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돈 선생님은 올해 대한노인회 군산시지회 부설대학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평생 교직에 40년을 몸담고 퇴직 한 후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봉사가 부족했을까. 어느 날 대한노인회 군산지회 이래범 회장의 권유를 받았다. 노인회 부설 학장을 좀 맡아서 이끌어 달라는 제안이다. 선생님을 미처 준비가 안 된 상태라고 사양했으나 결국 맡게 되었다. 곧바로 회장으로부터 위촉장을 받고 업무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여러모로 생소하고 부족한 점 미숙한 점이 많지만 배워가며 일한다는 자세로 임했다. 이래범 회장이 모토로 삼고 있는 ‘당당한 군산 노인! 존경받는 군산 노인!’을 노인대학 학생들에게 접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당당하고 존경받는 품격을 갖춘 학생 교육에 주력하였다.
노인대학 운영 방침을 요약하면
첫째 여가선용에 최선을 다해 노인들의 취미와 흥미 활동에 맞는 프로그램 개발에 주력한다.
둘째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회봉사 활동을 전개한다.
셋째 노인의 위상 정립을 위해 스스로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병행하여 노인 각자가 당당한 노인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한다.
넷째 노인대학 프로그램 운영은 보고 듣고, 느끼어 변화된 행동으로 실천하는 운영에 역점을 둔다.
노인대학 학생은 품격 높은 어른으로서 당당한 모습으로 고고한 인품의 향기가 천지에 풍기는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다짐한다. 그 모습에서 노인대학장 자리는 조성돈 선생님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자리라 생각되었다.
‘평생 줄을 울리며 살아갈 사람이요’
우리의 삶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평생 영향을 받게 된다. 조성돈 선생님은 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선생님을 만났다. 사춘기 소년은 이 때 음악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평생 음악교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 군산 음악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조성돈 선생님, 선생님은 그야 말로 음악이 생애 전부인 양 알고 살아왔다.
재미있는 일화로 선생님이 초등학교 때 집 앞을 지나던 스님 한 분이 “저 아이는 평생 줄을 울리며 살아갈 팔자군요.”라고 한마디를 남기고 지나갔다. 이 말이 씨가 되었을까, 음악을 좋아하는 선생님은 평생 바이올린을 품고 줄을 울리며 살았으니, 그 길은 반드시 스님 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성돈 선생님은 40여 년간 근무하는 학교마다 연주 단체를 만들어 발표회를 하였다. 정읍 동초등학교에서는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현악 합주단‘을 창단하였다. 군산 제일초등에서는 ’개나리 합주단‘을 만들어 매년 발표회를 하였다. 군산 중앙여중에서는 ‘동산학원 창립 40주년을 맞아 ’녹원제‘를 만들었다. 마지막 근무 교인 진포중 학교에서는 ‘진포 예술제’를 만들었다. 이때는 중국 연대 시와 자매결연을 하여 격년제로 교환 연주를 통해 양국 문화 교류를 하였다.
이처럼 학교에서 음악지도 활동은 물론 지역 음악 발전에도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70년대 초에 군산 최초 현악 합주단인 ‘팔마악회’ 창단. ‘벚꽃 동요제’ 창단 ‘군산 실내악단’ 창단 ‘은파 청소년’ 오케스트라 창단을 하였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고달픈 일을 마다하지 않고 꾸준히 앞장서 일해 왔다.
위와 같은 일들이 축적되어 90년도에 군산 시민 모두의 염원이었던 ‘군산시립교향악단’ 창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박판길 교수를 상임지휘자로 모시고 힘찬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하였다. 창단한 이듬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교향악축제에 참가해 전국에 군산의 음악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술단은 지금도 시민들의 정서 함양과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를 위해 연주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군산 예술문화의 꽃을 피우다
조성돈 선생님은 앞서 말한 것처럼 학교와 지역 음악 발전은 물론 틈틈이 예총 일에도 앞장서서 일했다. 80년대 중반부터 30여 년간 줄곧 예총 일에 관여하여 이때부터 사무국장, 음협 지부장, 예총 상임 부회장 등 예총 곁에서 예총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이러한 열정에 힘입어 2012년에 군산 예술 문화단체를 총괄하는 한국예총 군산지회 지회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취임하면서 화합과 소통으로 변화된 군산 예총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예총 발전을 위한 개혁의 강력한 의지를 표하여 실천하는 데 주력하였다. 50여 년간 예총의 숙원 사업이었던 사무실 이전 문제가 예술의 전당 건립이 완공되어 해결되었다.
군산 예총 역사상 최초로 전국 규모의 연극제를 개최하였다. 무려 1개월에 걸쳐 수준 높은 연극을 시민 모두가 보고 즐길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기회에 전국에 군산을 알리는 의미 있는 연극제를 유치한 것이다.
또한, 중국과 수교 이후 20여 년간 교류가 단절되었었다. 이에 양국 간 교류할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연대 시를 비롯하여 우호 도시 및 협력 도시와 격년제로 서로 오고 가며 확대 교류를 통해 문화 교류는 물론 민간 외교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원래 가만히 앉아서 쉬는 성격이 아니다.
조성돈 선생님은 학교 일 말고도 지역 음악 발전은 물론 예총 지회 일에 매달려 봉사를 했기에 한 시도 쉴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향교, 문화원 노인지회 등 주로 어른들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라도 더 익히고 거들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지인의 소개로 향교에 나가 선배 유림들로부터 향교 운영 전반을 익히는데 주력했다. 조선 시대 교육기관인 향교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교육기관으로서 교육제도 및 교육방법, 현재 향교 운영 실태 등을 익혔다. 또한 공자를 위시하여 그의 제자들을 배향하는 의식 절차도 익혔다. 또한 향교를 이끌어가는 운영위원으로 수석장의 역도 맡아 향교 행사에 적극 협조 하였다. 현재도 유도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노인지회에 찾아가 활동하였다. 노인지회 운영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지회 운영에 협조하였다. 또한 노인의 건강 문제, 노인의 품격에 대하여 떳떳한 노인으로 거듭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노인 강령에 나오는 것처럼 노인은 사회의 어른으로서 젊은이들에게 솔선수범하고 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 얼을 계승하는데 노력할 점도 익혔다.
또한, 문화원 일에도 참여하여 우리 고장의 갖가지 역사와 전통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도 직접 체험하고 훌륭한 점을 본받게 되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선열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예도 열심히 했다. 문화원 운영에도 관심을 갖고 문화원 행정이나 재정을 바르게 일 처리 하도록 감사역을 맡아 조언하고 도와주는 일에도 열심히 하였다.
세상을 바르게 보는 법을 터득하다.
너무 일에만 빠져 지냈던 탓일까, 시름시름 앓던 사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선생님.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나이 70이 넘어 서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최소한 내가 살아온 흔적은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에 관심을 갖고 5년에 걸쳐 공부 하면서 시 부문 등단을 하였다. 시집 『아하!』를 펴내게 되었다. 시집은 ‘깨달음을 얻고 보니, 진즉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겼으나,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그 후 선생님은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내용을 수필로 표현하여 수필집을 펴내게 되었다. 제목은 ‘거꾸로 보고 사는 삶’이다. 선생님은 살면서 세상을 얼마나 바르게 살아왔는지 아쉬움과 부끄러움만 떠오른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전도몽상’ 의미처럼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헛된 꿈을 현실로 착각하며 사는 삶에서 벗어나자.’라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세상 이치를 바르게 깨닫고 법이나 규범 규칙 제도 등을 실천해야 바르고 밝고 훈훈한 세상이 된다는 간단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두 권의 책을 통하여 살아 온 날들을 원고로 남겼다.
조성돈 선생님,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인생을 살아오신 분, 선생님은 오늘도 군산시민이 음악을 통하여, 예술을 통하여, 봉사를 통하여 행복해 지기를 바라면서 후학 양성에 또 한 걸음 발자국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