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단 한 사람>은 <홈 스위트 홈>이라는 작품으로 2023년 제46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최진영이 2023년 한겨레출판사에서 출판한 장편소설이다. 최진영은 “이 소설만큼 죽음이란 주제에 몰두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양 근대철학사의 지형에서 커다란 봉우리를 점유하면서 주변에 수많은 연봉들을 거느리고 있는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말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장 분명한 두 가지 일이 있다고. 하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우리네 인간들은 내남직 할 것 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저런 크고 작은 근심 걱정 불안에 시달리면서 살 수밖에 없다고. 다른 하나는 평생을 그런 근심 걱정 불안에 시달리다가 종당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고. 서글픈 운명이긴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운데 또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게 인생이니까 크게 낙담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각설하고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게 죽음이다. 다시 말해 생로병사의 인생 서사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 인간 일반에게 죽음은 한마디로 존재론적 운명이다. 왕후장상도 초동급부도, 고관대작이나 장삼이사도, 모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가장 공평하고 평등하다. 현재 나의 인생 목표는 잘 죽는 것이다. 이 말의 참 뜻은 빨리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조차 없다.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때가 되어 위에서 그분께서 나를 부르시면 엄청 두렵기는 하겠지만 악착같이 저항하지 않고 순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뜻이다. 나는 산소호흡기를 비롯한 각종 생명연장 장치를 주렁주렁 달거나 꽃고서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단순히 물리적인 수명만 연장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한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로 그 핵심을 압축할 수 있는 실존 철학에서는 이 세상 최고의 부조리를 ‘인간의 탄생’이라고 한다. 무슨 의미인가? 이 세상에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란다. 이 세상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자신들의 의사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진, 즉 피투(被投)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게 어찌 부조리가 아니겠는가? 아니 세상에 이보다 더한 부조리가 어디 있겠는가?
나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나의 의지와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태어났다.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만큼은 어느 정도 내 의사나 의지가 개입되어 마지막 순간은 의식하면서 선택하고 싶다. 자신에 대한 예의와 자존심을 지키면서 나의 마지막을 선택하고 싶다. 그게 뜻대로 잘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 그리고 정말 그랬으면 한다.
최근 한국사회에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나 문화와 관련하여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두 가지 상반된 얼굴들이 공존하는 것 같다.하나는 죽음에 악착같이 저항하거나 거부하는 문화나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나 문화는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게 죽음이라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너무 하찮게 생각하는 태도나 문화이다. 이 또한 세상에서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게 목숨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최진영이 이 작품을 통해 겨냥하는 탄착 지점은 이 두 태도나 문화인 것처럼 보인다.
죽음에 대한 최진영의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은 목화이다. 신복일과 장미수의 넷째로 태어난 목화는 어린 시절 언니인 금화와 이란성 쌍둥이 동생인 목수와 우연히 숲에 들어갔다가 금화는 갑자기 쓰러진 나무에 깔린 후 실종되고 그 현장을 지키고 있던 목수 또한 나무에 깔리는 명재경각의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보전하는 사고를 경험한다. 그러다 16살의 나이에 목화는 초월적인 존재로 기능하는 나무의 소환을 받게 되면서 원하지 않지만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죽음의 현장에서 단 한 사람밖에 구할 수 없는 중개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 중개 역할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무병을 앓게 되는 무당들처럼 ‘머리를 짓이기는 통증과 함께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그저 앉아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73-74면)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자신의 의지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숱하게 많은 참혹한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는 일도 고통스럽지만 목화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의 목숨밖에 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서 최진영이 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무엇일까? 짐작건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카르페 디엠’(현재에 충실하라!)이라는 두 명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얼핏 두 명제는 양립 불가능한 모순 명제들 같아 보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죽음은 도처에 널려 있다. 따라서 하루하루 우리들에게 축복과도 같은 선물로 주어진 시간들을 고맙게 받아들이면서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게 집중하라는 것이 그 두 명제에 함축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죽음은 우리의 탄생과 함께 사이좋은 벗처럼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같이 가게 되어 있다. 따라서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죽음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하고 살아갈 뿐이다. 생각해보라. 그 기억을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10대 후반의 생때같은 화사한 나이에 제주를 향해 떠나는 들뜬 마음으로 승선했다가 참혹하게 죽어갔던 세월호 참사의 단원고 학생들이 그렇게 생을 마감했으리라곤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세월호 참사 말고도 우리 주변에는 온갖 질병과 노화, 사건·사고, 자연재해, 산업재해, 재난과 참사, 테러와 전쟁, 감염병 등으로 인한 죽음, 인간의 희망이나 의지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의 불가항력적인 죽음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하루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하건대,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손님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성찰과 함께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후회없이 잘 살았다는 마무리. 이 세상에 태어난 인연, 그리고 내가 현재 관계맺고 있는 모든 인연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생활할 것. 그러면 ‘삶이라는 폭풍, 내일이라는 폭우. 타인이라는 지진’(191면)이 조금은 견딜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더불어 우린 모두 ‘한 번뿐인 삶을 사는 단 한 명’(195면)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삶은 죽음과 탄생을 모두 담는 그릇이다. 죽음 없는 삶은 불완전하다‘(231면)라는 명제를 기억하면서 이 글을 매기단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