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견디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제2의 인생
삶이 단말마적 고통 같을 때 양주영의 머리를 스친 건 창업, 바로 ‘한길호스’였다. 이것은 아내와 가족들을 위한 여정의 출발이었다.
뭔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절박감은 그의 성장을 도와준 자양분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 떠나온 고향 진안, 벌써 40여 년 전의 일이다.
호스전문업에서 지금은 ‘정관장’ 대리점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작지만 알찬 그의 인생 성공스토리이다.
그는 마도로스의 꿈을 갖고 군산수산대(지금의 군산대)에 들어갔고, 가난과 외로움에 사무쳤던 그는 운명적으로 아내를 만났다. 딸이 태어났다. 어린 가장으로서 학업과 막일을 병행하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고생이 익숙해질 무렵 그는 농업, 공업용 호스 도매상에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군산의 호스업계에서 일가를 이룬 양주영의 작은 성공의 씨앗이 뿌려진 날이었다. 훗날 ‘한길호스’ 창업으로 이어졌다.
아련한 추억의 고향 ‘진안’
그의 고향은 전북 진안군 주천면 운봉리 안정마을이다. 운장산과 구봉산이 맞닿은 첩첩산중 척박한 땅.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부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중퇴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교육열이 높으셨다. 그 시대의 장남들이 그렇듯 그는 아버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고향집은 손바닥만한 자갈밭과 표고버섯 재배 외에 간간히 마을의 목수일을 나가시는 아버지 벌이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주천면 소재지에 위치한 주천중학교에 진학을 했다. 2학년까지는 집에서 십 리 정도 되는 길을 줄곧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아버지는 힘들게 공부하는 그를 위해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이용한 통학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그만큼 배움에 대한 열정과 자식 사랑이 크셨다.
중학교 3학년은 진학반과 비진학반으로 나뉘었다. 진학반은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자취생활을 해야만 했다.
비진학반 친구들 중 여학생들은 방직 공장으로, 남학생들은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그런 친구들을 바라볼 때 마음 한편이 저려왔다.
그는 아버지의 열정과 후원으로 그나마 공부할 기회가 있지만, 연약하기 그지없는 어린 친구들이 객지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군산 중앙고 동문이 된 인연
“나에게 많은 돈이 있었다면 객지로 떠나는 친구들에게 진학의 꿈을 안겨 주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지요.”
이룰 수 없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만큼 애달팠다.
그 시절이 그랬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할 수 없었던 청소년기의 학생들이 냉혹한 현실 앞에 객지로 떠돌아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는 청소년기의 양주영도 다를 바가 없었다.
취업이 잘되는 공고를 선호하던 시절이었다. 국비로 숙식까지 무료로 제공한다는 서울 국립철도공고에 원서를 제출했다. 모든 것이 무료였던 철도공고의 막강한 경쟁력에 보기 좋게 낙방했다.
불합격하게 되면 후기 고교밖에 진학할 수 없어서 2차로 군산 인문고에 원서를 제출했다. 고등학교 입시에서 ‘보험’을 들어둔 게 군산에 둥지를 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군산중앙고 동문으로서의 인연이 만들어졌다.
생면부지 군산에서 다시 자취생활로 고교시절은 시작되었는데 노동에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은 아버지의 병세로 가세는 더욱 기울어졌다.
자취 생활은 힘겨웠다. 주말마다 고향집을 방문해서 용돈과 식량 그리고 찬거리를 제공받았는데, 미처 집에 다녀오지 못한 한 주는 쌀을 구입할 돈이 없어 라면만으로 버틸 때도 있었다.
고통 속에 핀 꿈 ‘한길 호스’
가난 극복은 70년대와 80년대를 살아온 베이비붐 세대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청년 양주영은 원양어선을 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군산수산대학 어업과에 진학을 했다.
그러나 아내를 만난 것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말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사랑했다. 하지만 삶의 현실은 혹독했다. 태어난 소중한 딸을 책임져야 했다. 학생이자 가장으로서 때 이른 삶의 현장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여름방학에는 공사판에서, 겨울방학에는 근처 합판공장에서 고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가난했고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운명적으로 농, 공업용 호스 도매상에 영업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동생들도 진안을 떠나 군산에서 학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살림은 어려웠지만 장남으로서 아버지 대신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다. 식구들도 딸 셋, 아들 하나로 늘어났다.
회사 영업사원의 월급으로는 가족들과 동생들을 부양하기 어려웠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5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한길호스’라는 도매상을 설립했다.
‘한길호스’를 넘어, 어려운 학생들을 돕자
째보선창으로 불리는 근대역사 쪽에서 해안도로 방향의 고가도로를 넘어가면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넓은 창고에 ‘한길호스’라는 간판이 보인다. 양주영이라는 소시민이 호스업을 차리고 인생을 걸어왔던 현장이다.
부족한 자본에 막강한 경쟁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그의 인생 중 가장 치열했던 시절이었다.
“가난을 벗어나고픈 열망 하나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업에만 몰두했던 10여 년의 시간이었어요. 정말 어렵고 힘들었지만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텼죠.”
2.5톤 화물차 한 대를 손수 운전하며 시작한 사업이 네 대로 불어났고 전북, 충남, 일원에 걸친 호스 도매상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사업이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숙제가 있었다. 못 배운 중학교 친구들과 동생들의 학비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시절이었다.
그는 2012년부터 군산사회복지 장학회에 입회했다. 그로부터 현재까지 지역 학생들 장학금 전달 및 취약계층과 경로 효친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가난해서 배움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어요? 부족하지만 중단하지 않고 배우려는 학생들 을 도울 생각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 속에 그 아버지의 모습이 슬몃 비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의 효도를 길게 받지 못한 채 2018년 그만 세상을 뜨셨다.
아내의 병, 그리고 후회
그는 자식들 운동회는 물론이고 졸업식도 함께한 적이 없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몰입했던 시간들,너무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회스럽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요즘 들어 가슴에 새기고 있다.
아내는 갑자기 찾아온 담도암으로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세상이 살 만하니 또다시 시련을 맛보아야만 했다. 죽음 앞에 내몰린 아내를 보면서 하늘과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고 자책하기도 했다.
하늘이 도왔다. 아내는 힘들게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고 완쾌하여 일상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그는 ‘세상살이가 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아내의 투병생활을 보면서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세월은 오늘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건강을 생각하는 삶, ‘정관장 수송점’에서 새 출발
그는 호스사업에서 은퇴를 했다. 한길만 걸어왔던 ‘한길호스’는 그에게 있어서 제2의 인생이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근면 성실이 몸에 배어있던 그에겐 한가한 시간이란 사치스런 일이기도 했다. 후진들을 도우려는 장학금 후원도 이어가야 했다. 또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현대인들의 관심은 건강이라고 보거든요. 아내를 보면서 건강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기회가 돼서 ‘정관장’ 대리점을 인수하게 되었죠.”
사람의 소중함과 사람과의 관계가 최우선인 정관장 영업. 사람들과 호스 사이를 이어주던 전문영업인 양주영이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어서야 인생을 다시 깨우치고 다시 배우며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사업 현장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가난을 벗어나는 데 썼어요. 누구처럼 부호가 되지도 못했고 내세울 만한 것 없는 평범한 인생이지만 치열했고 굴곡 많았던 삶이었지요. 하지만 아내가 아프고 보니 달콤한 추억 하나 없는 우리의 인생이 무상하기만 하더라고요.”
그 또한 세상살이에는 모두 때가 있음을 안다. 평생 손가락질을 받거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삶은 영위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양주영의 인생!
그는 지금부터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가기로 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하는 삶, 주변의 지인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 물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말이다.
*정관장 수송점 : 군산시 월명로 267 102호
063-464-2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