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老) 인장공(印章工)의 인생 여정
중앙로 신한은행에서 길 건너 영동으로 통하는 좁다란 골목 입구에 붉은 글씨로 ‘도장’이라 쓴 입간판과 함께 지퍼로 여닫게 된 남루한 비닐옷장 하나가 벽 쪽으로 붙어 있다. 볕도 들지 않고 사람의 통행도 별로 없는 약간은 어두운 골목인데다가 비닐옷장 마저도 너무 낡아 특별히 이곳에 볼 일이 있어 찾은 사람이 아니라면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인데 그 옷장 안에서 간혹 누군가의 미동이 느껴질 때가 있다면 김병문(金炳文/75)씨가 틀림없다. 그에게는 이 작디작은 비닐옷장이 생계가 달린 유일한 자신 소유 점포다. 그가 이 부근에서 도장을 판 세월만 해도 벌써 60년이 다 되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일거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폐지도 줍는다.
그의 젊은 날
그는 1930년대 후반 옥구군 미면 사장리(지금의 소룡동 은적사 부근)의 농가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모두가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그의 집 역시 굶기를 먹 듯 할 정도로 가난했다. 초등학교도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겨우 졸업했고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시내에 있던 외삼촌의 도장포에서 도장 새기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간혹 중학교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학생을 볼 때면 자신의 처지와 대별되는 그들이 너무도 부러워 남모르는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더구나 외삼촌의 성품이 워낙 엄한 분이라서 꾸중은 예사고 때론 머리를 쥐어박는 일도 많아 일을 배우는 동안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렇게 약 4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공군에서 기술하사관을 모집한다는 전단지를 보게 되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무언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욕구가 있던 차여서 망설임 없이 공군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엇보다 군대에 가면 하루 세끼 식사의 해결은 물론 비록 적은 액수지만 봉급도 받을 수 있어 차라리 마음이 편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 실력만으로는 공군에서 받아줄 것 같지 않아 고민 끝에 남 몰래 영어책을 구입하여 알파벳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공군에 무난히 입대하여 기술하사관으로 4년5개월을 복무한 뒤 이등중사로 전역을 하게 되었으니 그의 나이 24세였다.
잠시 찾은 안정
군에서 제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가정 형편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고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를 받아주는 직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노동판을 전전했다. 벌이만 잘 되면 다시는 도장 일을 하지 않을 심산이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결국 그는 옛 전화국 옆길에 노점 도장포를 열게 되었다. 작은 가게나마 세를 얻을 형편도 못 되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손재주도 있던 터였고 외숙 밑에서 워낙 정석으로 배웠던 도장 일이라 그의 솜씨는 입소문을 타고 차츰 알려져 고객이 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길 건너 영동 골목 입구에 있던 모 유리점 사장님이 점포 내부 한쪽 귀퉁이를 내주며 도장포를 옮기도록 배려해 비록 남의 점포지만 처음으로 실내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유리점이 바쁠 때면 일도 거들고 전화도 받아주고 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안정을 찾을 수 있어 29세 되던 해에는 중매로 아내도 맞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틈틈이 서체를 익혔고 자신이 새긴 인장에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고객도 많아져 매일 수십 개 씩의 도장을 새길 정도로 일감이 늘어갔고 어느 날은 쉴 시간도 없이 하루 100여개가 넘는 도장을 새긴 적도 있을 만큼 일감이 폭주하기도 했다. 특히 한자 인장에 능하다는 소문이 나서인지 서화(書畵)를 하는 사람들로부터 낙관인(落款印)의 주문이 종종 들어왔는데 멀리는 강 건너 충남에서 오는 고객도 있었다.
비록 자신 소유 점포는 아니었지만 그는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그렇게 평탄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슬하에 두 명의 아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90년대 후반 예기치 않게 터진 IMF사태는 이 작은 도장포에도 여파를 미쳤다. 더구나 어느 날 부턴가 일감이 차츰 줄어들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각지도 못한 컴퓨터 도장이 출현하였다. 컴퓨터에 글자를 입력만 하면 기계가 알아서 자동으로 도장을 새기는 그 신발명품은 그의 생계를 옭죄는 난데없는 괴물이었다. 그렇다고 그 기계를 구입할 여유도 없었거니와 특별한 기술 없이도 간단한 조작 기능만으로 누구라도 인장을 새길 수 있다는 것이 우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장은 그 하나하나가 무엇보다 주문자의 이름에 잘 어울리는 재질과 서체를 골라 새기는 이의 정성과 기량이 결합된 작품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그였던지라 그는 자신의 인장도(印章刀)로 직접 새기는 재래 방식을 고수했다. 그러는 사이 대부분의 도장 업소는 하나같이 컴퓨터 도장으로 영업 방식을 바꿨고 속도와 편리함만을 쫒는 세태와 맞물려 우후죽순처럼 늘어만 갔다. 컴퓨터로 새기는 도장들은 막도장이 대부분이지만 잘은 몰라도 마치 붕어빵처럼 얼마든지 같은 도장을 찍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이렇게 변해버린 세상이 우습기도 하고 쓸쓸한 감회마저 밀려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도장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은 다 들 피부로 느끼고 있을 일로서 전반적으로 도장의 수요가 갈수록 감소하고 있는 큰 이유는 관공서나 금융기관 등에서도 도장보다는 친필 서명을 받는 것으로 업무가 간소화 된 세태 때문이기도 한데 이렇듯 주변 환경은 하나같이 그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다시 노점으로
그러던 차에 또 하나 시련이 찾아왔다. 유리점이 들어있던 건물이 매각되어 건물주가 바뀐 것이다. 유리점은 떠나고 그 자리는 옷가게로 변했으며 자신도 지난 20여 년간의 일터였던 그곳에서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장 점포를 얻을만한 경제적 여유도, 마땅히 갈만한 데도 없었다. 어쩔 수없이 자신의 일터였던 그 점포의 외벽 밖 골목으로 또 다시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건물주가 양해를 해 주었지만 골목이 워낙 협소하여 자리를 많이 차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설치한 것이 가정에서 흔히 쓰이던 비닐옷장이었다. 노점이라서 특별한 상호도 필요치 않았고 ‘도장’이라 쓴 입간판 하나만 있으면 되었다. 살림살이라고 해봐야 닳을 대로 닳은 조각대(도장을 새길 때 끼워 고정시키는 도구)하나, 도장칼 몇 개, 다 헤진 국어사전과 옥편 한 권, 인주, 그리고 종류별로 견본용 도장 수십 개와 폐지를 실어 나르는 손수레 하나가 전부다.
하지만 일감은 과거의 십 분지 일도 안될 만큼 줄었고 따라서 벌이가 없으니 생계를 꾸려가기도 쉽지 않아 부인 역시 벌이가 된다면 무슨 일이든 찾아서 해야만 했다. 도장 새기는 일감이 줄어들자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래서 영동 일대에서 나오는 빈 종이박스와 폐지를 수거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 일도 동트기 전 남보다 일찍 일어나서 서둘러야 했고 날씨가 춥다 해서 쉴 수도 없었지만 그래봤자 하루 만원도 안 되는 수입이었다.
수십만 번도 더 새겼을 이름, 이름들...
필자가 김병문 씨를 알게 된 것은 불과 한 달 여 전이다. 취미로 서예를 하고 있는 필자는 낙관 인장을 팔 일이 있어 도장포가 많은 법원과 시청 부근을 다녀보았지만 하나같이 컴퓨터 도장업소 뿐이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도 해보았으나 허사였는데 누군가 영동 골목에 손으로 새겨주는 도장포가 있다고 말해주어 찾아가게 된 것이다. 날씨가 무척 추웠던 어느 날 그곳을 찾아갔는데 낡을 대로 낡은 비닐옷장이 도장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여서 그 앞에 도장이라 쓴 입간판이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지도 모른다.
김병문씨는 두 사람이 들어앉을 수도 없는 그 좁은 옷장 안에서 가스난로로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필자의 이름과 호를 적어주고 낙관인을 부탁하면서 비용은 고하간에 드디어 손으로 새기는 장인(匠人)을 만났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사흘 뒤 도장을 찾으러 간 날 그는 골목 안에서 수거해온 박스와 폐지를 정리 중이었다. 도장은 마음에 들었고 대금을 치르고 나서 몇 마디 대화가 오갔는데 필자는 문득 이 분에 관한 인생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정중하게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했더니 ‘보잘 것 없는 나 같은 사람 이야기를 써서 뭐하느냐’ 며 멋쩍게 웃는다.
하지만 필자의 설득 끝에 며칠 후 다시 시간을 내기로 하고 약속한 날이 되어 다시 찾아갔을 때 그는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지나온 삶의 여정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두 아들은 오래 전 결혼하여 따로 나가 살고 부인은 허리 디스크 증세가 심해 6개월 전 수술을 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거동조차 불편한 상태라 한다. 지금까지 손수 새긴 도장이 몇 개 정도나 될 것 같으냐 했더니 15세에 도장 일을 시작하여 이 노점에서만도 어언 30년이 되었으니 총 60년 세월동안 어림잡아도 수십만 개는 되지 않겠느냐 한다. 자기가 새긴 도장이 누군가의 중요한 문서에 찍히고 그로 인해 좋은 운이 열린 사람도 있지 않았겠느냐면서 그런 생각이 들 때 일말의 보람도 느낀다고 말한다.
요즈음은 하루 종일 앉아 있어봤자 손님이 없어 막도장 너 댓 개 파기도 힘들고 비용도 다른 곳보다 더 싸게 받고 있는데 그나마도 손님의 사정에 따라 주는 대로 받는가 하면 한번은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막도장을 새기러 왔는데 할머니의 차림새나 형편이 너무 궁핍해 보여 돈을 받지 않은 적도 있다 한다. 그 자신조차도 누구보다 힘든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어려운 이를 배려하는 그 마음씀씀이가 정겹고 남다르다. 담배는 원래 배우지 않았고 약주는 조금씩 즐기는 편이지만 몇 년 전 마음을 붙일 곳을 찾다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으나 최근엔 휴일마다 폐지 줍는 시간과 맞물려 미사에 참석치 못하는 일이 많다면서 공연히 미안해한다.
마음을 비우고...
그러면서 가끔 겪는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다름 아닌 어린 학생들이 골목 안으로 들어와 담배를 피우는 등 돌출 행동은 예사고 때로는 담배를 꼬나문 학생이 비닐옷장을 떠들고 75세 된 자기에게 불 좀 빌려 달라는 말을 할 때면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엔 꾸지람도 해보았지만 그래봤자 욕설만 되돌아올 뿐이어서 이제는 아예 마음을 비우고 체념했다한다. 우리나라 교육, 특히 어린 학생 인성교육이 어찌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참으로 걱정스럽다고 개탄하면서 옛적에는 선생님이 된 것을 교편(敎鞭)을 잡다 라는 말로 표현했거니와, 교(敎)는 가르침이요 편(鞭)은 매를 일컬음이니 선인들은 매를 들어서라도 바른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을 덕성으로 삼은 반면에 요즘엔 인권이니 뭐니 떠들면서 아이들을 방치만 하고 있으니 이 지경이 되는 것 아니겠냐는 말도 덧붙인다.
하지만 비록 자그마한 체구이나 그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인다. 비결을 물었더니 ‘제가 워낙 속없이 살아서 그런가보지요’ 하면서 겸연쩍게 웃는다. 속없이 살았다는 것은 어떻게 살았다는 것일까. 하찮은 욕심이나 이해타산으로 아등바등하지 않고 걱정거리를 모른 체하면서 살았다는 것일까. 악착스럽기 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면서 되는대로 살았다는 것일까. 자신도 어려우면서 그 보다 더 딱한 처지의 사람을 보면 가진 것마저 내 주며 살았다는 것일까. 그래서일까, 언제 봐도 온화한 표정, 어린아이 같은 순박한 웃음과 말투에서 어느 현자의 모습을 보는 듯도 하다.
그는 언제부턴가 조금씩 손발 저림 현상이 와 고통을 느끼기도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단 한사람일지라도 자기를 찾아주는 고객이 있는 한 지금의 일을 놓지 않을 작정이다. 그로 볼 때 이 작고 남루한 비닐옷장은 그의 도장(圖章) 일터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혼자일 때가 많은 시간이어서 스스로를 비우고 성찰하는 마음 수련의 또 다른 도장(道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