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용 창작 무용계의 샛별 ‘김시원’
대학 재학 때부터 수많은 작품에 출연
무용수이자 안무가로도 활약
글/
이복 회장&대기자
bok9353@hanamil.net
코로나19로 극장과 문화예술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예정되어 있던 공연들이 속속들이 연기·취소되기도 하고, 온라인 플랫폼의 영상공연이나 무관객으로 실시간 상영하는 시스템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기존에 당연히 여기던 것에 브레이크가 걸린 상황이다. 극복해야 할 문제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세계적인 재난으로 모두가 힘든 상황이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고향을 떠나 서울 무대에서 화려한 활동을 통해 고향을 빛내며 자신만의 영역에서 이름을 알려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완성된 춤꾼은 아니지만, 국내 최고의 남성 무용수를 꿈꾸며 빠르게 성장해 나가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군산 출신의 김시원(27세) 씨다.
김시원 씨는 남성 무용수에 대한 시선이 보수적인 지방에서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빌리’를 꿈꾸며, 고교 시절 춤을 위해 유학길에 올라 서울 덕원예술고등학교에서 무용 기초를 다지고 성균관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에 진학하면서 춤꾼으로서 성장해 나갔다.
특히 그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무용계에서 인정을 받고 국무용 창작 무용계의 샛별로 떠오르고 있다.
빌리를 꿈꾸는 춤꾼 ‘김시원’
김시원 씨가 춤에 입문하게 되는 과정은 독특하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2000)>를 보신 어머니가 중학교 3년생이었던 김시원 씨에게 발레를 권유한 것이 무용을 시작하게 된 시작점이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리노를 꿈꾸는 가난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로 주인공 빌리는 우연한 기회에 발레 수업을 보게 되면서 여학생들 뒤에서 춤동작을 따라 한다.
그에게 재능을 발견한 발레 선생님이 빌리에게 특별 수업을 해주고 로얄발레학교의 오디션을 보라고 권유하지만, 발레는 여자들이나 하는 거라며 반대하는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꿈이 좌절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빌리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선생님을 더 따르게 되고 결국 아버지도 발레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이라는 걸 알게 되어 아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결국 아들은 로얄발레학교의 오디션에 합격하게 된다.
영화의 줄거리처럼 남자 무용수에 대한 시선은 보수적이며 유교적 색채가 짙은 한국 사회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날 김시원 씨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쳐 수술한 이후, 그의 어머니는 조심스레 발레를 권유하기 시작했다. 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태권도나 킥복싱에 관심이 있던 터였다.
어머니는 머리를 다쳐 이러한 운동이 위험할 거란 생각에 발레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의 원대로 군산의 한 무용학원에서 한국무용을 배우게 된다.
처음엔 발레로 시작했지만, 한국무용을 하는 김정숙무용학원 원장님의 권유와 한국무용의 음악이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무용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다 무용을 제대로 하려면 좀 더 큰 도시에서 배워야 한다며 김정숙 원장님의 권유로 서울로 유학길에 올랐다. 군산동고등학교를 다니다 서울 덕원예술고등학교에 편입하게 되면서 전문적으로 무용을 배워나갔다.
성균관대학교 재학시절부터 수많은 작품에 출연
그는 창작 춤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성균관대 무용학과 임학선 교수가 창안한 색다른 기본을 접하면서 성균관대학교 입학을 꿈꾸었고, 대입에 성공해 재학 중 3주 동안 7개의 작품에 참여할 정도로 많은 공연 무대에 섰다. 그러면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배와 동기들과 모여 움직임과 안무를 탐구하는 스터디를 이어나갔으며 거리에서 버스킹하는 음악에 춤을 추기도 하였다.
“전 스스로 몸도 뻣뻣하고 신체적 재능이 없어 춤을 못 춘다고 생각했었어요. 다소의 열등감도 가지고 있었어요. 실력을 키워보고 싶어 새벽까지 연습하는데 <나는 나비>란 노래가 나오더군요. 나비가 되어서 세상을 자유롭게 날거야'라는 가사를 들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번데기일 거 같구나 하는 생각에서 울기도 했어요”
그는 이런 노력들이 특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나 기교도 높이고 몸의 운동성을 확장하기 위해 당연히 춤에 관해 연구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무용수 스스로도 표현이 몰입되어야 타인을 설득할 움직임을 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때는 술을 먹고 새벽 3시 즈음 혼자 무용실에 가서 해가 뜰 때까지 만취 상태로 춤을 추기도 했어요.“
그런 노력과 더불어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던 김시원 씨는 제23기 재경전라북도장학회에서 장학생으로 선정되었으며, 대학 4년 동안 학교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나가는 우등생이었다.
이런 진지한 태도와 배움의 열정으로 인해 그는 졸업 이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국립무용단에서 1년간 인턴 무용수로 있으면서 <리진>, <춘상〉, <묵향〉, 〈향연>에 출연했고, 임학선 댄스의 <공자>, <영웅 이순신>, <강, 강(江)>,
“학교 특성일 수도 있는데, 함께 활동하는 사람 모두 무용수 활동뿐 아니라 안무자로서 일 년에 한두 번씩 안무를 올립니다.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고 저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안무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무용수로서 김시원 씨는 지향점이 확실하다. 어렸을 때는 목표를 물으면 움직임의 끝을 보고 싶다고 대답했는데, 이제는 그 끝이 구체화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 어딘가에 떨어지더라도 움직임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50분 품 안무작 <이란격석>, 두리춤터에서 발표
그는 무작정 내 공연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두리춤터 대표에게 그 소망을 얘기했고, 조명 감독과 공간 지원을 받아 지난해 <이란격석>을 발표하였다.
"음악 하는 친구와 무용수 한 명 그리고 제가 출연하는 50분 품의 작품이었습니다. 리서치 과정이 재밌었는데, 산에 올라서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는 것이 첫 시작이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느낀 점을 글로 적고 글을 음악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음악을 다시 춤으로 만들어지고 춤을 다시 글로 적고 또다시 음악으로 만들어서 춤으로 만드는 등 여러 과정을 통해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탄탄한 리서치 덕분에 작품을 객관화하면서 볼 수 있었어요.
안무가로서는 많은 사람이 제 이야기를 봐줬으면 좋겠어요. 극장에서 보여주는 건 한계가 있어요. 20년 뒤에서 가상현실에서도 실제와 같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고정 팬층이 형성돼서 조회 수가 평균적으로 100만 정도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 작품을 보고 관객들이 작품에 담긴 철학과 제시하고자 했던 내 생각에 대해 많이 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바람이 매우 크다. 그런데 또 다른 바람이 있다고 했다. 어느 춤 공연을 보더라도 관객들이 김시원이 나오기를 고대하는 그런 무용수가 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자신만의 표현성을 지닌 대중에게 각인되는 무용수가 되길 원한다.
올해 창작무용 부문 <고개 고개로> 은상 수상
김시원 씨는 지난 4월 한국무용협회에서 주관한 전국신인 무용대회 한국무용 창작무용 부문에서 <고개 고개로>란 작품으로 은상을 수상했다. 은상 수상이 아쉽지만 1위와는 단 1점 차의 점수였기에 그의 실력은 입증된 것이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그는 유학을 계획하고 있다. 더 넓은 세계에서 더 나은 기술과 여러 예술가를 만나며 자신을 담금질할 계획이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단순히 춤을 잘 춘다고 해서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화려한 기교만 담는 게 아니라 관객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김시원 씨의 꿈처럼 기교만 부리는 무용수가 아닌 관객과 호흡하고 그를 보기 위해 100만 관객이 몰려드는 그 날까지 그를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