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혼은 자유롭다. 아니 적어도 그가 화폭 앞에 앉아 있는 순간만은 그는 혼자다. 육안으로 판별되는 모든 사물은 물을 머금은 그의 붓 끝에서 다시 살아나 화폭 안에서 숨을 쉰다. 그가 보여주는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수채화의 세계는 때론 잔잔하게 때론 강렬하게 내 안의 심연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던진다. 물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 자연이 선물한 온 세상의 빛깔은 그의 관조를 통하여 새로운 감동으로 재 발현된다. 이희완. 그는 잘생기기도 한 수채화가다. 평생 미술 공부만 하면서 어느덧 이순(耳順)에 접어든 나이이니 화력(畵歷)은 물으나 마나일터다. 깊으면서도 강렬한 눈빛은 미술에 관한 한 자존감이 예사롭지 않음을 말 하는 듯도 하지만 그 안엔 고독도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부안. 세 살 때 군산으로 이사를 왔으니 군산이 고향인 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간혹 부모님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눈물을 흘리기라도 하면 떨어진 눈물방울을 손가락 끝으로 찍어 무언가 그리려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중학생 시절에는 미술부가 따로 없어 제대로 된 기초를 배울 수 없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어느 여선생님의 권유로 미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군산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부에 들어 기초를 읽혔고 원광대학교 사범대 미술과를 졸업하고 교육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약 23년간 교직에 몸을 담은 적도 있다. 군산여고 미술 교사 시절에는 잘 생긴 외모 때문인지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4년 전 남들은 부러워하기도 하는 교직을 떠났다. 어디엔가 얽매인 규칙적인 일상은 어느 날 그에게 단조로움과 무기력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유롭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는 수 천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정물보다는 주로 자연 풍경의 그림을 즐겨 그린다. 때론 사진으로 담아오느라 전국 곳곳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그가 현장 그림을 주로 그리는 이유는 모르긴 해도 후일 한 시대의 기록과 역사성을 지닐 수도 있어서일 거라는 짐작만 들 뿐이다. 군산항이나 주변의 포구 그림을 많이 그려낸 데서도 그의 의중이 읽혀지기도 한다. 또한 시골의 어느 정경, 도심의 골목이나 야경 등에서도 그만의 수채기법을 통한 순간의 모습은 빛과 그늘을 대비시키며 때론 현란하게 때론 고요하게 화폭 안에서 재조명 된다.
수채화는 여러 가지 안료를 물에 풀어서 그리는 그림으로, 기름에 개거나 풀어서 그리는 유화와 대별된다. 모든 그림의 출발도 데생과 수채화가 기본으로서 학창 시절의 그런 추억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터이다. 수채화는 때로 유화작품을 위한 밑그림, 또는 기초 수업과정에서 사용하는 2류의 회화 양식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소묘(素描)나 연필담채화 등도 수채화의 한 기법으로 이해되면서 세계 미술사에 독자적인 표현 양식의 한 영역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국에서 수채화가 시작된 것은 1910년 후반으로서 초기에는 유화의 수업과정으로 소묘, 수채화, 유화의 순으로 기법을 연마하는데 그치는 정도로 인식되어왔으나 해방 전후를 기하여 여러 화가들에 의해 풍경, 정물화 등에서 많은 수작들이 남겨지면서 발전하여 왔고 최근에는 전문적으로 수채화만을 표현양식으로 하는 개인전이나 단체전도 자주 열리고 있다. 이희완 역시 대학 시절에는 유화를 공부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수채화에 전념하게 된 것은 30대 후반 부터다. 유화는 유화 나름의 특징이나 멋이 있지만 수채화는 물을 기본으로 함으로써 한층 순박미와 자연미가 발현되기도 하며 보다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윽하고 정겹다. 전통의 기법에서부터 번짐의 기법까지 자유자재로 화폭을 채워 나가는 그의 붓 칠은 선명과 흐림의 농(濃), 담(淡)을 조화시키며 사물의 원형을 보존한 채 또 다른 질감으로 구현된다. 바위에 부딪치며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그림은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화폭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다.
그는 지난 86년도 첫 개인 스케치 전을 가진 이후 지금까지 개인전 10회를 비롯해서 국내외 적으로 수많은 전시회를 가졌다. 90년도에는 한 차례 유화 전을 갖기도 했으나 그 이후 지금에 이르는 동안 2000년대 들어 두 차례의 무속화(巫俗畵) 전을 포함해서 거의 격년으로 수채화 전을 갖고 있다. 그가 참여한 전시회만도 파리나 미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열린 국제전 10회, 초대전 21회,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단체전 25회 등 셀 수 없을 정도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의 실력은 차차 화단(畵壇)에 회자되고 명성을 더 해갔다. 그는 한때 모 대학에 출강을 나가기도 했으며 현재 한국미술협회 서양화분과, 수채화분과, 수채화작가협회 등에 임원으로 소속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가 하면 국전(國展)을 위시한 명망 있는 미술대전의 심사위원으로 초빙될 정도로 실력과 경륜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화실에는 그가 그려낸 크고 작은 수많은 그림이 있다. 대부분 자연 정경을 담은 작품들이지만 인물 소묘를 비롯한 자신의 자화상도 눈에 띠고 스케치북에 그린 엄청난 량의 크로키도 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크로키 작업을 하는데 언젠가 일만 점이 되는 날 전시회도 가질 거라 한다. 그 분량이라면 가히 기네스 감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 시기를 10년 후쯤으로 잡고 있다. 그 그림들 사이로 유독 시선을 끄는 이채로운 작품들이 있다. 그림들은 화려하면서도 어둡고 괴이하다. 이름 하여 무속화(巫俗畵)다. 그는 무속화에 천착하게 된 내력을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무속 문화에 두고 있다. 미술 뿐 만이 아니고 그는 우리의 뿌리에도 관심이 많다. 그가 읽은 많은 책들 중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등을 집대성한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잠자던 그의 내면을 울리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트이게 했다. 자신이 배달민족의 자손임을, 그래서 진정한 우리 것을 찾아 계승하고 싶은 욕구가 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느 민족이건 그만의 고유문화가 있듯 우리에게도 우리만이 가지는 끈질긴 독보적 문화, 그는 무속에서 그것을 발견했고 미술로 표현해 내고자 했다. 전례가 없었기에 그의 상상력과 영감으로 그려낸 무속화들은 그래서 그만의 독창성과 독자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경지다. 그래서일까, 그의 무속화엔 예외 없이 단기로 연도 표시가 된 작가 사인이 들어있다. 그는 ‘한국 무속화의 표현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지난 2000년도와 2001년도 두 해에 걸쳐 시민회관에서 첫 무속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우리 선조들이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유구한 문화건만 언제부턴가 외래 문물에 밀려 내 것을 천시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허망함 속에서 그는 적어도 누군가는 후세에 단서를 남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조바심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걸린 샤머니즘이라는 제호의 그의 무속화가 주는 상징성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앞으로도 무속화를 계속 그릴 작정이다. 그림이 팔리건 안 팔리건 관심이 없다. 아니 애초부터 팔 생각으로 그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전시회를 찾은 외국인 중에는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만난 듯 찬사와 함께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 눈에도 그것은 결코 흉내 내거나 빼앗아 갈 수 없는 신비롭게도 느껴질 우리만의 문화이기 때문일 터다. 이로 볼 때 그 무속화들은 언젠가 먼 후일 이 땅의 보물로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날이 반드시 올 듯도 하다. 그래서 그는 자부심도 느낀다.
그의 화풍은 근래 들어 구상(具象)에서 비구상(非具象)으로 변화를 보인다. 구체적인 표현 방식에서 이미지를 강조하는 반구상(半具象)형식으로의 경계점이라고나 할까. 굵고 힘찬 붓놀림이 만들어내는 사물의 형상은 빗물이 흐르는 유리창을 투과하여 보는 사물처럼 또 다른 느낌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화실에는 수채화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E마트와 롯데마트 문화센터에서도 주 1회 교습을 하며 때론 외래 출강도 나가고 있다. 수강생은 대부분 중년층의 여성들로서 남성 수강생 중엔 칠순에 든 분도 있다. 미술을 공부하기에 늦은 나이란 없는 것일까. 몰두할 수 있는 취미를 통하여 자아의 실현을 모색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즐겁기도 한 일이다. 또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로워진 때문인지 예전에 비해 문화 예술을 접하는 계층도 차차 늘고 있는 세태다. 그의 제자 중엔 각종 미술대회에 수차례 입상하여 초대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53세의 여성도 있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미술에도 왕도란 없다. 유화는 ‘울고 들어갔다가 웃고 나오는 반면에 수채화는 웃고 들어갔다가 울고나온다’는 말처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분야로서 중도 포기하는 사람도 종종 있을 정도다. 그렇다 해서 성급함은 용인되지 않는다. 채워져 쌓이는 스케치북, 닳아 없어진 붓이나 물감의 분량만큼 대가(代價)는 실력으로 답을 할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늘 이 점을 강조한다. 남을 모방하거나 하루아침에 대가가 되려하기 보다는 제대로 기초를 익히고 꾸준한 수련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작품 활동과 병행하여 미술을 통한 봉사활동과 후진 양성에도 열과 성을 다 할 작정이다. 그래서 그는 늘 바쁘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우리의 무속 미술에 대하여 연구하고 재조명해내는 화가는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이희완 화백이 유일하다. 소위 ‘돈이 되는 그림’ 에만 관심 있는 세태 속에서 올곧게 우리의 뿌리를 찾아 헤매고 우리민족 정신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Shamanism 을 통하여 우리의 자화상과 정체성을 모색하는 그는, 내 것을 외면하고 천시하는 이 세태에서 후세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이요 우리 문화의 주인이라는 옹골찬 생각으로 그 일을 묵묵히 해 내는 것일 게다.
그것은 주인만이 가질 수 있는 자존심이자 오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가 알랴. 언젠가 그의 작품들이 후세에게 교본이 될 수도 있음을.
그의 이러한 문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경제적 부강함보다는 문화적 주권을 역설했던 백범 김구나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인식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는 혼자만의 시간, 불현듯 시상(詩想)이 떠오를 때도 있다. 그래서 그는 시도 쓴다. 그의 시에는 인간과 자아를 관조하고 성찰하는 고뇌가 담겨 있다. 또한 온갖 그림과 화구(畵具) 등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 없는 화실 귀퉁이에는 그가 대나무를 잘라 공들여 손수 만든 몇 개의 대금(大芩)도 있다. 얼핏 보기에도 전문가의 수준이다. 그는 미술만큼이나 우리 가락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천생 한민족의 후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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