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의 의미와 개요
무릇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 치고 3.1운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군산에서도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만일 전혀 모르고 있다거나 어렴풋이 정도로만 알고 있다면 무엇이 잘 못돼서일까. 반만년 지켜 온 이 땅을 송두리째 빼앗아 차지하고 주인행세를 해대는 것도 모자라 우리 민족을 짓밟고 핍박한 저 가공할 일제의 만행에 대해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분연히 떨쳐 일어난 내 고장의 그들은 과연 누구이며 당시의 시대상, 그리고 전개된 상황은 어떠하였는지 잠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그날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3.1절 93 돌을 맞아 의미가 있는 일 일성 싶다.
우리는 3.1운동이란 한 단어로 당시의 전반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포괄하여 지칭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날일 뿐 국내의 모든 만세운동이 3월1일 하루를 기하여 일어난 것은 아니다. 1919(己未)년 3월1일은 서울 탑골(파고다)공원에서 손병희를 위시한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며 세계만방에 우리의 자주국임과 독립의지를 천명한 날로서 이 후 들불처럼 전국에 걸쳐 독립만세 운동이 확산되는 효시가 되었기 때문에 그 날을 기념일로 정한 것이며 지역마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짜는 많은 시차를 두고 다르게 나타나고 있거니와 대표적으로 유관순 열사가 앞장섰던 천안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역시 3월1일이 아니라 사실은 3월 말(4월1일이라는 설도 있음)이었다고 하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구암동산의 만세운동은 탑골공원 독립만세운동 불과 나흘 뒤인 3월5일을 기하여 터졌으니 한강 이남지역에서는 최초로서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보다도 거의 한 달이나 빠른 시점일 뿐만 아니라 이 후 전국적인 만세운동 발발의 촉매제가 되기도 했는바 어떤 이유에선지 아직도 이러한 사실들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기도 하려니와 석연치 않은 감이 들기도 한다.
구암동산의 3.1운동
구암동산 일대에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 들어 선 것은 1892년을 시점으로 미국에서 들어 온 W.M Junkin 목사 등 7인의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구암동산에 구암교회를 설립하고 이 교회를 모태로 하여 안락소학교(현 구암초등학교) 및 영명학교(현 제일중,고)와 멜볼딘(현 영광 여중,고)학교를 비롯 구암 예수병원(원명:프랜시스 브리지 앗킨슨 기념병원) 등을 세워 가난하고 무지했던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고 근대 서구식 교육에 따른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는가 하면 주민들에게 질병 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개척자적 헌신을 아끼지 않았는데 후일 발생한 이 지역에서의 3.5 독립만세운동은 바로 이 토양 위에서 싹이 틔워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구암교회 앞 3.1운동기념관 마당에 건립된 기념비에 새겨진 약사(略史)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아래에 그 전문을 소개한다.
<군산 기미 3.5 독립운동 약사(略史)>
군산의 3.1 독립운동은 당시 구암교회 교인으로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YMCA회원 김병수 학생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분인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여 매와 태극기를 전달받아 2월26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당시 구암교회 장로)교사 집에서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김윤관, 김연묵, 이동욱, 문용기 등을 만나 서울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은밀히 알리고 군산에서도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 후 박연세 교사를 위시한 같은 학교 교사들과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여 매와 많은 태극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3월6일 서래장날에 맞춰 일제히 거사를 일으켜 만세 시위를 하려고 하였으나 3월5일 새벽 갑자기 군산경찰서에서 일본인 경찰 10명이 무장을 하고 나타나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교사 등을 연행해 가는 바람에 거사 계획은 좌절될 뻔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당시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활동했던 김윤실 교사는 바로 학생 간부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거사가 수포로 돌아가기 전에 당일 시위하기로 결의한 후 학생 양기철, 전세종, 김영후, 송기옥, 이도준, 홍천교, 고준명, 유복섭, 오한길, 강규언, 강인성 등이 앞장서 시위에 들어가니 같은 기독교 계통 학교인 멜볼딘여학교의 학생도 합세하여 시위에 동참하게 되며 구암교회 교인 다수와 궁말(궁을리)예수병원 사무원 양기준, 이준명, 유한종, 양성도, 김창윤, 송경태, 송원경, 임병율, 이진규, 김준관, 이기주, 이재근 등이 동참하는가 하면 시민 중에서도 정문선, 김영상, 전종식, 문재봉, 홍종억, 전봉신, 박동근, 임종우, 이병관 등이 가세함으로써 그 수는 500여명으로 늘어나고 경찰서 앞에 이를 때는 천여 명으로 불어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하늘에 사무치게 되었다.
당시 군산시의 인구는 13,604명(한국인 6,581명, 일본인 6,809명, 외국인 214명)으로서 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큰 숫자라 아니할 수 없다. 군산의 3.5 독립만세운동은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선교회에서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교사, 궁말 예수병원 사무원과 구암교회 성도 등 기독교인을 주축으로 시작되어 천주교, 불교 등 범 종교단체, 여기에 시민 등이 합세하여 전개되었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3.1 만세운동은 군산의 구암동산에서 3월5일 발원되어 끈질기게 이어져 총 28회에 걸쳐 연인원 3,700여 명이 참가하였고 사망 53, 실종 72, 부상 195명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군산의 3.5 독립만세운동은 호남 최초는 물론이고 한강 이남 최초의 거사로서 전북지역 최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한 전라북도민의 자랑이요 군산시민의 긍지이며 자존심이다.
위 약사에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상황을 좀 더 부연 설명하면 영명학교는 군옥 지방은 물론 익산, 부안, 김제 그리고 멀리는 충남 서남부 지역에서도 학생들이 유학을 왔으며 박연세, 이두열 교사 등이 경찰서에 수감됐을 때는 김윤실, 김수영, 고석주 교사를 위시한 많은 학생들이 경찰서 앞에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석방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은 영명학교 전체 학생 70명 중 절반 이상을 유치장에 잡아넣었고 그 사건 뒤 경찰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3월 5일 대대적으로 만세 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당일 만세 시위대는 서래장터를 지나 경찰서 방향으로 행진하였는데 경찰서 앞에서의 시위 열기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경찰은 재향군인과 익산에 있던 헌병대의 지원 요청까지 하기에 이르렀고 이 때 붙잡힌 사람만 해도 90여명에 달했다. 또한 3월 말경에는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입학 거부에 이어 학교 건물에의 방화로 경찰을 놀라게 하였으며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대화정(현 영화동)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3월 30일에는 다음날 열릴 만세 주동자 공판을 앞두고 야간에 횃불과 태극기를 든 수천 명의 시민들과 경찰 사이에 큰 충돌이 있었으며 다음날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열린 공판 법정으로 일단의 군중이 몰려 가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3.1운동 기념사업
군산 구암동산에서 촉발됐던 이러한 만세운동은 해방 이후 역대 어느 정부, 그리고 어느 단체장 하에서도 제대로 평가되거나 조명 받지 못하다가 약 17년 전 일부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시의 그 날을 기리는 기념일의 제정과 만세운동의 발원지였던 구암동산 일부를 역사적 성지로 조성해야 된다는 필요성이 공론되어 오던 차 구암교회가 주체가 되어 ‘군산3.1운동기념사업회’를 발족(회장:김영만 목사), 지난 17년 동안 독자적으로 각종 행사와 함께 3.1절을 기념해오고 있다. 그러던 중 약 4년 전부터 시에서도 비로소 관심을 보임으로써 지원책을 내놓고 있으나 아직은 제반 여건이 미흡한 부분이 많아 정부 차원에서의 추가적인 지원과 보완, 그리고 시민들의 협조와 동참 의식이 요구되고 있다. 기념식 당일의 행사는 군산시가 주최하고 익산보훈지청과 군산교육지원청의 후원으로 군산3.1운동 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치러 왔는데 시장을 위시한 관내 기관장과 시민들, 그리고 교인들이 참가하여 기념식을 갖고 모두 손에 태극기를 드는 등 당시의 복장으로 상황을 재현하는 거리 행진 퍼포먼스와 구암교회 안에서는 기념예배와 함께 글짓기와 그림 그리기를 비롯해서 당시의 역사 사진전을 열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당국의 무관심으로 역사적 성지로 알려진 구암동산 땅의 대부분을 한국전력 직원 사택과 세풍아파트가 차지함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지경이 되고 말았는데 아파트는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늦게나마 군산시가 나서서 한전 사택 부지만이라도 매입하여 철거키로 결정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계획대로 올해 한전 사택이 철거되면 주민들에게 부지를 개방한 후 그 자리에 기념탑을 건립하는 등 차차 성역화 사업을 진행시킬 예정이나 무엇보다 당국의 추진 의지와 시민들의 협조가 뒤따라야 되는 일임은 물론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 차원에서도 관심을 갖고 적극 나서는 것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던 당시의 만세운동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것이라 본다. 따라서 이는 만세운동이 있은 지 거의 100여년이 다 되어서야 이뤄지는 사업으로서 참으로 만시지탄인 감이 크다. 하지만 이는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그날의 선지자들, 그리고 일제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의 자존심을 외쳤던 수많은 민중에게 비로소 낯을 들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될 것임은 물론 후세에게도 부끄러움을 덜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닐 터이다.
일제 36년이 남긴 것
우리 고장 군산은 일제 시절 일본인 거주자 수가 우리 시민 수보다 많을 만큼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타 시도에 비해 빠른 일본화가 진행되었으며 그 만큼 그들이 남긴 사회간접자본과 건물 등이 많은 게 사실이고 또한 대농장주들을 앞세운 수탈의 전진 기지로서 뼈아픈 고통의 역사가 잔재된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방된 지 거의 70여년이 다 되어가는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일제 치하 36년을 평가하거나 규정하는 관점들이 제각각이어서 통일된 국론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있는바 예컨대 우리 민족을 무단 통치했던 부분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마땅하며 어떤 방식이 됐건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은 일정부분 필요하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일본이 우매했던 우리에게 근대화를 앞당겨 준 것은 분명하므로 이제 와서 과거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의 공존이 그것이다.
우리 군산의 3.5 만세운동만 해도 해방 된지 수십 년이 되도록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혀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반된 가치판단은 우리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 논쟁에서도 거의 양보가 없어 후대의 교육에도 혼란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역사나 어떠한 사안을 진단하는 관점은 각 자의 양심의 영역으로서 정답은 없다 하겠으나 분명한 것은 자존심을 내팽개치거나 지켜내지 못하는 국가는 언제라도 외세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이다. 하지만 누가 됐든 잘 먹고 잘 살게만 해준다면 자존심과 과거 따위는 버릴 수도 있다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가치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할진대 이 상충되는 가치판단이 언제까지 우리사회의 딜레마로 작용할지 답답하기도 하다.
그리고 언젠가 후일 성역화 된 구암동산에 우뚝 세워진 ‘3.1운동기념탑’이 멀리 착취의 현장이었던 옥구 일대와 만경평야, 그리고 수탈의 반출 통로였던 눈 아래 군산항과 서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어떤 감회를 가질지 자못 궁금한 것은 비단 필자만의 소회는 아닐 듯하다.
구암교회 | 전북 군산시 구암동 359-6 (063)442-1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