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농촌 운동가, 채성석 위원장
- 농촌, 이대로 두면 공멸
- 농촌의 경쟁력은 좋은 먹거리를 키우는 일
- 농민요양병원 만들고 아름다운 이별 준비해야
- 시민·농민운동의 비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땡볕에 내몰린 농촌 사회에 느티나무와 같은 그늘이 되어주었던 채성석 전국친환경농업협회 정책위원장. 드러나지 않게 농민 운동을 하다 긴 잠행에 들어갔던 그가 10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한국의 농민 운동사를 닦아왔던 인물이다.
그는 “농촌은 새로운 인구의 유입이 없으면 농촌이라는 이름은 사라져버릴 위기”라고 진단했다. “요즘 대한민국이 경쟁력을 잃어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꼽는 게 낮은 출생율인데, 마찬가지로 급격하게 줄어드는 농촌인구가 경쟁력 상실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것이다.
“농촌은 산업이며, 문화이며, 우리의 역사이다. 농촌이 무너지면 우리의 유구한 문화와 역사가 무너지는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회 곳곳에 농촌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그루의 나무라도 심는 게 중요하다.” 그는 농촌을 지켜나가는 일이 한발씩이라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 위기의 농촌, 이대로 두면 공멸
“농촌이 위기이다. 농사가 외면 받으면서 사람들이 떠나버렸고, 그 이후로 전원 생활을 원하거나 귀농하려는 분들이 간간이 들어올 뿐이다. 몇 년 후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20대부터 농민 운동을 해 왔던 채성석, 그는 농민들이 잘사는 길은 좋은 먹거리를 생산해서 도시민들에게 좋은 가격에 팔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대 공룡조직으로 성장한 농협이 아닌 민간 조직에서 그런 일을 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이 모여 만든 ‘우리영농’이 농촌 운동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친환경농업, 학교급식센터 등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농촌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농촌을 살리는 길은 농촌을 지켜나가는 가치를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처럼 청년들이 취업에만 몰리고 취업에 실패하면 인생 낙오자로 몰리는 사회 풍토가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채 회장은 40대에 농협조합장을 했다. 그 이후 공식적인 활동에서 빠져나와 친환경농업협회정책위원장을 맡았으며, 생산자들과 함께 ‘좋은 먹거리’를 길러내는 일에 전념했다.
“공무원 시험에 수십·수백 대 일의 경쟁자가 몰리고, 대기업 들어가는 걸 가장 높은 가치로 삼는다면 이건 청년들을 직업의 노예로 만드는 일이다.” 채 회장은 청년 세대들이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거대한 실업 절벽과 농촌의 몰락을 해쳐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삶은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지만 이렇게 위기일 때는 국가가 그런 일을 대신하고 선도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 농민의 좋은 먹거리 생산, ‘인구절벽’ 앞에선 무용지물
농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또 다른 우리영농법인과 같은 단체를 만들고, 국민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좋은 먹거리를 만들어 공급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또한 “농민을 위해 만들어진 농협은 돈벌이에서 벗어나야 하고, 돈을 벌었으면 농촌을 위해 사용하도록 체질을 개선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협동조합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한 경영개선, 생활의 개선은 물론 그걸 극복하기 위하여 농민들이 스스로 나서야는데 이런 모든 일을 하려면 농촌에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진단이다.
“오늘의 농촌은 ‘지나가던 쥐도 내 형제가 되는 것’처럼 적막강산이며, 식구도 없고 친구도 없다. 적어도 십년 안쪽이면 농촌의 인구 토대는 무너진다고 본다.”
“내 별명이 ‘장닭’이다. 농협 조직에서는 나는 ‘쪼아대는 놈’ 정도로 인식이 박혀 있다. 말하자면 강성이며 타협하지 않는 사람으로 소문 나 있다. 내 자신은 ‘내가 부족하구나, 내 판단이 옳았을까’하는 의문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농촌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한 이른 시일 안에 무너지게 되어 있다. 도시인보다 돈은 적게 벌지 모르지만 농촌에서 여유와 자유가 있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산다고 자랑스레 얘기할 수 있는 시대가 얼른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걸 위해 할 일이 있을 거라고 했다.
“청년실업 문제를 가치 있는 농촌 운동으로 해결하는 방안도 나와야 한다. 유명기업체에 취직하여 숨 막히는 갈등과 경쟁 속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자유로운 생산과 영혼이 숨쉬는 삶을 살 것이냐 하는 문제를 청소년들이 고민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이상주의자와 같은 말이지만 각박한 청년세대에 주는 일종의 잠언과도 같은 말로 해석된다.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어려운 과정이 남아 있겠지만 이건 늦출 수 없는 일이다. 청년들이 농촌을 갈 수 있도록 가치를 새로 만드는 일, 청년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출구로 새로운 활력을 되찾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의 신념이 가슴에 박혔다.
◇ 농촌 할머니·할아버지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없을까
“농협의 일부 젊은 직원들은 할머니들이 뭐라고 하면 무척 싫어한다. 또 험한 세월을 살아 온 분들에게 ‘이제 늙었다’라고 외면한다. 이게 사람으로 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
조합원인 할머니들에게 ‘영정사진’ 하나 달랑 찍어준다. 이겐 말이냐 되느냐. 그 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살았다’라는 기록이라도 만들어 드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라고 했다.
“하늘이 우리의 큰 엄마라고 한다면 지금의 농부들은 우리의 진정한 작은 엄마이다. 내 자식들을 위하기도 했지만 그 분들은 엄마가 되기 전에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농촌의 일꾼으로 일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 이었으며, 지금의 우리나라는 그분들의 목숨으로 세워진 것이다.” 채 위원장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는 속살을 보아도 부끄럽지 않을 동네 이웃들이 서로 돌보면서 생을 마감하도록 ‘농민전용 요양병원’을 만든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했다. 농협이 안된다고 한다면 농민들 스스로가 의료협동 조합을 만들어서 시설을 하고 운영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도 권력만 잡으려고 할 게 아니다. 농민들에게 영혼의 샘을 파주고, 영혼의 샘에 불을 당겨서 조명탄을 쏴주고 그들이 그 길이 어떤 길인가 스스로 찾아가도록 깨워주는 게 어른으로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이다.”
또 “삶의 기술, 존재의 기술, 존재의 아름다움, 즉 ‘인생은 기적이다. 이 기적을 그 날 그 날 새롭게 창조하고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말로 행동으로 삶으로 입증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채 위원장은 어느 땐 인문학자에 가깝다.
그는 “인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경제는 따라오고 불평불만이 없어진다. 나는 그걸 부활이라고 본다. 다시 부흥이 시작된다는 것인데, 물질이 아니라 생명의 부흥을 말한다.” 농촌을 살리기 위한 부흥, 부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뷰 하는 내내 “조합원 어머니들의 삶을 종이때기 한 장으로 마무리하지 말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의미 있는 제언이다. ‘고려장’을 치르지 않고, 안타까운 ‘고독사’을 막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마을이 공동체를 이루고 마음 편한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삶을 지켜주는 농촌요양병원, 실현 가능성 있고, 농촌 부흥을 위해 꼭 실현해야할 가치 있는 도전이다.
◇ 나는 실패한 ‘농민운동가’였다.
“농촌의 가치를 만드는 건 새로운 경제 활동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자인 국민들의 믿음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20대 때부터 농인 운동을 시작한 나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얻도록 돕는 일이었다. 전농을 통하여 대정부 투쟁을 하다가 96년 2월에 고향 성산면 농촌으로 돌아왔다.
30대 중반에 고향인 성산면에 돌아와 농협을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후 그 조직에서 나와서는 농민으로서의 삶을 지키려고 했다.
전국친환경농업협회 정책위원장을 하면서 농민으로서 ‘너의 목숨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좌우명을 농촌 현실에 접목하려고 했다. 그게 바로 참살이, 즉 인생이라고 생각했다는 의지의 농촌운동가이다.
그는 자연과 농부가 합심해서 만들 때 생명의 밥상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채 위원장과 함께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려는 생각들이 모인 ‘우리영농조합’은 친환경농업과 학교급식센터 등을 하면서 지금도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농민운동의 성과는 2000년도 김대중 정부에서 ‘수세폐지’가 이루어졌고, 의료보험도 통합되었다. 그러나 대세는 막지 못했다.
“1994년 11월 23일 쌀 수입개방 등 우루과이 라운드에 협정을 체결하면서 모든 가치가 묻혔다. 그 때 수입개방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피폐한 농촌 현실을 불러왔다.” 농촌 운동의 성과도 많았지만 오늘의 결과는 반성의 측면이 많다고 했다.
“오늘의 농촌은 빈집이 약 80%라고 보면 된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이게 농촌의 현주소이다. 농민운동을 선도했던 한 사람으로써 큰 책임을 느낀다. 수출주도의 우리나라 정책에 농업이 희생된 것인데, 1990년대 쌀 수입개방의 물결을 막아내지 못한 게 끝내 국내 농촌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는 자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농촌을 살리려고 해왔던 격변기의 농촌 운동은 사실상 실패였지만, 아쉬운 건 그 당시의 비대해진 조직의 군살을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이 중단되지 않고 이루어졌더라면 오늘날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쉬움을 넘어 회한이 얼굴을 스쳤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나는 실패한 농민 운동가’였다.”고 그는 자책했다.
◇ 못난 아빠였던 농민운동가의 삶
1980년 광주사태에 대하여 아무도 말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의문과 저항이 그를 학생운동으로 이끌었다. 1983년 학원 자율화 투쟁 당시 우석대 ‘자명고’라는 등사 인쇄물로 학내 투쟁을 하면서 중앙성당과 기독교 회관 가두투쟁에 앞장섰다. 1984년 진보적인 단체인 전북민주화운동 협의회가 결성될 시기엔 군입대하여 88년 3월 제대했다.
얼어붙은 1987년 6월 항쟁이 끝나고, 세상에는 봄이 왔다. 87년도 노동자 대투쟁, 89년 민언투쟁 등이 이어졌으며, 여러 재야운동단체가 만들어졌다.
“88년도에 전 조준호 진보정의당 전 대표의 아버지인 조용술(군산복음교회) 목사 등도 함께하는 군산 옥구민주화운동 협의회를 조직을 했다.” 89년도에 협의회를 만들면서 초대 의장을 강임준 현 군산시장이 맡았는데 채성석은 정책위원이었다.
1989년 2월 군·옥민주화운동 정책위원을 하면서 그는 군산 옥구 농민회 초대 간사를 겸임했다. 조촌동 성당을 만들기 위해 지어놓은 조립식 건물에서 출범식을 했던 농민회가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그가 첫 번째 덤빈 사업이 그 당시 농지개량조합에서 논에 물을 대주는 값으로 나락을 네 가마에서 여섯 가마씩 거둬가던 ‘수세 폐지 운동’이었다.
“수세폐지는 표면적인 이유였으며 근본적인 목표는 ‘쌀값 보장’, ‘농민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는 운동, 즉 ‘농업, 농촌, 농민’ 3농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는 주장이었다.”
그 다음이 의료보험 통합이었다. 1989년 당시 노태우 정권이었는데 군산과 옥구가 의료보험 시험 지역으로 비싼 의료보험료를 냈다. 지역의보 직원이 보험료를 거두러 다녔던 시절인데 옥구지역에서 비싼 의료보험을 통합하라고 요구했다.
1991년도에 전국농민운동연합을 만들었고,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전국의 농민들이 단일조직으로 뭉친 최초인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만들어졌다. 채 위원장은 이 때 전라북도연맹 정책실장을 맡았다.
우루과이 라운드, 쌀 개방(수입개방) 협상이 시작되면서 정책과 투쟁기획 단장 역할을 하였으며, 최고조에 오른 농민 투쟁을 이끌었다고 했다.
“전농의 정책 일을 맡은 동안 수백 번의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지만 내부 조직에서 기획과 지역을 돌며 순회 교육에 나서는데 집중하였고, 단 한 차례도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그 때만 해도 붙잡히지 않고 운동의 동력을 이어가는 게 중요했다.”
그는 1996년 2월까지 6년 동안 정책실장을 하는 동안 아이들이 어떻게 크는지도 모르고 농민회 일만 했다. 참 못난 아빠였다. “개인적으로는 성공한 사회 역사적 삶을 살았지만 농민 운동은 실패라고 본다.”는 게 오늘의 고백이다.
◇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농협의 할 일은 지금 농촌의 실제 상황을 정확히 조사하는 일이다. 농촌은 땅과 저수지 토질은 그대로이지만 사람이 사라졌다. 또한 농사꾼이 사라진 자리에 장사꾼들만 남았다.”
농촌에서 협동과 공존, 공생은 사라진지 오래이며, 이렇게 해서는 농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같다는 말이다.
“농협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에서 농촌에 사람이 들어오도록 곧바로 가능한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 젊은 일꾼들이 농촌을 찾는 건 하루아침에 안되니 다만 그 씨앗을 뿌려야 한다.” 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실현 가능할지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군산의 젊은이들이 농촌에 들어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 젊음을 불태울 수 있도록 뭔가 가능한 미래를 제시해주면 어떨까.”라며, “돈은 조금 못 벌더라도 자긍심 있는 인생, 그 멋진 삶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들의 삶을 배우려고 하거나 함께 동행 하려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일.”이 이제부터 일어나도록 모두가 나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동행을 위해 움막집이라도 만드는 데 지역농협이나 자치단체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질 좋은 농업, 농민들의 땀과 피가 영혼으로 빛날 수 있는 생명의 밥상을 차리는 일을 농민과 농협 조합원들이 함께 해야 한다. 다른 농민들도 참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