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산 사업가의 함경식의 인생도전,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 ‘석산=함경식’에서 ‘역사운동=함경식’으로 제2의 인생 살고파
발파와 함께 무너지는 흙더미, 그리고 쏟아지는 먼지, 굉음을 내는 장비들이 어우러지는 대운석재단지. 불도저처럼, 때론 무뚝뚝한 촌놈처럼 채석장만 바라보고 살았던 그였다. 함경식 회장 이야기이다.
나포면의 작은 석산에서 석재 단지로 만들고 가꾸어 온 지난 30여년. 누구나 하기 쉬운 말로 ‘의리, 의리’ 하지만 지키기란 여간 어렵다. 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빚진 돈을 모두 갚을 정도로 신의를 지켜온 그의 ‘의리 경영’ 현장이 바로 이 석산이다.
그런데 석산이라는 말이 따라다녀야 할 그의 입에서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이라는 조금은 낯설은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2016년도에 130개 역사단체가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를 위하여 ‘대한사랑’이라는 단체로 모인다는 내용을 신문에서 봤어요. 당시엔 아무것도 몰랐고, 인연도 없었지만 여의도로 올라갔지요.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생각이 들었거든요. 참석해서 ‘만세 삼창’을 하는데 뭔가 뜨거운 게 가슴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더라고요.”
참여하자는 마음만 갖고 찾아갔던 그 날, 그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끈을 붙잡았다. 정말로 묘한 인연이다. 그는 ‘대한사랑 군산지부’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남은 인생을 역사와 함께 하려는 각오가 담겨 있다.
“역사에 대하여 별다른 인식이 없었는데 대한사랑과의 인연은 ‘새로운 나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단할 것도 없지만 필연이라는 생각으로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에 동참하게 된겁니다.”
한 때 사학과를 지원할까 고민했을 정도로 나름 사관이 정립되었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배워왔던 역사가 왜곡된 역사였다는 ‘경천동지’할 사실 앞에서 그는 전율했다. 그 날 이후 새로운 역사관이 만들어졌다.
“실제 활동을 해보니 왜곡된 역사 문제에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다는 점이 무척 아쉬웠어요. 벽에 부딪친 느낌이었지요. 작은 단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국가가 하루 속히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석산=함경식’에서 벗어나, ‘역사 운동=함경식’으로 살고 싶은 그의 제 2의 인생 항로가 시작되었다.
◇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나 과분한 아내
그는 부여 양화면이 고향이다. 어릴 때 군산에 정착했고, 호원대를 나와 당시에 앞 날이 창창한 강원산업에서 근무했다.
동네 누나의 소개로 이름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아내 김선녀씨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개정병원에서 근무했다.
“빅토리호텔에서 맞선을 보는 자리에서 ‘몇 째냐 물어서 9남내, 아들 다섯 중에 넷째라고 했더니, 나는 맏아들에게 시집 가서 집안 대소사를 책임져야지 막내에게 시집갈 생각이 없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운명처럼 이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강원산업 서울본사에 근무했던 그는 주말마다 내려왔다. 죽기살기로 좇아다녔다. 그리고 서른셋에 결혼에 골인해서 아들 경연과 딸 지연을 두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 군산의 한 개발회사에서 그를 스카웃했고, 그 때의 경험을 밑천삼아 석산개발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마흔여덟 때의 일이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사업가로 성장했다.
오늘의 함경식이라는 사업가가 자리잡기까지 아내의 내조의 힘이 컸다. 그는 “그 때도 과분했지만 지금도 과분한 사람”이라는 말로 무한 신뢰와 애정을 더했다.
“부도로 어렵고 힘들었을 때 아내는 내가 기죽지 말라고 조용히 도와주었어요. 내 지갑은 비어 있기 일쑤였는데 아내가 살펴보고 항상 채워주었지요. 안팎 살림을 다 한 셈이죠.”
아내의 조용한 내조가 밑바탕이 되어 재기할 수 있었던 그였다. 그 때문인지 여태 살면서 부부는 단 한번도 싸워보지를 않았다.
◇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세월이 돌고돌아 부도를 맞아서 갚지 못한 돈을 벌어서 모두 갚았다. 어쩌면 ‘배째라’라고 했으면 쉬운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책임과 신의’를 목숨처럼 알았다. 오늘의 인간 함경식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20여년 전엔 토목공사 현장에서 대부분 어음으로 받았거든요. 2002년도 거액의 물건대금을 못받아 부도를 낼 수 밖에 없었어요. 사업자는 부도 이후 우선 피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저는 채권자들의 전화를 모두 받았어요. 피하지 않았던 게 나름 신뢰감을 형성했다고나 할까요.”
신용보증기금에서 주도하여 50~60명의 채권단이 구성되었다. 거래처의 부도로 자신의 사업장마저 연쇄 부도를 맞은 그였기에 ‘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연단에 섰다. 많은 채권자들을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그 분들에게 호소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재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일 할 수 있으니까 벌어서 갚을 수 있다. 나에게 시간을 달라. 100% 변재를 다 하겠다. 정 못갚을라치면 이 자리에서 다시 채권단 회의를 열겠다.”라고.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그리고 진심은 하늘이 알아준다고도 했다. 그 날 이후 채권단들은 모두 함경식이라는 일꾼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처럼 그는 거액의 어음을 휴지 조각처럼 날려 보내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주어야 할 돈의 무게를 온 몸으로 견뎌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켰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찾아온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그는 자기를 믿고 사업자금을 빌려준 분들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100% 변재를 했다. 그런 신의가 오늘의 그를 만들어냈으리라.
◇ 첫번째 나의 삶은 ‘석산개발’, 두번째 삶은 ‘역사 바로 세우기’
석산개발은 그의 숨결이었으며, 삶의 원동력이었다. 석산 현장의 중장비들은 그의 혈관이었고 화약 냄새는 그의 피였다.
현장의 소리들 속에서 살아 온 함경식의 인생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했다. 오늘 ‘책임과 의리’를 생명처럼 아는 그의 가치관은 잘되라고 도움을 준 그분들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해져 만들어졌으리라. 시간이 지났고, 그에게 운명처럼 석산 개발에 도전할 기회가 만들어졌다.
“산림청에서는 석재단지를 하라고 권장하긴 했지만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사업자들은 엄두를 못내는 상황이 계속되었거든요. 그런데 2000년무렵 관련법과 조건이 완화되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 때 적극적으로 도전했어요. 이 때 도전한 게 대운석재단지를 만든 기회였지요.”
그는 지금도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 한 이겨나갈 수 있는 기회가 온다’라는 말을 신념처럼 지겨나가고 있다.
모든 걸 잃을 위기를 맞았지만 진심은 통한다는 말처럼 기적적으로 생환했던 그 때나 지금이나 “기회는 항상 올 수 있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만들고 가꾸어 나간 대운산업개발 석산 사업은 이제 탄탄대로이다. 그는 사업을 반석 위에 올려 놓으면서 이 사회를 위하여 뭔가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문화재청 주도로 남원시와 합천군 일대의 가야 고분군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데, 식민사관에 입각한 ‘임나일본부설’과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라 남원을 ‘기문국’으로 합천을 ‘다라국’으로 표기하려고 한 작태를 고발한 게 바로 대한사랑입니다.”
일본 메이지 시대 정한론자들이 조선 침략 명분으로 만든 ‘임나일본부설’과 ‘일본서기’의 ‘임나사’가 식민사관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지명으로 사용되게 될 위기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국민들만 모르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얼마전 아프카니스탄 난민이 들어오자 각 방송에서 대서특필하여 국민 모두가 알게 했잖아요. 방송의 힘이 무척 큰데, 역사왜곡 같은 일에 방송이 나서준다면 전국민이 공분할 일이 되지 않을까요?”
그가 마지막 인생 항로로 삼은 역사 운동을 하겠다는 뜻이 이해가 갔다. 사업하고는 차원이 다른 가시밭이 예고되어 있다. 그러나 숱한 난관을 뚤혹 살아 온 그이기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리라 기대된다.
◇ “독립 운동은 못했어도 역사 광복운동은 한다”
2021년 9월 25일 박석재 이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사랑 군산지부의 문을 열었다. 이 단체의 역사 운동 방향은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역사 문화를 되찾는 일이다.
한민족의 역사가 사대주의 중화사상과 일제강점기의 식민사상에 쪄들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으며,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전제에 입각하고 있다.
함께 자리한 박재관 부지부장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왜곡되고 말살된 역사를 되찾는 것이 선결과제이며, 이런 정신문화와 민족혼을 되찾는 일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첫번째로 ‘우리 민족의 참 역사를 되찾자’는 운동이고, 둘째는 “한민족의 국통맥을 바로 세우자”, 그리고 “국사 교과서를 개정하자”는 세 가지 방향의 역사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한민족은 아홉번의 국호가 바뀌는 국통맥을 갖고 있어요. 세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국통맥인데, 이 ‘국통맥’을 바로 세우는 일에 대한사랑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심어놓은 식민사관에 입각한 왜곡된 교과서를 바로잡는 일도 마찬가지고요.”
군산지부는 ‘항상 추진 목표’로 전국 온라인 2천만 서명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이를 위하여 우선 잃어버린 한민족 9,000년의 역사를 군산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역사기념관’을 만드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
또 하나는 옥구 태생 최치원 선생이 한민족 최초의 경전인 ‘천부경’을 발굴 전수했는데, 이를 기리기 위하여 옥구지역에 ‘출생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