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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폭 치마에 새긴 ‘나의 인생, 나의 숙명’
글 : 이진우 /
2020.02.01 13:30:0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6폭 치마에 새긴 나의 인생, 나의 숙명

- 30년 외길 한복 디자이너 서백화

- 예쁘게, 그리고 나눔으로 봉사

 





거친 들판이거나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그녀는 햇살 가득했던 고향집을 떠올렸다. 6남매의 막내로 오붓하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나비처럼 풀풀 살아났다.

30년 한복 디자인 외길. 시련은 늘 안부처럼 따라다녔다. 흔들리거나 괴로울 때마다 바로잡아 주고, 힘이 되어주었던 건 바로 그 유년의 추억들이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전주 생활을 접고 2004년 즈음 군산에서 다시 시작했다. 외톨이였고 정말 힘들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그 혹독한 시련은 그녀를 단련시켰고, 두 아들을 돌보면서 올곧게 한길을 걸어 갔다.

오늘 한복 디자이너 서백화라는 이름으로 굳게 뿌리 내린 건 그런 매서운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결과이다. 마치 추워야만 향기가 짙어지는 매화처럼 말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수송동 방향 도로 오른편의 매장 쇼 윈도우 안에는 화사한 파스텔톤 한복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녀의 단정한 매무새를 쏙 빼닮았다.

 

나의 숙명, 한복 디자이너

한복 디자인은 그녀의 전부이다. 옷을 만들고 고객들의 마음까지 맞춰줘야 하는 전문인의 길이 어디 쉬우랴만 그녀는 기꺼이 숙명을 안기로 했다.

저는 현모양처가 꿈이었는데 긴 시간을 돌아 결국 디자이너의 길을 가게 되었어요. 이런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복사기가 흔치않던 시절, 그녀는 수많은 전통 문양과 도안들을 직접 늘이고 줄이는 혹독한 디자이너 수련을 겪었다. 살점을 저미듯이 온 몸이 아팠다.

세상에 있는 모든 웬만한 문양과 도안은 내 손으로 다시 그려졌을 겁니다.”

한 땀씩 새기는 생생한 공부의 시기가 지나자 그녀의 가슴에는 서백화류라고 부를 수 있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문양이 스며들었다.

전주 웨딩거리에 한복 디자이너 서백화라는 간판을 걸었는데, 그때서야 제대로 된 옷을 입은 느낌이었죠.”

내 이름을 건다는 건 남다르다. 스스로 책임감을 다그쳤던 4년 동안 정말 일을 많이 했다. 한복 업계에서 인정을 받았다.

마네킹들이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꿈을 꾸었어요. 스스로 일주일에 적어도 두벌 이상의 한복을 디자인하자라고 다그칠 정도로 열정이 넘쳤지요.”

 

시대를 앞서간 디자이너로 남을 터

저는 2000년대에 한복을 대여하는 시대가 오리라고 보았거든요. 결국 그렇게 되었잖아요. 저는 서백화하면 시대를 앞서간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녀는 누구나 쉽게 한복 입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자주 입지도 않기에 행사 때에만 골라 입는 대여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4인 가족이라고 해도 예전처럼 맞추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잖아요. 저와 같은 디자이너가 다양한 종류의 옷을 만들어 놓고 누구나 쉽게 고를 수 있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녀의 손으로 디자인한 작품들을 미리미리 체형별로 만들어서 대여의 시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매장도 눈에 잘 띄고 차를 이용하기 좋은 지곡동 공단대로 변으로 옮겼다.

저가의 경우 10만원도 안되고 보통은 15만원선, 고가의 경우 20~30만원이면 충분하거든요. 저는 최신 유행 디자인을 만들어서 공급하고, 고객들은 옷을 골라서 입을 수 있으니 만족도가 높아질 겁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주는 일이 또한 디자이너의 일이다. 대여하는 한복이라 품질을 낮게 보았다간 실례이다. 최신 유행의 파스텔톤 한복으로 가득 들어찬 샵에 가보라. ‘그렇구나하고 느끼게 될 터이니.

 

  

 

한복과의 인연, 그리고 시련

주단(한복)가게 앞을 지나는데 6폭 치마에 매화꽃과 산세가 아름답게 그려진 걸 보고 그 자리에 서버렸어요. 한복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울산의 셋째 오빠 집에서 잠깐 살았던 그녀의 열아홉 때. 한복 디자이너를 하겠다는 막내에게 그 오빠가 염색 물감과 방석 비슷한 걸 구해주었다.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게 한복과의 첫 인연이다.

어릴 때 종이 인형을 그리고, 그 위에 장난감 옷을 오려서 붙이는 놀이를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자 그 놀이와 비슷한 상품이 나오더라고요. 어쩌면 코흘리게 시절에 시대를 앞서갔던 셈이죠.”

그녀의 어릴 때 꿈은 예쁜 옷을 만들어내는 패션 디자이너였다. 꿈을 꾸었던 일이기에 스물여덟 때부터 직원 10명을 두고 전주에서 백 화실을 운영했다. 옷을 만들어서 한복집에 공급하는 도매 사업이었다.

한복집 사장님들을 찾아가 수금을 해야 하는데 장되지 않았어요. 10년을 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죠.”

한복도매 사업에서 떠나 내 이름을 걸고 한복을 만들자라고 결심했다. 시작하면 밀어붙이는 그녀는 겉보기와 다른 능력이 있었다. 주변에선 천생 여자라고 했으나 그녀의 가슴은 도전정신이 넘쳤다.

사업자 겸 디자이너로써 모든 걸 혼자 짊어졌던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 때의 좌절은 새로운 시작의 예고편이었다.

 

 

나의 행복, 나의 길

여성을 더 여성스럽게 만들어주는 쪽으로 한복이 변화하고 있는데요. 그런 옷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디자인입니다.”

한복도 유행을 많이 탄다. 요즘은 원단 자체의 깔끔함을 추구한다. 여기에 바느질로 멋진 디자인을 표현하여 단아함과 고급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예전 한복은 가슴 부분이 튀어 나와서 맵시가 안나왔어요. 팔을 살짝만 들어도 겨드랑이가 보여서 무척 싫어했거든요. 지금은 치마로 그 부분을 감싸주고 양장 바느질로 마무리해주면서 편리하고 심플해졌죠.”

오늘의 디자이너는 전통에 현대를 가미한 맵시에 요즘의 색상을 입혀 고객들의 욕구에 맞춰주는 일이다. 꾸밈없는 열정과 담대함, 그리고 성실함이 주특기인 그녀이기에 그런 일을 가능케 할 것이다.

저는 아직도 손님을 맞는데 익숙하지 않아요. 그러나 예쁜 옷으로 극복해 나가야해요. 힘들게 하는 손님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게 오늘의 숙제입니다.”

디자이너와 고객은 상호관계이다. 그녀는 여자로서는 여릴지 모르지만 바람도 맞고 비에 젖으면서 디자이너로썬 단단해졌다.

 

디자이너란 이제 직업이 아니라 제가 지켜나가야 할 숙명이죠.”

전시된 파스텔톤 옷들이 스스로를 빛내면서 나를 선택해 달라하듯 서백화 또한 더욱 가치 있는 디자인과 삶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내 자신만을 위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이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 나누고 베푸는 한복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어요.”

어차피 힘들고 거친 삶이겠지만 오늘이 끝이 아니니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예쁘게 살기로 했다. 그녀의 작은 체구에서 이런 울림이 나오다니 놀랍다. 어려운 군산을 위로하는 새봄의 모습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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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6 13:14:47) rec(54) nrec(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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