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올해로 62돌을 맞고 있다.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날의 상처는 아직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당시 동족상잔의 전투에 참여하여 누구보다도 뼈저린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참전자만 해도 전국적으로 20여 만 명에 이르고 우리 군산만도 718명이 생존해 있다. 그리고 전투 중에 부상을 입은 전상자는 익산보훈청 관할지(군산, 익산, 부안, 김제, 고창, 정읍) 에서만도 615명으로 파악되었는데 그 중 군산에 거주하는 분들을 만나기 위해 미원동 소재 ‘상이군경회 군산시지회’를 찾았다.
사전 약속을 하고 필자가 방문하던 날 사무장 직을 맡고 있는 이창근 어른을 비롯해서 박춘식, 김춘재, 박천석 어른 등 단 네 분만 만날 수 있어 6.25 당시 본인이 겪은 전투 경험과 6.25가 우리에게 남긴 것 등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는 오늘을 살고 있는 후세에게 당시의 전쟁을 돌아봄으로써 오늘을 진단하고 앞날의 좌표로 삼는 새로운 시사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이창근(79) : 제주 태생 / 육군 5사단 27연대 1대대 소속 / 군번 0195706 / 전상 6급
어른이 해방을 맞은 것은 소(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 15세 무렵 많은 양민이 학살된 제주 4.3 사건을 겪은 피해자이기도 하다. 6. 25 발발 3개월 뒤인 9월에 학도병으로 자원하여 열흘간 기초훈련을 받았지만 M1소총을 들기조차 힘들만큼 체력이 너무 약해 귀가조치 되었다가 이듬해인 1951년 2월 정식으로 훈련소에 입소,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부산 대구를 거쳐 강원도 일대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무더웠던 6~7월경 당시 어느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있었는데 능선을 따라 조성한 인민군들의 개인호에서 총탄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많은 사상자를 낸 치열한 전투 끝에 고지를 탈환 한 뒤 보니 기관 총구는 벌겋게 달궈져 열을 내뿜고 있었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기관총 사수의 자결한 사체가 호 속에서 발견되는가 하면 생포된 인민군 병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는데 작전 정보를 제보해주면 포로로 취급했지만 거부하는 경우엔 장교가 현장에서 총살하기도 했다. 휴정협정 기간 중에도 인민군들은 야간을 틈타 아군의 진지를 기습 공격하기 일쑤였다. 한번은 우리 초소에 다가와 암호! 라고 외치자 경비병이 얼떨결에 암호를 말해버리는 바람에 암호가 알려져 방공호 속에서 휴식 중이던 우리 병사들에게 접근, 수류탄을 던짐으로서 기관총 사수, 부사수 등 4명이 폭사한 적도 있었는데 그들은 아군 경비병을 생포한 채 끌고 간 적도 있었다. 언젠가 소양강 인근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르느라 주둔할 때에는 근 한 주간 세수나 빨래는 고사하고 식량이라고 해봐야 주먹밥 몇 개와 소금이 전부여서 모두가 차마 사람의 꼴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추석날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반합에 담아주는 멀건 국을 맛볼 수 있었는데 워낙 굶주림이 심했던 때라 그것조차도 꿀맛이었다.
인민군 1개 사단이 주둔한 까치봉 고지 탈환 전투에서는 토치카 속에 잠복한 적을 퇴치하기가 쉽지 않아 피아간에 한 치도 양보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수적으로 열세인 아군은 물론 작전에 참여한 미군 병사들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어느 날은 그들이 매설한 지뢰를 밟아 두 다리가 통째로 날아 간 채 결국 사망한 동료도 있었고 이창근 어른 자신도 적의 따발총탄이 요행히도 허리에 찬 수통에 맞아 떨어져 나간 것도 나중에야 알고 모골이 송연했던 적도 있었다. 간혹 엎드린 채 죽어 있는 인민군 병사의 사체에서는 흘러내린 피가 몇 미터씩 맨 땅을 적시고 있었고 파리도 들끓었는데 그 사체에서 소련제 군화를 벗겨와 신은 적도 있을 만큼 아군의 보급품은 군복이며 군화며 식량 등 모든 것이 보잘 것이 없던 시절이어서 온갖 전투 장비가 고급화, 첨단화를 이룬 지금의 관점으로 볼 때는 상상이 쉽지 않으리라 본다. 당시 고지 탈환 작전 등 대규모 전투를 한번 치르고 나면 210명이던 중대원 중 생존자라고 해봐야 20여명에 불과하고 33명이던 소대원은 2~3명만 남고 거의 전사할 정도로 전황은 열세였고 그만큼 치열했다.
주 전투지였던 강원도 일대는 먹을 것이라고 해봐야 날 콩 아니면 날 옥수수뿐이어서 배고픔은 계속 심했다. 언젠가 인민군을 생포했을 때 그들은 자루 안에 쌀을 반 쯤 쪄서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 입맛에는 먹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번은 어느 마을을 지날 때 민가에서 뜻밖에도 소를 한 마리 잡아주기에 부대원 모두 뜻밖의 횡재에 정신없이 포식함으로써 사기가 살아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번은 호를 파 놓고 그 안에서 동료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앉아 주변을 주시하던 중 갑자기 몇 명의 적이 뒤에서 달려들어 생포를 면하려고 죽기 살기로 육박전을 벌인 적도 있었는데 그 전투 때 수류탄에 어깨 및 다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나마 목숨을 건진 것이 천만다행으로서 이 후 소대장의 지시로 작전상 퇴각, 중대 OP로 후송되었는데 상처 부위의 고통으로 비명이 나올라치면 상사의 꾸지람이 무서워 이를 악물고 견디어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따뜻한 밥과 국을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어른은 그 부상으로 인하여 후방인 대구로 이송된다.
박춘식(80) : 특수부대소속 / 연대 군번 560342 / 전상 5급
미군 지휘하의 특수부대 소속이었던 어른은 1.4후퇴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적의 후방 보급로를 타격하는 작전에 투입되어 비행기로 정찰이 안 되는 취약지에 다이너마이트를 매설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미군 대령이 지휘하던 자신의 부대에 서북청년단(해방 후 남으로 내려 온 북한 출신 청년들로 구성된 우익단체)이 합세함으로써 후방 기습 교란작전을 펴기도 했는데 그 와중 수차례의 치열한 교전을 치렀다. 당시에는 수면 부족과 굶주림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탈진 직전의 그 상태로 몇 십리 행군이라도 할라치면 고통을 못 이겨 차라리 죽는 게 나을듯한 심경이 들 정도였다. 한번은 피아간에 치열한 교전이 있었는데 총알이 아슬아슬하게도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급기야 적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팔에 파편이 박히는 큰 부상을 입음으로써 전역하기에 이른다. 어른은 예편 후 상이군경회를 창설하는 주역이자 민주평통 대통령자문회의’ 위원직을 18년 간 역임하기도 했는데 ‘국민훈장’과 ‘시민훈장’ 등을 수상한 유공자이기도 하다.
김춘재(82) : 해병대(10기) 1연대 6중대 / 군번 9213464 / 전상 7급
김춘재 어른은 51년 9월 5일 해병대에 입대하여 두 달간의 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중동부 전선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해병대의 군기나 기합은 이미 정평이 나 있지만 전시라 해서 예외가 없었고 소위 ‘빠따’를 하루도 거르지 않을 만큼 엉덩이가 성할 날이 없었는데 어느 날 ‘빠따’ 기합이 없기라도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 렇게 군기가 세다보니 언제나 긴장이 몸에 배 있었는데 이를 견디지 못해서 전시 중임에도 몰래 탈영을 하는 병사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해병대는 부대 편성 자체가 급조됨으로써 소수 병력이었기 때문에 미 해병대의 지휘를 받았는데 진지에 배치된 분대 병력 인원도 TO의 절반인 6~7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금강산이 보이는 김일성 고지(924m) 탈환 전투에서는 선배 기수들이 투입되어 엄청난 사상자가 나기도 했으며 이듬해 김포, 강화 등지로 이동한 서부전선 주둔지는 멀리 판문점이 보이는 곳으로서 휴전회담차 바삐 오가는 차량 행렬도 목격되었다. 어느 전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대개 휴전회담 진행시 전투가 많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한 채 휴전선을 긋기 위한 작전에서다. 회담을 앞두고 임진강 지류인 경기도 장단군 전투에서 소위 87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중공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일 때에는 서로 간에 밤낮으로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야간 취침 시에는 온통 바위산이어서 참호를 팔수도 없어 나뭇가지를 꺾어 덮은 채 맨 땅에서 침낭하나로 눈을 붙일 수밖에 없었고 밤새 많은 눈이 내리기라도 하면 침낭이 온통 눈 속에 파묻히기도 했다. 이 장단군 전투에서 수많은 해병대원이 전사하였고 그 다음 벌어진 36고지 공격 시에는 야간에 적의 포탄이 수시로 날아와 많은 병사들이 파편 상을 입었는데 결국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그때 김춘재 어른도 팔에 파편이 박혀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 후 약 4개월간의 치료를 마치고 신병교육단으로 발령 받았으나 건강 문제로 전역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의 참전 기록이나 전상 기록 등이 어떤 이유에선지 국방부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 실상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제대로 된 유공자 등급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있다.
박천석(81) : 육군 7사단 3연대 12중대 소속 / 군번 0101350 / 전상 6급
6.25 발발 불과 18일 뒤인 7월 13일 입대, 기계화사단에 배속되어 낙동강 포항작전에 투입되었다. 경주 포항 간 안강전투 시에는 주로 야간 전투와 육박전이 비일비재했다. 이후 춘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 평양까지 진격했는데 어느 날 대규모 전투 시에는 하룻밤 사이 전사자만 해도 200여 명이 넘을 만큼 거의 전멸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전장에 일반 노무자들로 구성된 보급지원단이 있었는데 그들이 해 준 주먹밥과 국을 지급 받을라 치면 그릇이 없어 빈 실탄 통을 이용하는가 하면 겨울에는 추위에 밥이 얼어 대검으로 떼어내서 먹는 진풍경도 예사였다. 그래도 그것은 형편이 나은 경우였고 어떨 때는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길에 쌓인 눈도 집어먹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어떤 병사는 인근의 미군 진지를 찾아가 먹을 것을 구걸해 오는 등 모든 조건이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른이 전상을 입은 곳은 충북 제천에서의 전투 때였는데 51년 1월 14일로 기억 된다.
당시 피로 범벅된 채 열차로 후송되는 병사가 많았는데 언젠가 한 번은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양동이에 물을 떠가지고 와 씻어 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후일 안강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사단장의 상신으로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충무은성무공훈장’을 수여 받게 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예순 두해가 되었지만 그것은 표면상일 뿐 아직도 우리는 그로 인한 많은 후유증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전쟁 당사자 간 협정 조인 자체도 종전(終戰) 이 아닌 정전(停戰)이어서 재발의 여지로 인한 뒷맛도 개운치 않지만 6.25가 남긴 많은 난제들이 이념적 대립과 함께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여서 사회 갈등의 한 요인으로 잠복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당시 희생되었던 16만여 만 명의 전사 또는 실종자 중 유해가 발굴된 것은 불과 6천여구이고 그나마 신원 확인이 된 것은 수 십구에 불과하다는 것도 유족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 일터이다. 무엇보다 보수를 표방하는 현 정권하에서도 어떤 이유에선지 유해 발굴에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거니와 더구나 남북 정세가 경색 되면서 북녘 땅에 잠든 국군의 유해 송환 요구도 어렵게 됨으로서 유족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북한에서 정전 협정 이후 최초로 12구의 유해를 미 측을 통해 송환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그 중 2구는 신원 확인이 되어 유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줬을 것으로 안다. 따라서 향후 정부에서는 다른 것에 우선하여 국군의 유해 발굴에 적극 나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들로 인해 지켜진 나라에서 정작 그 자신들의 유해가 수습되지 못하고 내버려져 있다는 것은 우선 양심이 허락지 않는 일 일뿐더러 올바른 국가관이 요구되는 후세에게도 낯이 서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못지않게 당시 참전 중 전상을 입은 채 어려운 노후생활을 하고 있는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제반 보상 기준이 합리적인 틀에서 시행되고 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분들은 목숨을 내 걸고 전장에 나가 피로써 이 나라를 수호했다는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나 전상 등급에 따른 제반 수당 등이 생업 도중 재해를 당한 일반 공상자와 같거나 못한 현실을 대하며 지급되는 액수를 떠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노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지급되는 노인수당도 이들에게는 지급되지 않고 있어 허탈해 하고 있는데 전상자에 대한 국가 보상과 노인수당은 별개임에도 2중 지원 금지 원칙을 들이대며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국에서는 이러한 정책 시행에 모순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세심한 검토와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국가 수호를 제 1의 가치로 여길진대 그 진정성이 명예로 남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동기 부여가 절대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치에서다.
* 기사 중 전투 기록들은 당사자들이 고령인 관계로 기억력에 한계가 있어 일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