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100주년 기념관에 기생 이름도 새겨질 것
반갑고 신선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
기생(妓生), 그들이 어느 시기 이 땅에 등장했고, 소멸되었는지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제정일치 사회에서 모든 의식을 관장하며 사제(司祭)로 군림하던 무녀(巫女)가 기생의 기원이라는 견해에 무게가 실린다. 따라서 기생 역사를 조명할 때 삼한 시대와 삼국 시대는 형성기, 고려 시대는 발전기, 조선 시대는 기생문화를 꽃피운 성숙기로 구분할 수 있겠다.
조선 시대 기생은 대부분 궁중이나 지방 관아에 속한 관기(官妓)였다. 그들은 팔천(八賤)에 속했음에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기예가 뛰어난 명기는 ‘재상 기생’ 소리를 듣기도 했다. 반상제도 사회에서 활동에 제약을 받았던 관기들은 갑오개혁(1894) 때 천민 신분에서 해방된다. 1907년에는 관기 제도 폐지로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러나 1908년 9월 <기생 및 창기 단속령>이 제정되면서 일본 경찰의 감독 및 감시를 받게 된다. 이후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기생 문화는 철저히 왜곡, 변질된다.
반갑고 신선했던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
“독립운동은 애국지사들만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상인들은 철시 운동을 벌였습니다. 나무꾼, 기생(妓生), 맹인, 광부들, 이름도 없이 살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누이들까지 앞장섰습니다.”
지난 3월 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 제99주년 삼일절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기념사의 한대목이다. 무명 독립운동가 유족들에게 보람과 긍지를 심어주는 희망의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와 누이, 기생도 언급했다. 이는 독립운동을 말할 때 유관순 열사를 제외하면 남성으로만 인식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뛰어넘은 것이어서 관심을 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아이에서 어른까지,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상인·나무꾼·기생·맹인·광부 등 일반 백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3·1운동 진행 과정을 담담하게 열거하면서 “2020년 개장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관에는 나무꾼도, 광부도, 기생도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이름으로 새겨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점으로 치닫던 1919년 기생들은 3·1운동에 앞장서 참여하였고, 옥고를 치른 기생도 많았다. 국채보상운동 때도 패물을 내놓는 등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독립지사를 돕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각종 출판물에서 쉽게 발견된다. 그럼에도 정부수립 70년이 지나도록 기생들의 의기(義氣)를 거론한 대통령은 한 명도 없었다. 문 대통령 기념사가 신선하고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다.
3·1운동으로 옥고 치른 기생들
삼일절 100주년에 맞춰 국가기록원이 발간한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에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기생 이름이 여럿 등장한다. 수원 기생조합 김향화를 비롯해 해주 기생 문응순, 김해중월, 이벽도 통영 기생 이소선, 정막래 등이다.
그중 김향화는 동료들과 자혜병원으로 검진을 받으러 가다가 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김향화가 선두에 섰고 뒤따르던 기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들은 검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펼쳤으며 시위를 주도한 김향화는 6개월 옥고를 치렀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기생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였다. 기생들이 앞장서자 시민 3천여 명이 합세하였다.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이때 기생 조합장 문월선을 비롯해 김해중월, 김월화, 문향희, 문응순, 이벽도, 문향희 등 기생 여덟 명이 구금되었다.
기생들의 만세운동 열기는 경남 통영까지 이어진다. 통영 예기조합 기생들이 패물을 팔아 광목을 구입해 만든 소복 차림으로 태극기를 들고 시위하다가 이소선, 정막래 등 기생 세 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6개월~1년의 옥고를 치른 것. 이밖에 상해에서 잠입한 임정 요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자신이 직접 독립단체 정보원으로 활동한 기생도 있었다.
예능과 미모가 뛰어났던 진주 기생 산홍은 친일파 이지용(을사오적)이 거금 1만 원을 주며 소실이 되어달라고 유혹하자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춘외춘도 경무총감이 독립지사 동태를 알려달라며 돈뭉치를 건네자 이를 뿌리친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 기생학교 출신 주산월(본명 주옥경)은 의암 손병희 선생이 기미독립선언서 발표 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자 부근의 초가를 얻어 아침저녁으로 공궤하였다. 1년 남짓 옥고를 치르고 인사불성이 되어 병보석으로 출소한 의암은 주산월 품에서 영원히 잠든다. 그 후 주옥경은 의암의 아내로,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 을사늑약(1905), 경술국치(1909) 등 치욕적인 망국의 현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이 땅의 기생들, 그들은 일제의 탄압과 감시에도 의기를 저버리지 않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了)는 “우리가 처음(1919년) 경성에 왔을 때 화류계는… 기생 800명 모두가 살아있는 독립격문이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한다.
기생은 전통예술 계승 발전시킨 장본인
삼일운동 이후 기생들은 연대 의식으로 집단성을 확보해나간다. 영화 제작과 레코드 산업이 시작되는 1920년대 중반부터는 대중을 상대로 예술을 선보이며 근대 예술계(가수, 배우, 모델 등) 주류로 편입하기에 이른다.
대중스타로 떠오른 기생들은 신여성의 상징이 된다. 한국 최초 무성영화 <월하(月下)의 맹세>(1923)에 출연한 이월화, 일본 유행가를 우리말로 처음 부른 도월색, <장한몽>(원제:金色夜叉)을 부른 김산월 등이 대표적이다.
기생들은 엔터테인먼트 시초였고, 한류 원조였다. 1902년 최초 극장인 협률사가 개관했을 때 첫 무대를 기생들이 장식했으며 1910년 봄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초빙된다. 음반을 취입하고 영화출연 섭외 1순위가 기생이었다. 1922년 여름 일본을 거쳐 내한한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에게 <검무>, <승무>, <사고무> 등을 선보여 매혹시켰다는 기록도 전한다.
군산 기생들은 사회봉사 활동의 하나로 자신의 재능을 자선행사와 모금 운동 등에 활용하였다. 일종의 ‘재능기부’였다. 극장, 공회당 등에서 열리는 적성야학교 돕기 행사, 신파극 공연, 재만 피란 동포 및 국내 수재민 구호 성금 및 의연금 모금에 동참하였다. 가무가 뛰어난 기생들은 경성방송국에 출연했으며 각종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명성을 떨쳤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 촘촘한 감시망 속에서도 선진 문화를 가장 먼저 체화하면서 전통 예술을 계승 발전시킨 이 땅의 기생들. 그들은 예술가로서 일찍이 양성평등 시대를 열었으며, 군산권번 기생들은 1926년 1월 조선 최초로 군산노동연맹에 가입, 화류계에 혁신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자치운동을 이끌었으며 권번을 주식회사로 만들어 주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삼일절 기념사에서 밝혔듯 2020년 개관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관에 기생들도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이름으로 새겨지고, 전통 문화예술 계승 발전에 공이 큰 예술인으로 기억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