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청년들에게 언어의 숨결을 안겨준 참 스승
80년대는 혼란스러웠다. 대학 문화의 낭만은 간 곳이 없었고 캠퍼스마다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던 구호만이 요란했다. 민주의 봄은 멀었고 현실은 냉혹했다.
대학 한 편에서 돌을 깨고 독재에 항거하는 의미로 시위진압대를 향해 돌을 던지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 혼란과 격변의 시대를 학생들과 함께 건너 온 분이 바로 고 이복웅 시인이다.
포마드를 가볍게 바르고 단정하게 빗질까지 하고 나섰던 도서관의 이복웅 선생. 어딘가 엉성하면서도 나름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시대상은 암울했지만 도서관 앞은 그런대로 꿈이 익어가기도 했다. 그런 학생들에게 이복웅 선생은 동네 형님, 혹은 아저씨 정도로 기억될만한 친근한 모습이었으리라.
그러나 동시대를 앞 뒤 서서 부대꼈던 필자를 비롯한 나름 의식(?)있는 문청들에게 그는 ‘신의 영역’에 들어간 분이셨다.
있는 듯 없는 듯 했으나 어느 땐 번뜩이는 비범함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었던 분이 바로 그였으며, 그의 뜨거운 가슴은 늘상 우리들을 설레게 했다.
그의 지도력은 예단과 추종을 불허했다. 물론 불평 불만도 많았다. 원고지에 나름 정갈하게 써들고 간 습작시(習作詩)는 형태만 살아 있기도 어려울 때가 많았다.
때로는 처참하게 구겨지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못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듯이 우리들은 멀리서 가까이서 함께 해왔다.
그래서 필자를 포함하는 몇 몇 글 나부랭이들을 주어담던 우리들은 자칭 ‘수맥당’이 되었다. 그 분이 있음에 우리들의 주변은 항상 소란스럽고 분주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50년의 역사를 이어 온 ‘수맥동인회’가 건재한 이유 또한 우리의 호프 ‘이복웅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이렇커니 저렇커니 말하면 무엇하랴. ‘수맥’의 지도 시인이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던 재능을. 시인이 되고자 하는 우리들과의 동행을. 일상 속에 침잠하였으나 스스로 발광하였던 그의 진면목을. 모더니스트로 불렸던 화려한 언어의 연금술을. 바다가 금새 아파트 안에 들어와 살을 섞던 시적 유희를. 그의 도전과 변신, 그리고 무모함을.
세상은 번뜩이다 못해 스스로 타올랐던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대학에서 이른 정년을 한 그는 월드컵의 해인 2002년도부터 군산문화원장으로써 자리를 잡았고 전북문화원연합회장도 했다.
그 이전부터 ‘군산의 지명 유래’ 등등 향토사에 관심을 두면서 향토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채만식 문학을 연구해서 향토사적 관점에서 조명한 일은 지역사회에 문인으로써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스스로 실천해 온 대표적인 성과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우나에 다니는 게 유일한 사치였던 선생님. 아찔했던 세상 이야기들을 차가운 맥주로 가라앉히느라 푹 삭혀졌던 숙취를 이 사우나에서 씼어냈다. 그리고 매일 매일을 새로 시작했던 분이었다.
그런 그 분이 아깝게 가셨다. 지난 2023년 2월 9일 78세였다. 일년 전 우리는 군산 문학의 빛나는 자산을 잃었다.
그러나 ‘생은 유한하지만 문학은 영원하다’라는 말처럼 선생님은 가셨지만 그의 이름과 작품은 오래토록 우리들 곁에 남을 것이다.
고인을 추억하면서 이 자리를 빌어 그 동안의 가족들의 희생과 너그러움에 감사드린다. 선생님에게는 잔소리를 하셨겠지만 제자들에겐 한 번도 싫다하지 않으셨던 신경희 사모님, 그리고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연아, 상준과 가족들에게 군산사람으로써, 한 시대를 함께 건너왔던 선생님의 동지이자 제자로써 합장의 예를 드린다.
아파트의 시인 이복웅
낭만주의가 휩쓸던 시기, 청년 이복웅 또한 혹독한 문학 수업의 시기를 지냈다. 스승이라고는 선배 문인들이었으니 어쩌면 스스로 시작(詩作)의 세계를 열어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요즈음은 시인들의 이름이 발에 걸리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70년대만 해도 시인이라고 해야 전국적으로 많아야 200~300명 정도나 되었을까. 그만큼 희소성이 있었으며 시인이 되려면 여간 까다로운 관문을 넘어야 했다.
몇 몇의 시인들은 요새 ‘히트곡’ 을 낸 가수처럼 아이돌 못지않은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무명이었다가도 ‘히트작’을 내놓았다치면 전국적인 명사가 되곤했다.
군산의 이복웅은 70년대의 막차를 탄 시인에 속한다. 1980년 시 전문지 ‘월간 시문학’에서 문덕수 시인의 추천으로 데뷔했다. 그의 나이 36세 때이다.
군산대학교의 팔마 캠퍼스의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이다. 당시에도 그는 독보적이었으며 이후에도 여전히 독보적이었다.
그의 첫 시집 제목은 「삐걱거리는 바다」이다.
뭔가 메시지가 강하다. 바다가 삐걱인다니.......놀라운 언어의 유희이다. 더구나 이 때쯤엔 도시적이란 말이 생소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아파트 연작을 내놓으면서 이복웅이라는 이름 앞에 ‘아파트의 시인’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87년 도서출판 친우에서 발행한 그의 첫 시집 출판 기념회에 필자는 문청이자 수맥동인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필자는 그 즈음 신춘문예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으려고 안달하던 시기였다.
70년대 말기 ‘유신헌법’ 제정으로 장기 집권을 꿈꾸었던 군부독재 집단들을 향한 반항, 박정희 정부로 인하여 자유와 민주를 억압 받았던 시인의 저항 정신이 올곳게 들어간 작품들이 그의 첫 시집을 휩쓸었다.
이복웅 시인의 첫 시집의 작품 「여치의 피항」이 필자의 입맛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아파트 연작 중의 하나인 「걸어가는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가 걸어가고 들판에서 놀아야 할 ‘여치’가 바다를 몰고 다니다가 지쳐서 아파트에 돌아와 몸져 누웠다니...... 이럴수가.
진실의 세계를 향하여 수도승처럼 정진하던 필자에겐 이런 패러독스한 비판과 역설, 그리고 언어의 중첩을 통한 이미저리와 발상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바다 아닌 바다를
몰고 다니다가
들 아닌 들을
이끌고 다니다가
바다가 들이고 들이 바다인
이치(理致)를 깨닫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아파트에 돌아와
몸져 누웠다.
「여치의 피항」 중에서
제 땅도 없이 태어난
둘째놈은 주소(住所)만 남은 것이
그리 좋은지
번호 달린 열쇠를 목에 걸고
온종일 놀이터에서
대낮으로 서 있다
「걸어가는 아파트」 중에서
고 이복웅 시인, 유고 문집과 시집 발행
후학들이 앞선 분을 기리는 방법 중에 으뜸이 문집을 내 드리는 일이다. 그 역할을 청사초롱 동인들이 맡았다. 이경아 시인과 ‘석조동인’ 출신 최영봉 시인이 앞장섰다.
유고 문집 「시인 이복웅의 삶과 문학 - 월명산 소나무」와 유고 시집 「나누기에 부족한 시간」은 도서출판 선우에서 펴냈다.
고 이복웅 시인은 생전에 가벼운 폐렴 정도로 알았던 병이 깊어져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번의 유고문집과 시집 발간을 통하여 그의 문학세계가 재조명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 정신과 작품 세계는 길이길이 보존될 것이다.
시인께서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하였던 시기에 군산의 문학청년들은 크게 ‘수맥동인회’과 ‘석조동인회’가 있었다. ‘수맥’은 군산대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나 ‘석조’는 동고 출신에 글쓰는 이들이 함께 하면서 범위가 넓혀졌다.
특히 여성편향적(?)이었던 선생님이 각별히 신경을 썼던 분들은 ‘청사초롱 문학회’ 분들이다. 군산시민의날 백일장 대회를 통하여 입문하게 된 ‘여류’들이 중심이었다.
그 분들은 종종 선생님의 일터인 군산대 도서관으로 찾아와 시평을 받기도 하고 시인의 일상을 통하여 세계를 보는 안목을 넓히기도 했다.
필자는 문청 시절 그 분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몇 잔의 술을 얻어먹곤 했다. 대부분 누님들인데 너무 감사한 인연들이다. 그 인연 또한 선생님의 그늘이니 고개가 숙여질뿐이다.
고 이복웅 시인을 그리워 하는 유고 문집 「월명산 소나무」에는 선생님의 연보와 함께 활동하였던 기록들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어쩌면 그의 사상과 문학 정신이 아로 새겨진 문집이며, 시집으로는 마지막 작품 세계이다. 문학을 넘어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였던 그의 기록들 또한 양념으로 들어가 있다.
이러한 기록들이 모아진 이번 문집은 군산 문학을 넘어 한국 문단에 ‘아파트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던 그의 일대기를 새긴 기록물로 손색없을 것이다.
고은 시인과의 우정, 그리고 절정의 예술혼
대학에서 정년을 한 그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다. 고은 시인이 노벨 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릴 때마다 그는 ‘시큰둥’했다. 이처럼 자신의 문학 세계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