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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구의 독서 칼럼: 책과 사람 그리고 세상 이야기 - 김희재. <탱크>. 한겨레출판. 2023.
글 : 공종구 / kong@kunsan.ac.kr
2025.02.24 11:12:4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살다 보면 저절로 초월적인 존재에 간절하게 매달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종교의 유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그렇다. 그러한 생각이 들 때는 언제일까?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져야 할 정도로 중요한 절체절명의 상황 또는 백척간두의 벼랑 끝이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는 위급한 상황에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 되어 자기 의사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절대적인 존재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도 아주 갈급하게.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이 믿는 신에 의존할 것이다. 그러나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종교를 불신하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까? 무언가 기적을 바라는 갈급한 심정이 되어, 그리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말에 기대어 초월적인 비의나 영험이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대상에게 절박하게 매달리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독서 칼럼 대상으로 소환하고자 하는 김희재의 ????탱크????는 문제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에 전경화되기 때문이다.

제28회 한겨레문학상(2023) 수상작인 이 작품은 최종심 30분 만에 심사위원 만장일치 수상작으로 결정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장편이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면서 시나리오를 써본 경험의 소유자였던 작가의 인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속도감 있는 문체와 빠른 장면 전환이 독서의 몰입도를 높이는 이 작품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흡인력 있게 ‘진격’”(277면)한다는 지적은 정곡을 꿰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텅 빈 믿음에 관한 작품, 도저히 믿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적 안간힘에 대한 소설”, “신 없는 시대의 종교 소설”(276-277면)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지적처럼, 이 소설은 한마디로 ‘절망의 나락에서 기적을 간구하는 사람들의 분투나 고투의 서사’로 규정할 수 잇다. 더불어 ‘낭만적 가족 신화’ 또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자극하는 서사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핵 사건’으로 기능하는 모티프는 황영경의 탱크 설치이다. 그 발단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 기계 설비 및 자동차제어부품을 수출하는 대구 소재(所在)의 외국계 중소기업의 경리로 일하는 황영경이 미국 출장에서 본사의 관리자로 일하는 루벤을 만나게 되는 데서 출발한다. 그로부터 3년 후 황영경이 근무하는 지사의 감사를 위해 루벤이 한국에 출장을 오면서 탱크 설치는 성사된다. 구체적으로 당시 번아웃 상태에 놓여있던 황영경은 “그 공간을 믿는 순간부터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세계에든 속할 수 있고 어떤 세계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65면)는 루벤의 말에 대한 주술적 믿음과 희망에서 김제의 야산에 탱크를 설치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서사의 핵심 축으로 기능하는 탱크는 “울창한 산 속에 자리 잡은 직육면체의 컨테이너”(24면)에 불과하다. 교주나 교리도 없는데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야산에 세워진 5평 남짓의 텅 빈 공간에 불과한 탱크는 “종교도 아니고 작정하고 사람을 홀리는 사이비도 아니고 딱히 자기 계발도 아닌, 그야말로 뭣도 아닌 자율적 기도 시스템”(50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설치 이후 황영경은 탱크를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탱크의 세기’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개설한 다음 거듭되는 임용시험 실패 후 종합학원 강사로 일하던 이부동생 손부경에게 커뮤니티의 예약 매니저 역할을 맡긴다. 

한편 이 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탱크와 관련된 인물들이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인물들이 한결같이 가족과 관련된 상처와 결핍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가족과 관련된 상처와 결핍은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     

먼저 “엉뚱하지만 동시에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가득 찬 영리한 아이”(60면)였던 루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이후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입양아이다. 입양 이후 미국에서 철저한 이방인으로 소외와 차별을 일상으로 경험하던 루벤은 방 안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아이로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루벤은 “의식의 변화가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요지의 세계관”(61면)으로 압축할 수 있는 책을 한 권 발견한 후 그 세계관을 현실 세계에 실현할 수 있는 방법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다가 고안해 낸 것이 바로 탱크이다. 빈 컨테이너를 기도실로 개조한 이후 그 안에 그 책을 비치한 루벤은 그곳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 책을 읽고 명상하거나 기도를 하게 한다. 육아에 지친 서른 한 살의 쉴라가 기적을 경험하면서 컨테이너의 영향력과 세력권은 확대⸱확장된다. 황영경과의 인연으로 인해 그 영향력은 한국으로까지 확장되기에 이른다. 

탱크의 한국 개설 책임자인 황영경은, 이혼 후 도박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빚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둔 불행한 가족사를 지니고 있다. ‘탱크의 세기’ 예약 매니저인 손부경과는 열한 살 터울의 이부자매이다. 그러니까 손부경은 황영경의 어머니가 재혼 후 낳은 딸이다.

탱크에서 둡둡의 시체를 발견한 후 경찰에 신고한 탱크의 이용자인 도선의 경우 또한 불행한 가족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일상으로 자행되던 성장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작가로 입문한 후 극심한 슬럼프를 겪던 도선은 한국에서 토익 학원 강사로 생활하던 제임스와 부부의 인연을 맺어 캐나다로 이주한다. 이후 이혼을 강요당한 도선은 딸 로사의 양육권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10년 동안의 캐나다 생활을 정리한 후 귀국한다. 이후 한국에서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던 도선은 동료의 소개로 탱크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중요한 초점인물로 기능하는 두 사람인 양우와 둡둡 또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양우는 19살에 마지막 가족이던 할머니마저 여읜 천애고아의 동성애자이다. 탱크 안에서 자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하는 대학생 둡둡 또한 동성애자이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는 양우가 익명의 회원들과 채팅을 하면서 영화를 볼 수 있는 OTT 플랫폼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 동성애자의 성별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은, 커밍 아웃한 이후 절대적인 지지자 역할을 기대했던 부모들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둡둡이 집을 나와 양우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항상 그리고 언제까지나 좋으란 법은 없기 마련. 사소한 말다툼이 빌미가 되어 둡둡은 양우의 집을 나가게 된 후 힘들고 지칠 때마다 찾던 탱크 안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들이 한적한 시골 마을의 야산에 세워진 5평 남짓의 텅 빈 공간에 불과한 탱크에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탱크는 단순히 기도를 하는 장소가 아니라 기적을 이뤄주는 장소였다”(100면)는 둡둡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탱크에서의 간절한 기도가 필사적인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들의 기적과도 같은 소망을 이루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는 둡둡이 가족에게 간절하게 원한 것은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둡둡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그런 점에서 정당한 권리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둡둡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과 대체할 정도로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자신의 의지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결정되어 버린, 그런 점에서 부조리하기 그지없는 “가족을 되찾는 것, 둡둡의 부모님이 둡둡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101면)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성애자로서의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부모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고 차별하더라도 두 사람만큼은 절대 예외일 거라고 믿었던, 아니 믿고 싶었던,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보루라고 기대했던 부모들에게서마저도 자신의 그러한 바람이 무참하게 좌절되어 벼랑 끝에 몰린 둡둡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동일성의 시간을 스스로 완전 차단해버리는 자살을 결행하는 직전까지 구원을 기대하던 둡둡이 “자기표현이자 자기행위 양식의 하나”(천정환. ????자살론????. 문학동네, 2013, 26면)인 자살을 결행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흔히 가족은 냉혹한 세상 속의 온갖 세파를 막아주거나 피해갈 수 있는 마지막 천국으로까지 낭만화되곤 한다. 과연 가족은 그러기만 한 근대적인 제도나 공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가족은, 둡둡을 비롯한 루벤, 황경경과 손부경, 도선과 양우 등의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불행과 상처 그리고 소외의 기원으로 기능하는 폭력적인 제도나 공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불편한 질문으로 이 글을 매조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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