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 ‘The Snowstorm(Winter)’
‘깊은 겨울을 지나가는 방법’
겨울이 깊어짐에 따라 2월이 다가오니 봄의 갈증이 시작된다. 금번 작품은 깊은 겨울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야를 떠올리면 그 유명한 ‘옷을 입은 마야’, ‘옷을 벗은 마야’가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작품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며, 요즘의 시기에 감상하면 위로가 될 듯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9년 스페인 시골 마을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결국 스페인의 궁정 화가에 이르렀다.
고야는 특정 미술사조에 속한다기보다는 폭넓은 시대를 포용하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다빈치시대 직후의 바로크 사조의 끝물, 그리고 그 이후 이어졌던 로코코를 연결하는 교두보적인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지배하에서도 궁정화가로 활동한 고야는 전쟁 암흑기 참상의 작품들을 그렸으며, 스페인이 독립한 뒤에도 여전히 왕실 화가였지만 얼마 후 은퇴하여 고뇌가 담긴 어두운 작품들을 그린다.
일부에서는 그의 결혼과 궁정화가 입문 과정, 특정 작품의 발표 시기 등을 통해 기회주의자로 폄하하기도 한다.
고야는 비인간적인 본능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하였다가 질병의 고통을 겪으며 어두운 내면의 본질과 싸우고 이내 그 갈등의 요소들을 화폭을 통해 재해석 함으로써 결국 스페인의 3대 화가로 자리를 잡게 된다.
고야의 질병은 청력에 있었다. 이명이 계속되며 점점 청력이 약해지다가 말년에는 완전히 청력을 잃게 된다. 그의 초기작은 화려하고 예쁘며 눈을 만족시키는 그림을 그리는 궁정 화가였다. 그러나 청력의 소실 앞에서 내면의 가식을 포장 하지 않는 그대로의 날 것을 선보이게 되었다.
완전 말년기가 되면서 고야는 자신의 집을 스스로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검은 그림들'이라고 불리는 것들 시리즈들을 그리게 되었다.
그 시기 작품은 이미 난해함과 기괴함이 충분하였음에도 그의 사후 1799년 출간된 판화집 ‘카프리초스(변덕이란 뜻)’는 이전 작품에 비해 더 상징적이고 난해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 내용으로는 부패한 왕정과 사람들의 미신이나 종교 지도자의 타락, 마녀사냥, 매춘, 탐욕, 권력자들의 부패, 꿈, 괴물, 악마 등의 기괴한 상징을 통해 노골적인 풍자를 하였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초기작처럼 아름답지도, 말년작처럼 괴기하지는 않지만 역시 마음 편한 작품은 아니다.
이 작업은 그가 궁정화가 초입 당시 의뢰 받아 당시 시대의 모습을 표현한 '4개의 계절 시리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작품 속의 구성을 보면 만설 위의 바람, 다섯 명의 남자, 개 그리고 돼지를 싣고 가는 당나귀이다.
얼마나 겨울 바람이 거센지 화폭을 통해서도 서늘함이 느껴진다. 이미 주변은 눈으로 하얗게 쌓여있고 바람에 저항하려는 나뭇가지의 허리는 휘어있으며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사람들은 서로 붙어서 천을 움켜쥐고 눈보라에 등을 돌리기도 한다. 마치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려는 ‘햇님과 바람’ 이솝우화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앞에는 외투 하나 없는 맨몸의 강아지가 겁먹은 듯 꼬리를 안으로 넣었다. 이렇듯 추위로 요란한 주변에 비하여 뒤에 따라오는 당나귀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제 몸집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돼지가 올려져 있는데도 가볍고 편안해 보인다.
왜 이 작품을 소개하려는 지 이미 독자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다. 기근이 심하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시기였다.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나누는 것이 미덕이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는데, 심지어 거리의 걸인을 위해서 문밖에 음식을 놓아 나누는 우리의 문화가 있었다.
혁명과 전쟁으로 얼룩진 고야의 시대 역시 풍요롭지는 못했다. 특히 무더위에 고기를 저장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시 말해서 고기를 저장해두고 먹을 수 있게 만드는 이 추위는 그림에서 느끼는 고단함 이면에 고마운 조건을 형성해 준다. 온기를 함께하는 이웃들과 가족들의 주린 배를 채워줄 돼지고기는 혹한기를 무색하게 만드는 풍요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화가들은 글이 아닌 그림의 소재와 화풍 변화를 통해 삶의 서사를 드러낸다. 고야는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시작하여 풍요의 시기를 거쳐 전쟁과 기근을 겪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청력 소실로 인한 처절한 내면의 고립 속에서 그 추운 겨울 같은 상황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작품을 탄생시켰다. 어쩌면 고통의 그때가 가장 솔직한 작품을 만드는 화가의 최고의 풍요의 시간이 아니였을까......
오늘의 작품 ‘눈보라’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색감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듯, 이 깊은 2월의 겨울은 추위의 혹독함만을 기억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당나귀의 등에 얹혀진 돼지는 주린 배를 채우는 양식이 되기도 하지만, 고야에게는 마주하기 싫은 청각 장애와 같은 불편한 풍요였을지 모르겠다. 이 불편함이 깊은 겨울에서 풍요의 봄으로 이끌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 3월 봄바람 마중을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