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꿰뚫는 인문학
소설가 한상희 작가를 만나다.
지난해 7월, 군산을 찾아 공기 좋은 월명동에 둥지를 틀고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주제로 한 새로운 시각의 10부작 대하소설을 집필 중이라는 한상희 소설가를 만났다. 그는 일찍이 재외공관 근무를 포함해 30년 이상의 중앙부처 공직(3급)과 3년간의 국책연구소 연구위원 생활을 마친 후, 2012년 말에 가서야 숙원이던 작가세계에 과감히 뛰어든 인물로서 이후 지금까지 8년여에 이르는 동안 미 발표작까지 포함, 최소 320페이지 분량의 장편소설 16권과 450페이지 분량 이상의 문화예술전문서적 4권을 집필했는데 이는 초인적 정신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결과라 할만하다.
한 작가는 1953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했다. 초등 4학년 때 부친을 따라 인천으로 전학,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청소년시절부터 특히 러시아 문학과 예술(음악/미술/영화) 등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며 성장했다. 그는 성균관대 영문학과 졸업 후 미술사학자가 되고자 홍익대 일반대학원에 입학, 서양미술사에 매진했으나 직장관계로 중단할 수밖에 없어 숙원이던 학자의 꿈은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만년에 이르러 작가세계에 뛰어들어 많은 역작을 출간하는 것도 어쩌면 그때의 여한과 오기의 발동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은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비극적 생애와 여인관계를 심층 분석한 문화예술전문서적 ‘겨울날의 환상 속에서(2012.12)’이다. 그는 연이어 ‘영화와 문화는 동반자’
‘칼라스의 영욕’ 등 문화예술전문서적을 의욕적으로 집필하다가 2013. 7월, 첫 장편소설 ‘평양 컨스피러시’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급선회하기에 이른다.
군산에 내려오기에 앞서 그는 충남 예산군에서 2년 거주하는 동안 불꽃같이 살다간 한국 최초 여성화가 나혜석과 남로당 총책 박헌영에 관한 흔적들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나혜석은 한 때 여승이 되고자 수덕사에서 5년여 체류했었고, 근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박헌영의 출생지가 바로 예산군 산양면이다. 한 작가는 예산을 떠나기 앞서 나혜석의 일생을 새롭게 재평가한 장편소설 ‘고근(古根)의 이젤’과 단편집 ‘미사의 종·그들은 지금 어디에·아리랑랩소디’를 발표했었다. 그는 군산에 내려오자마자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10부작 대하소설 집필에 본격 착수, 불과 5개월 만에 3부작을 완성하는 초인적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군산세관 경내 인문학창고 ‘정담’에서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주제로 강연한 바도 있는 그를 뜻밖에도 군산에서 만나게 된 것은 필자에게 가히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의 소회를 갖게 하는데 아래는 그와 나눈 대담의 일부이다.
-집필중인 대하소설 요지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총 10부작을 계획하고 있다. 이미 탈고된 1~3부작에서는 동학혁명(1894)부터 남로당 총책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처형당한 1950년대 중반까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는 제주 4.3사건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모든 비극사가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소설을 쓰는 취지는 다름 아니다. 특히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할 젊은이들이 좌우익 역사를 바로 인식하면서 정치권의 사상논쟁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다. 이제 우리는 경제력으로 볼 때 그런 소모적인 과거 논쟁에서 탈피해 과감히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갈 때도 됐다. 그것이 바로 김대중 정신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그 주역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하(大河)에서 채만식 작가 문제도 집중 파고들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인가.
사실이다. 비록 영문과 출신이기는 하지만 군산에 내려오기 전 채만식문학관을 3번 방문했을 정도로 예전부터 ‘탁류’ 등 그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사견임을 전제로 채만식 작가는 조선이 낳은 3대 천재작가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에게는 항상 친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이 때문에 그는 6.25발발 직전 눈을 감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해방 3년 후 ‘민족의 죄인’이라는 중편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전력을 참회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 활약했던 친일문인(親日文人)들이 해방 후 자신의 행적을 변명하기에 급급했을 뿐 누구 하나 채만식처럼 용기 있게 공개 속죄한 적이 없었던 것에서도 채만식의 진정어린 속죄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땅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문학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군산시민의 자존심을 되살려줄 수 있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친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齒)를 가는 진보성향 소설가 중 한 명인
황석영 작가도 ‘정담’에서의 문학 경연 후 군산을 떠나면서 군산시민들에게 화두를 던지지 않았는가, 채만식 친일전력 문제는 군산시민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내가 이번 대하소설에서 카프문학과 연계시켜 채만식 인성과 작품성을 비중 있게 다룬 것도 그 일환이다. 일제는 카프문학(192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인들이 주도)에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었다. 친일 잔재들이 지금까지 틈만 나면 진보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도 이런데서 비롯된 것이다.
-채만식 작가가 만세운동에 참여하다가 일제에 잡혀가 8개월 옥살이를 했다는 설도 있던데.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다 알다시피 3.1만세운동은 군산에서는 한강이남 최초로 1919년 3월 5일 일어났다. 4월4일에는 임피에서도 만세사건이 터졌다. 당시 독립열사인 김홍렬을 따라 채만식도 만세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8개월 옥살이를 하다 석방됐었다. 그럼에도 어찌 군산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외부의 채만식 친일 주장에 부화뇌동하면서도 그의 투옥전력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애써 외면하려 하는가.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친일프레임에서 벗어나기에 충분치 않은가,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군산시민이 채만식 친일전력 벗기기에 앞장서야 한다.
-대하소설에서 그 외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 있다면?
민족적 비극사건으로 아직까지 정확히 조명되지 않고 있는 1948년 10월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이다. 이 사건 주동자가 아직까지는 지창수 상사 등으로만 언급되어 왔는데 나는 달리 보고 있다. 그간 여순사건에서 박정희의 역할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었고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만한 자료들도 일정 부분 어렵게 찾아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후 제일 먼저 수하들을 시켜 자신의 군부 내 좌익행적들을 없애는데 급급했다. 이 점은 너무 민감한 문제라서 공식 출간될 때까지 기다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시 여순사건 못지않게 일어난 비극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좌우익에 의한 군산 양민 학살사건이다. 이 점도 비중 있게 다뤘다.
-작가님에게는 남다른 취미도 있다고 하던데.
그 점에 대해선 애써 숨기고 싶지 않다. 지금 이 나이가 들도록 외국 미술원서와 영화 및 클래식 음반 수집 등 평생을 문학, 예술에 미쳐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 가운데 엄선된 명작 영화만 5,500여장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 삶이 늦게나마 소설가의 길을 갖게 한 원천이 된 게 아닌가 한다.
-군산에 정착하면서 느낀 소감, 그리고 향후 계획을 듣고 싶은데.
군산에 내려온 지 채 1년이 안 됐는데 지내면서 자연환경이며 인심 등이 참으로 여유롭고 정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간 정착할 곳을 찾아 고향인 담양을 비롯해서 광주, 예산, 전주 등 여러 지역을 다녀봤지만 군산만큼 편안함을 주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 대하소설은 3부작에서 잠시 접고, 800~900페이지 분량 민중미술사 단행본 집필에 착수할 예정이다. 그 이유는 독재와 맞서 싸운 민중 1세대의 경우 대부분 80세를 넘긴 상태로서 그 가운데는 이미 작고하신 분들도 계셔서 더 이상 미루다간 이 작가들의 생생한 증언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집필 기간은 2~3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변이 없는 한 그 기한 내 기필코 끝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