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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선’ 넘으면 정말 북한 병사가 총 쏠까?
글 : 조종안 /
2017.12.01 14:33:4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변경선넘으면 정말 북한 병사가 총 쏠까?

 

'항일 유적과 함께하는 겨울 만주기행' 여섯째 날. 오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적지' 참배로 항일 유적지 탐사를 마쳤다. 오후 방문지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시와 연결된 '도문대교'였다. 도문대교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10, 겨울이어서 예상은 했으나 너무 썰렁하고 황량했다. 날도 추웠지만,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더했다.

작년 여름에 왔을 때 공원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우던 아이들도, 두만강에서 뗏목 놀이하던 관광객도,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던 할아버지들도 보이지 않았다. 북한 산천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사진촬영장은 공연이 끝난 서커스단 무대처럼 썰렁했다.

 

중국국경수비대 허락을 받아 도문대교를 걸었다. 그러나 끝까지 갈 수는 없었다. 중간(50m)쯤 한글과 한자(간체)로 적어놓은 '변경선(邊境線)'이 국경이기 때문이었다. 두 나라는 철조망 대신 푸른색(북한)과 붉은색(중국)으로 국경을 구분하고 있었다. 북의 도발을 막아준다는 지뢰밭 휴전선이 창피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남양역에 걸린 김일성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반공세대. 활짝 웃는 김일성 사진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20088월 금강산에서 일어났던 박왕자씨 사건이 떠올랐다. '내가 이 선(변경선)을 몇 발짝만 넘어도 북한 병사가 총을 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뼈아픈 상처를 간직한 철길

 

도문해관 전망대에 오르니 두만강 일대와 북한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리 건너 남양시에서 시선이 멈추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죽은 도시'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들만 을씨년스럽게 서 있을 뿐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온갖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다리 건너 남양시에서 평양, 개성을 거쳐 판문점만 통과하면 집까지 한나절이면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건너지 못하는 두만강을 보면서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평화통일을 그토록 염원하는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이 같은 언어와 국호(조선)를 사용하면서 살아가던 땅인데 곧바로 오지 못하고 너무 먼 길을 돌아서 왔다는 생각에 서글픔이 밀려왔다. 체제와 이념으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북한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던 도문철교(320m)는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중 국경을 베개 삼아 잠자듯 누워 있었다. 철도공사장에 강제로 동원되어 일제 감시원들의 말채찍을 맞으며 돌을 나르던 조선 백성들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비록 뼈아픈 상처를 간직한 철교이지만, 남한, 북한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평화통일의 역군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도문에서 출발한 침대 열차가 청진, 원산,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달리고, 목포로도 이어진다면 통일의 견인차 역할은 물론, 그보다 더한 철도관광 상품도 없을 것이기에. (서울-부산 444.5km, 서울-목포 427.3km, 서울-나진 943.8km)

전망대에는 북한 공예품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 그런데 날도 춥고 손님이 없어 모두 철시한 모양이었다. 천리마가 그려진 작은 사진첩을 내밀면서 "북한 돈이랑 우표에요, 한국 돈도 받습네다, 1만 원입네다!"라고 외치던 앳된 소녀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은 하얀 솜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조국을 ''으로, 조국 해방을 '임은 언제나 오려나'로 은유화해서 만들었다는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를 흥얼거리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추위도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마디마디에서 애절함을 느꼈다. 문득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돌아가신 아버지와 지금쯤은 북한땅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무명저고리 차림의 고모 모습이 떠올랐다. 이산가족으로 살아온 두 분 모두 살아계시면 100세가 넘는데, 북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내 피붙이라고는 너희 고모 한 분뿐이었다"라고 하던 아버지 말씀이 귀에 맴돌았다.

 


 

일제가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던 '도문철교'

을사늑약(1905)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조선을 대신해서 중국과 '간도협약'(1909)을 체결한다. 일제가 조선을 대신해서 맺은 이 협약은 우리 땅 간도(間島) 소유권을 청나라에 넘겨주고 만주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얻는 조건이었다.

협약문에는 조·청 국경을 도문강(두만강)으로 하고,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며 납세, 생명·재산의 보호를 받는다는 조항 등이 들어 있다. 이로써 일제는 조선 영토와 백성을 청나라에 팔아먹는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도문철도 분국지'(1922-1988)에 따르면 일제가 만주에서 가장 먼저 개설한 철도는 1922년 착공해서 1924년 완공한 천도(도문-천보산) '경편철로'였다. 천보산에서 캐낸 은, , 아연 등 지하자원을 조선으로 실어 날랐던 철도로 알려진다. (199597<경향신문> 보도)

19319'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1932-1940년 사이에 돈화-도문(돈도철로), 조양천-개산툰(조개철로), 도문-영안(도영철로), 신흥-동녕(흥녕철로), 화룡-용정(화룡철로), 도문에서 두만강 건너 북한을 거쳐 훈춘까지 연결하는 '훈춘철로' 등 실로 엄청난 길이의 철로를 깔았다.

일제가 만주 전역에 36개 노선의 '침략 철도'를 깔았는데, 동원된 인력은 대부분 조선족 동포와 한족, 화족 등 현지 거주민들이었다. 특히 돈도철로를 건설하기 위해 연인원 2442천여 명이 동원되었고, 도녕철로 공사장에는 3314천여 명이 끌려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원된 인력 가운데 희생자 수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험준한 지형조건, 고온다습한 여름, 영하 32-4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의 혹한 등의 기후조건으로 볼 때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을 것임이 틀림없다. 도문-돈화 철도 경우 사고위험이 큰 교량(88)과 터널(9) 숫자가 이를 뒷받침한다.

만주 일대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이 지배하던 지역이었다. 해서 우리는 기록들을 근거로 만주가 우리 땅임을 천명해야 한다.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사업을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다가는 휴전선 이북을 중국에 내줘야 하는 비극의 날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망대에서 내려와 도문 시내로 들어갔다. 오후 413분 도문 발 심양(선양)행 열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도문대교에서 기차역까지는 버스로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벌써 해를 등지기 시작한 도문역 시계탑 시계는 오후 2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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