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발전은 ‘사회적 기업’ ‘사회적 경제’가
토대가 돼야죠“
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 이민호 운영위원
꿈 많은 학창 시절, 때론 방황과 일탈도 하는 가운데 대부분 학업, 미팅, 취업 준비, 결혼 준비 등으로 인생을 설계할 때 이민호(35)가 마주한 것은 불평등과 부조리가 만연한 세상이었다. 일찍 철이 들어서였을까, 세상이 이러한데 혼자서 잘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건 의미도 없고 헛된 일이라 여겼다. 대학 시절의 학생운동은 시대를 통찰하는 시야를 넓혀주었으며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내적 자아를 튼실하게 한 시간이었다. 그는 세상이 좀 더 정의롭게 변화되기를 바랐다.
평범한 가정의 외동이로 자란 이민호는 부모님의 귀여움도 많이 받았지만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으면 어머니는 가차 없이 매를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속담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듯하다. 제일중학교 졸업 후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그는 상고에 진학했다. 평소 예체능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소리샘’사물놀이 동아리 회장을 3년간 맡으면서 선생님들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에서도 국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주대 물류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끼는 어쩔 수 없었던지 교내 풍물동아리를 찾아 들어갔고 타 대학 동아리와 어울려 장단을 맞추는 일도 많았는데 때로 동아리 활동비를 벌기 위해 선배들과 함께 행사장을 찾아다니기도 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풍물 활동을 하면서 참여하는 행사는 주로 농민대회나 노동자결의출범식, 학생연합 등으로서 처음에는 다소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런 활동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자연스레 농민들의 아픔과 원성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시민단체의 힘으로 세상에 알려진 효순이, 미선이 사건 등의 분노와 충격은 그를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학생운동 및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참가하며 자연스레 행동하는 시민운동가로 변모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군산의 현안과 문제점, 그리고 발전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나름대로 열심히 파고들며 자료를 축적했다. 3년 전 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에 가입하여 다양한 직업과 성향, 다양한 연령대의 회원들과의 공론을 통하여 지역의 문제를 찾고 한목소리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은 스스로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더불어 사회봉사활동을 통하여 일반 시민들로부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되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그가 선택한 길은 비정규직 근로자였다. 괜찮은 직장의 정규직으로 입사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장노동자와 하청노동자로 일하면서 맞닥뜨린
현실은 생각 이상으로 참담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이분화 하는 한 글자 ‘비’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생 자체가 달라지고 있었다. ‘비’자는 비인간적 대우와 비천함을 함축하고 있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큰 차별을 둔 근로조건이나 임금은 모멸감마저 안겨주었다. 대부분의 비정규직들은 이런 모순과 부당함에 울화를 느끼고 개선책을 요구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굳건했다. 그 역시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되었던 터라 노동법을 공부하며 비정규직 철폐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가 공부한 노동법은 실제 노동 현장과는 괴리가 컸다. ‘갑’의 지위인 사업주들은 교묘히 법망을 피하거나 편법을 써 비정규직을 고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을’의 목소리는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비정규직 스스로도 체념에 젖은 경우가 많았다. 이 부당함을 철폐하지 않고는 사회 정의가 바로 서지 않을 것이기에 울분의 목소리도 내보았지만 그러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중의 힘이 응집되는 참여자치시민연대에 가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시민운동을 하며 느낀 것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년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를 바라보고 통찰함으로써 가지는 식견과 이념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을 터여서 때로 서로 간에 마찰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끈기 있게 설파했다. 정의로운 사회는 내가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공정한 룰 속에서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는 사회라는 것을 외쳤다. 민주주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4.19때도, 5.18때도, 6월 항쟁 때도 그 중심엔 청년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발걸음은 너무도 더디고 정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때론 뒷걸음질 치기도 했다. 청년들이 무력하면 사회나 국가의 미래 또한 암담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당장 우리 지역의 현안만 보더라도 백가쟁명 식의 이런저런 발전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시민이 같이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 육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경제를 통해 주민협의회가 운영사업 주체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군산의 경제가 벼랑 끝에 내몰린 현실을 걱정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특히 청년층이 앞장서
대안을 찾고 힘을 모은다면 군산 예산 1조가 넘는 상황에서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따라서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정책도 물론 중요하지만 청년의 일자리에 대한 지원은 국가의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점에서 한 시도 미룰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것들은 관 위주의 정책보다는 민간 영역에서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합의 과정을 통해 시행돼야 할 것이며 혈세 낭비 요인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내실 있는 예산 집행이 뒤따라야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