부둥켜안고 추운 방에서 날을 새기 일쑤였는데, 어느 날 2년 만에 어머니가 오셨어요. 동생들을 잘 돌보지 않은 형에게 크게 화를 내고 그 길로 모두 하제로 돌아왔지요.”

고향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가난의 죄는 무서웠다. 남의 집에서 잠자리를 얻기가 다반사였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였는데, 파병 군인이 사다주어서인지 집집마다 귀중품이 있었나봐요. 그 때문에 좀도둑들이 날뛰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뭔가 없어지기만 하면 저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거였어요.” 

정말로 억울했다. 도둑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내가 그 좀도둑을 잡아야만 했다. 밤을 새는 게 일상이었는데, 결국 좀도둑들을 모두 잡았다. 

하제에 돌아와서도 25리를 걸어 학교에 갔다. 논길을 가야만 했는데, 이른바 ‘논두렁’들이 떼로 몰려 나와 주먹질을 해댔다. 혼자인 그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그 때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성장 과정 때문에 간혹 험한 출신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핍박받으며 살아왔던 코흘리개가 스스로를 지키려던 일들이 이런 말로 이어졌으니 답답한 일이었다. 

 

김기봉 이사장의 주요 수상 이력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저는 건달들처럼 누구를 괴롭히거나 불로소득 하지 않았어요. 정당하게 사업을 하고 벌어서 어려운 아이들과 어르신,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복지 사업을 벌여왔지요.”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고, 스스로의 가치를 위하여 자신을 불태우기도 한다. 그러나 30년 혹은 40년을 봉사를 하기 위하여 자기 희생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의 시기와 질투, 혹은 이유 없는 비판을 묵묵히 삼킬 수 있을까. 묻기는 쉬워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봉 이사장은 싸리비를 엮듯 하나씩 하나씩 선행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불쑥불쑥 이어지던 호된 시련을 견뎌냈다.  

“군산에 내려오니 ‘그랜드파’ 라느니, ‘백학관파’ 라느니 하는 주먹들이 있었어요. 어려운 상인이나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더니 나름대로 제 말을 잘 들어주더라고요.” 

한국관을 오픈한 청년 사업가의 말은 곧잘 통했다. 그런 걸 본 상인들이 그를 그랜드도 아니고 백학관도 아닌 통합파 ‘두목’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그가 건달이라는 소리를 무시로 들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섭섭할 때도 많았으나 실망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세상이 진심을 알아 줄 때가 있으리라 믿었다. 

“저는 ‘사람은 열 번도 바뀐다.’ 라고 생각해요. 사람의 마음은 바뀔 수 있는데, 그렇더라도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진실하게 살면 그 진실을 버릴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세상 어느 누가 사업으로 벌어 30년~40년 동안 200억 원이 넘는 돈을 아이들과 어르신, 장애인들을 위해 쓸 수 있을까.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기부와 나눔은 이제 그의 캐릭터가 되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오늘도 그는 그 일을 위하여 양 발에 땀이 배도록 뛰고 있다.

 

군산사회복지장학회 임원 명단

 

나를 지키는 게 뭘까?

 

“가깝게 지냈던 누나 아들이 있었는데 벙어리였어요. 하제 근처에 레이더 기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늘 다니던 길 가에 종이 한 무더기가 떨어져 있었죠. 그걸 주어다가 공책으로 만들어 썼는데, 그게 사달이 났어요.”

어느 날 형사들이 찾아와 아무것도 몰랐던 그 벙어리 사촌을 닥달하고 조사하더니 구속시켜 버렸다. 그 사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해버렸다. 참, 억울한 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종이가 무슨 비밀 문서였는지 약품을 처리해서 글씨가 안보이게 만든 문서였다고 했다.

“이런 일을 지켜보면서 ‘나를 지키는 게 뭘까?’ 깊이 생각했었죠. 집안이 다 망해서 집도 절도 없고, 형제들의 도움도 받지 못했을 때지요. 돈도 빽도 없는 내가 무엇을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런 고민은 군산역 앞의 합기도 도장을 다니는 계기가 되었다.

체육관 회비를 낼 돈이 없던 소년 김기봉은 매일 아침부터 관원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훔쳐보았다. 눈물이 났다. 

“어느 날 관장님이 들어오라고 불러주시더라고요. 내 사정을 다 듣더니 ‘운동을 해라’ 라고 허락해 주셨어요. ‘관장님이 운동을 시켜주셨으니 청소라도 해서 보답을 하자’라고 다짐했지요.”

도장에 나가면 신이 났다. 그 날부터 청소부터 궂은 일은 그의 몫이 되었다. 그렇게 운동을 하면서 ‘나 하나는 지킬 수 있다’ 할 정도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누명도 많이 썼고, 험난한 시절을 거치면서 ‘못 배운 게’ 한으로 남았던 소년 김기봉. 

‘돈 없어서 배우지 못하고, 누명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라는 생각이 사람을 돕는 일에 뛰어 든 계기가 되었으니 세상 일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지역아동센터 장학금 지원

다시 태어나도 가난하고 힘없는 편에 설 터

 

봉사 인생 40년을 넘어선 그에게 시기 혹은 질투 따윈 이젠 먼 나라의 말이다. 세상이 알아주고 그가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심을 알고 있기에 그렇다. 

어느 날, 가까운 지인을 찾아 경찰서를 방문하였는데, 어린 아이들이 ‘워크맨’을 훔쳤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는 것이었다. 문득 소년 시절 도둑으로 몰리면서 설움 받았던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돕고 싶었다. 

“경찰 지인에게 ‘어떻게 하면 저 아이들이 경찰서에서 나갈 수 있냐’라고 물으니, 신원보증을 서면 내 보내 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내가 보증을 설 테이니 풀어줘라’ 라고 했고, 아이들이 풀려났죠.”

80년대 중·후반 즈음 청소년들에게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워크맨이 대유행이었다. 경찰서 일로 ‘아, 아이들이 갖고 싶은 걸 못가지면 나쁜 일도 하는 구나’하고 생각했다. 그 인연으로 아이들을 돕는 길에 나서게 되었으니 또 하나의 등짐을 지게 된 셈이다.

봉사에 눈 뜬 청년사업가 김기봉은 그 일을 계기로 어르신 잔치에서 한 단계 나아가 청소년들을 돕는 일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군산과 옥구의 사회복지시설 원생 약 300명에게 ‘워크맨’을 구해 선물했다. 또한 아이들과 1대1로 전화를 해서 갖고 싶은 것들을 사주기 시작했다. 

연예인들과 함께 아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 행사도 시작했다.

1987년 ‘소년·소녀 가장 자립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오늘의 사회복지장학회가 만들어 진 모태가 바로 이 단체이다.

‘나와 같은 어려운 일을 아이들이 겪지 않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싹텄으며, 그 결과 40여 년 동안 청소년 장학 사업을 이어 온 것이다.

 

2021.12.9 신광모자원 장학금 700만원 전달

 

1만원의 효행, 그리고 뜻하지 않은 경로사업의 중단  

 

세상의 그 누가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으랴. 자존심 강했던 그 또한 어머니라는 소리만 들어도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매형이 가장 역할을 했는데, 사업이 실패하자 집안이 완전히 기울어졌어요. 어머니는 변변히 몸을 누일 곳조차 없었어요. 그런 어머니를 도와주신 주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었거든요.”

그는 1986년 32살이 되던 해에 당시 가장 좋은 TV를 사서 고향 마을을 찾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돌봐주신 분들에게 1만원 신권 한 장씩을 용돈으로 드렸다. 지금의 1만원과 40년 전 1만원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고향 하제가 떠들썩했지요. 삶에 찌들고 오그라들었던 어머니의 가슴이 활짝 펴지는 것 같았어요.”

효심이 남달랐던 그는 하제의 어르신들을 관광버스에 실어 여행을 보내드렸다. 이게 발단이 되어 1990년대 중반부터는 군산시의 노인잔치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세상사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뜻하지 않게 경로효친 사업을 중단해야 했다. 

2005년 즈음, 장학회의 한 직원이 법인과 개인 돈을 구분하지 않고 썼던 게 문제가 되었다. 경로사업이 사회복지법인 정관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장학회 정관에는 장학사업 70%, 복지사업 30%으로 정해져 있었어요. 그 당시 노인들을 위한 여행 보내주기를 활발하게 했는데, 정관 위반이라는 이유 때문에 중단할 수 밖에 없었죠.” 

사회복지장학회 출범 30주년을 맞으면서 가장 슬픈 기억은 바로 ‘어르신 모시는 사업’의 중단이었다. 

어르신 세대들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이 희미해져가는 오늘에서 보면 무척 아쉬운 일이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그렇듯 효자 김기봉에게 어머니는 그를 지탱하게 해준 원인이자 결과였다. 

“오래 살지 못하신 게 가장 가슴 아픈데, 하늘나라에서도 ‘잘 돌보지도 못했던 내 늦둥이 아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컸구나.’ 하고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어르신들 용돈으로만 집 한 채 값을 쓰기도 했던 그의 효행은 두고두고 군산 사회에서 회자되었다. 

1995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날,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2017.5.18 목양원 바베큐 파티

나를 견디게 해준 ‘아이들의 기도’

 

봉사와 나눔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게 기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봉의 인생에서 그의 이름을 놓고 기도해 주었던 구세군 목양원과의 인연은 특별했다. 

청소년들을 위한 그의 선행이 신문에 나면서 발달장애 아이들 부모회가 찾아왔다. 이 아이들과의 오랜 인연이 시작된 게 이 때 부터였다. 

“그 당시 부모들이 회현의 증석초 건물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어요. 힘들었겠죠.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서 티브이, 피아노도 사주었고, 지하수도 파 주었죠.” 

발달장애 아이들은 자기가 꼽는 사람만 기억하지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문득 문득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편지를 써놓고 기다리는 아이들이 생각났다.  

“가끔 통닭이나 간식거리를 사들고 목양원에 갔어요. 아이들이 무척 기다렸었나봐요. 만나자마자 편지를 건네주곤 했는데,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김기봉 회장님 건강 하세요’라는 말이 또렷했어요. 그 순간 이 아이들을 평생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곳에서는 일요일마다 ‘김기봉 회장님을 건강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해 주고 있다. 

2024년 연예인 자선 골프대회 10주년 때, 군산CC의 도움을 받아 발달장애 아이들 100명과 부모들 100명을 초대해서 골프장 잔디 위에서 마음껏 뛰어 놀게 했을 때였다.

인사말 중간에 김기봉 회장이 몸이 안 좋아 내려갔다. 사회자가 하고 싶은 말 있는 사람을 찾으니 한 장애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부모회가 만든 목양원에서 30년 전 만났던 아이였어요. 나이는 마흔이 넘었으나 하는 건 그 때 그대로였죠. 그런데 ‘김기봉 이사장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자’라고 하는 거였어요. 가슴이 먹먹하더라고요.”  

목양원의 하루하루는 김 이사장에겐 감동의 연속이었다. 또한 어렵고 힘든 오늘의 세상에서 그를 지탱하게 만든 힘이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의 기도’였다. 

 

‘베푸는 순간’ 잊어버려야 하는 봉사와 나눔의 길

 

봉사와 나눔은 기본을 지키기 무척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건 ‘베푸는 순간’ 잊어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걸 기억하고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면 반대급부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걸 조심하고 경계할 때 참봉사자로 불려진다. 

1979년도에 해병대에서 제대하고 리어카 장사 등등 험한 일을 할 때의 기억이 새로웠다. 밥 한 그릇이라도 먹여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셨던 분들을 찾아서 보은하는 게 ‘나의 일’이 되었다. 

“군산에서 대우자동차 공장을 지을 때 ‘함바’를 했고, 그 인연으로 구내식당을 운영했는데, 여러 가지 납품할 일이 많았었죠. 저를 도와주셨던 분들을 도우려고 했어요. 그런 인연으로 오늘까지 30년째 내 생일 떡을 해오는 분도 있어요.”  

청소년들에게 특강을 하면서, “나는 여러분보다 어렵게 살았다. 배움도 적다. 나를 보고 용기를 내라. 열심히 하면 된다.”라고 했다.

“서울에서 가방공장을 하는데 미싱과 원단이 필요했거든요. 해군 장교를 알게 되었는데 부탁하니 일이 술술 풀렸어요. 이런 경험으로 사람들을 귀하게 여겼지요. 공장의 어린 직원들에게 ‘나는 못 배웠지만 너희들은 일하면서 꼭 공부해라’라고 ‘야학’에 다니라고 했어요.”

그 또한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한다.’라는 각오로 사업을 일으켰고, 그 힘으로 어려운 아이들 후원을 시작했으며, 오늘 날 군산사회복지장학회로 발전시켰다. 

못 다했던 공부에 대한 그의 갈증은 학교에 대한 지원으로 풀어냈다. 제일고에 인조잔디와 야간 조명탑, 군산상고에는 일제 피칭머신. 군산고 농구부에는 타임워치를 해주었으며, 전북외고, 영광여고, 동고 등등 학교마다 지원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군산의 인재들이 외부로 유출되어 지역 발전에 저해된다는 소리가 들렸어요. 공부 잘하는 중학생을 잡아달라는 취지로 9개 고등학교에 매년 약 1,800만원씩을 지원해주기도 했죠.” 

2005년이 지나면서 영어가 회화 위주로 바뀌었다. 음성 인식 영어 어학기를 만들어 교육청과 여러 학교에 전달했다. 장학회 차원에서 말하기 대회를 열어 영어 공부를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의 이런 노력이 이후 글로벌아카데미 사업으로 추진되었으며, 이 지역 아이들을 인재로 키우려는 교육 사업들이 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미국 바이든봉사상 금상 수상(2022년 9월)

 

열 번도 바뀌는 게 ‘사람의 마음’ 

 

험한 세상을 살면서 외롭기도 했던 인간 김기봉. 눈이 휙휙 돌아가는 사업 제의도 많았으나 그는 분수를 지켰다.

그 또한 갈등이 없었겠냐만 누군가를 향하여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걸로 가슴 속의 거대한 바람을 잠재웠다. 그리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영화동에 사무실이 있을 때였는데, 스물여섯의 젊은 청년이 느닷없이 들어와 도와달라는 거예요. 노숙자 생활을 한다는 거였죠. 주머니를 털어 30만원을 주고, 깨끗한 옷을 사 입고 매일 장학회 사무실로 오라고 했어요.”

그 날부터 그 청년에게 굶지 않도록 매일 1만원씩 주었다. 몇 달 동안 용돈을 주고 면허증을 따게 해주었다. 취직도 시켰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때 그 청년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잘못되어 교도소라도 가지 않았을까. 

나라에서 하지 못하는 일, 그런 궂은 일이 바로 김기봉 이사장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장학회가 잘 운영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잠이 안 온다.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사업이 멈춰서는 안 됩니다. 제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장학회가 유구한 세월 군산과 함께 존재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장학기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잘 되리라고 봅니다.”

약 12억 원으로 평가되는 지금의 장학회 건물도 법인 소유로 했다. 개인 재산이 아니라 장학회 자산으로 한 것은 이 장학회가 군산 사회에 영원히 존속하도록 만들려는 일환이다.

지난 1987년 소년소녀가장 자립위원회를 설립하였으며, 1994년 33명과 함께 군·옥장학회를 설립했다가 2년 후 재단법인 군산 사회복지장학회로 변경하였다. 1987년부터 오늘까지 장학금과 사회복지시설, 경로행사, 소년소녀가장, 취약계층 등에게 교육지원사업에 123억여원, 사회복지사업에 80억여원 등 모두 200억원 이상을 지원해 지역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나라가 하지 못하는 일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군산시민의장,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국무총리표창, 김영삼대통령 표창, 이명박대통령 국민포장, 문재인대통령 국민훈장 목련장, 대한민국 인성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2024년에는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 봉사상 금상을 수상했다.

 

진정한 신사, ‘젠틀맨’ 김기봉 이사장

 

신사, 즉 젠틀맨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오늘과 같이 한 치 앞도 예단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과연 신사가 있기는 한 것일까.  

가진 것 없고 배움이 부족했다 하더라도 성장하면서 젠틀맨으로써의 자격을 갖추었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신사’가 아닐까. 

이런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김기봉 이사장이다. 

 

(재)군산사회복지장학회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궁포안2길 27, 지플레이스 6층 601호

Tel. 063) 445-8027  Fax 063) 446-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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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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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7 10:26:06) rec(4) nrec(4)
김기봉회장님, 숭고한 희생정신과 봉사정신을 이시대 젊은이들이 본받아야할,
이어가야할 근본이 아닐까 생각하며 더 건강하시어 더많은 좋은일들 이끌어주시고 힘든 약자 보살피시는
그마음과 정신에 경의를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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