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바다 사행로
‘황해남로’와 ‘선유도’
군산대학교 박영철 교수의 <군산과 동아시아 -황해남로 흥망사->
전북 군산시 옥도면에 속한 고군산군도(선유도) 역사가 오롯이 담긴 <군산과 동아시아 -황해남로 흥망사->(2017 민속원)가 발간되어 화제다.
군산대학교 사학과 박영철 교수가 5년 동안(2012~2017) 실증에 노력을 기울이며 상내상외(祥內祥外) 정신으로 쓴 논문을 정리,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은 ‘삼국 시대와 기벌포(지금의 군산)’, ‘통일신라와 군산도(선유도)’, ‘고려·송나라 시대’, ‘고려·원나라 시대’, ‘여말명초 난수산(蘭秀山)의 난과 군산’, ‘진포와 진성창’, ‘왜란·호란과 군산도’, ‘군산도의 왕릉’, ‘고군산진의 흥망’, ‘잊혀진 사행로 황해남로의 역사적 의의’ 등을 심도 깊게 다룬다.
보기 드문 군산지역 역사 서적으로 평가받는 이 책은 고려 시대 황해남로(고려·송나라 사행로) 대문 역할을 했던 선유도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군산, 여·송 사행로 흥망사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중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경>과 조선 중기 작품으로 알려지는 <군산이우도·群山二友圖> 배경 설명이 눈길을 끈다.
국가문화재 지정 예고된 선유도, 본래 이름은 군산도
고군산군도는 선유도, 장자도, 무녀도, 신시도, 야미도, 방축도 등 올망졸망한 섬 20여 개가 무리를 이룬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중 선유도는 본래 군산도(群山島)였다. 조선 초기 선유도에 있던 '진(鎭)'을 옥구(군산)로 옮기면서 지명(군산진)도 따라온 것. 이후 군산도는 ‘옛 古’를 붙여 ‘고군산’이라 칭했으며, 선유도와 인근 섬들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됐다.
선유도(仙遊島)란 지명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노닐었던 섬’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다양한 전설에 어울리게 역사도 유구하다. 또한, ‘선유팔경’이 말해주듯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선유팔경 중 여섯 곳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망주봉과 해질녘 노을은 붉게 펼쳐지는 명사십리와 함께 장관을 연출한다.
고군산군도 중심에 자리한 선유도, 이 섬은 백제 문화가 중국, 일본 등 아시아로 이어지는 해상실크로드 입구가 되기도 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여·송 선박 기항지가 됐으며, 조선 시대에는 수군절제사가 통제하는 수군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승리 후 전열을 재정비한 함선의 정박 기지로 쓰이기도 하였다. 해상의 주요 루트이자 요지였던 것.
숭산행궁(전라북도 기념물 제135호), 오룡묘(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9호), 군산정, 자복사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도 곳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런지 ‘신선이 노닐었던 섬’, ‘역사의 섬’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오래전부터 국가 차원의 명승지로 보존 필요성을 평가받아온 섬으로. 정부는 지난 2월 선유도 망주봉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
고려 시대 바다의 루트였던 선유도
한·중 사행로는 중국의 중원과 요동지역 왕조들의 정치적 부침과 운명을 함께 하였다. 고려 시대 경우 송나라가 건국되고 요나라와 금나라가 요동 지역을 차지하면서 육로는 폐쇄되고 해로를 이용하였다. 바닷길 역시 왕조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는데, 북송(北宋) 시대에는 북로, 남송(南宋) 시대에는 남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과 동아시아 -황해남로 흥망사->에 따르면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시대 선유도는 국제 무역의 거점이자 외교 관문으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고려 시대 선유도는 숭산별묘(崧山別廟)와 숭산왕궁(崧山王宮)을 갖추고 국가적인 수호의 상징과 같이 존숭됐던 섬이었다. 그 시대 바닷길 사행로는 중국 명주-흑산도-군산도-개경으로 연결되었다.
박영철 교수는 선유도 전성기는 고려 시대였다고 주장한다. 고려 인종 원년(1123) 중국 송나라 사신단이 개경을 향해 항해하다가 선유도에 한 달가량 머무는데, 그때 사신단 일행인 서긍이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고려 말 송나라 사신단이 초대형 선박을 이끌고 선유도에 정박한다. 그 사신단을 영접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저술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정치가인 김부식이 배를 타고 내려와 사절단을 맞이한다. 국가 차원의 환영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으며 김부식은 개경까지 동행하였고, 사신단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도 선유도에서 그들을 환송하였다.
“그 시절 선유도는 ‘고려-송나라 바닷길’의 대문으로 지금의 인천국제공항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숭산행궁도 나름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선유도가 중국과 고려를 연결하는 바다의 루트였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선유도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동경(銅鏡)이나 망주봉 일대에서 발견되는 최상급의 청자 파편, 그리고 2013년 무녀도에서 출토된 숭녕통보(崇寧通寶) 등이 중요한 증거이지요.
서긍은 견문록에서 고려를 해국(海國)이라고 칭합니다. 이는 고려가 ‘해양국가’였음을 증언하는 것과 다름없지요. 그러나 숭산행궁은 흔적을 찾기조차 어려운 유물로만 남아 있습니다. 관련 기록도 서긍의 견문록이 유일하고요. 이는 고려 이후 한반도의 해양성 약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궁(숭산행궁)과 수군진까지 갖췄던 천혜의 요새가 무명의 존재가 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박 교수는 “15세기 이후 해상 팽창과 해양네트워크를 꾸준히 형성해온 서구의 근대국가들과 달리 배금정책을 취해온 조선과 명·청제국의 폐쇄적인 국가 운영, 그리고 일제식민지배라는 비극의 역사와도 연계될 것”이라며 “해금령과 공도정책으로 황해남로 연결점이었던 섬들이 버려진 결과는 군산도 수군진이 언제 폐쇄되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역사를 망각시켰다”며 안타까워했다.
‘군산이우도’ 배경 군산인가 선유도인가
위는 <군산과 동아시아 -황해남로 흥망사-> 226쪽에 실린 산수 인물화이다. 조선 중기 문인이자 화가인 조영(趙嶸)의 작품으로 화제는 <群山二友圖·군산이우도>이다. 그림을 그린 의도는 임진왜란 때(1592) 조영이 선유도로 피난 내려와 살다가 우연히 만난 학자 김주(金輳)와 나눴던 우정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남긴 것으로 알려진다.
그림에는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소나무 아래에서 책갑과 술병이 놓인 작은 책상을 옆에 두고 책을 보고 있는 김주에게 조영이 술을 권하는 모습이 담겼다. 두 선비 중 회색 학창의를 입고 책을 들고 있는 인물이 김주, 흰색 학창의를 입고 돌아 앉아 술을 권하는 인물이 조영이다. 이 그림은 조영이 그리고 김주가 시를 지어 첩으로 완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는 그림 설명에서 ‘1593년 문인 화가 조영이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를 배경으로 그린 작품’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에 박영철 교수는 그림의 배경을 지금의 선유도로 단정하기에는 여러 곳에서 의문점이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박 교수는 “왜란의 와중에 선비가 남긴 청아한 필치의 산수화라는 점에 주목한다”며 그림에 대한 두 가지 오해를 제시한다. 첫째는 ‘군산’을 ‘선유도’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그림의 배경도 당연히 선유도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조선 시대 산수화는 대개 실경 산수화가 아니라 심의(心意)를 표현한 문인 취향의 산수화이기 때문에 실경 군산도를 그렸다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며 당시 기록들을 거론한다.
“그림은 물론 관련 발문이나 행장 등에도 조영과 김주가 만난 곳을 ‘군산’이라고만 쓰고 있지, ‘군산도’나 ‘군산포’를 거론한 곳은 한곳도 없어요. 저는 그림보다 그림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에 주목합니다. 화가 거주지가 군산도(선유도)인가 군산포(육지)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군산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볼 때 군산도라는 항간의 설명은 동시대의 역사적인 상황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의 연유에 대해 가장 오래되고 직접적인 설명을 하는 것은 김주가 쓴 <군산이우도서>입니다. 조선 시대 산수도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가 나오기 전에는 대개 사대부의 관념에 따른 이상적으로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어서 조영의 그림을 실경산수도로 보고 군산도를 배경으로 그렸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군산이우도>가 전란을 배경으로 선비의 우정을 주제로 그려진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이상적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군산이 군산도인지 금강하구의 군산포인지 불분명한 것은 당시 해양사적인 문제 즉 도서나 항로 상황과 황해남로 소멸 등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문제로 생각된다. 고려~조선의 시대적 변화 차이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라며 “우선 작가인 조영과 그 친우인 김주 두 가족이 어떻게 군산으로 오게 됐는지 구체적인 역사적 설명으로 접근해야할 것”이라고 부연한다.
박 교수는 “이경석(李景奭:1595~1671)의 <처사성공행상(處士成公行狀)>에 따르면 조영의 장인 성로(成輅)도 왜란을 피해 강화도에서 뱃길을 전전하여 ‘호남의 해우(海隅)’로 온다. 여기에서 해우는 해안에서 우묵하게 들어간 곳, 즉 포구처럼 생긴 해안가(군산창)를 말하지 바다에 떠있는 섬(선유도)을 말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해우는 호남의 조세미를 운반하는 군산창이 있던 곳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음식이 풍부했다는 사실 등은 효성이 지극했던 성로가 홀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계속 드릴 수 있는 효행도 가능한 지역이었던 점 등을 예로 든다. 임진왜란 당시 쓰여진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도 군산창 관련 내용이 실렸다.
이어 박 교수는 임진왜란 때 선유도가 많은 사람이 살만한 거주환경을 갖추고 있었는지. 조영과 김주가 피난 간 곳이 과연 지금의 선유도인지. 아니면 군산포인지 문제를 하나씩 풀어간다. 이어 각종 문헌과 묘지명 그리고 당시 시대상황 등을 조명하면서 <군산이우도> 배경은 지금의 군산 지역, 즉 섬이 아니라 육지 ‘군산포’라고 결론짓는다.
<박영철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에서 역사교육과 동양사를 배우고, 일본 교토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법제사와 사회사를 전공하고 있으며 현재 군산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2006~7년 캐나다 UBC 대학 객원교수를 지냈고, 2012년에 황룡학술상(군산대)을 수상했다. 주요 논저로 「나라카에서 지옥으로: 불교의 번역과 중국문명」, 「해태고: 중국에 있어서 신판의 향방」, 「송사의 출현을 통해 본 송대 중국의 법과 사회」, “Balance and Balancing Weight: A Study of the Conception of Justice in the History of China and its Relationship to the Modernization of Chinese Legal System”, 「『삼국지』와 삼국시대의 정통론에 대해서」, 『명공서판청명집 호혼문 역주』(소명,2008), 『왜 유비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2010), 「동아시아 관료제의 근대성 논의」 등이 있고, 역서로 『논어』(미야자키 이치사다이진우님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