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선족자치주에서 중국말 쓰노!"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와서
항일 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 넷째 날, 오후에 잠시 들렀던 길림성 왕청(汪淸)현이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는 가이드 설명은 놀라웠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소속된 작은 도시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주는 발을 디디는 곳마다 항일 유적지로 선조들이 흘린 피와 땀의 흔적이 남아 있고, 얼이 서려 있었다. 생계를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간 2백만 동포가 척박한 땅을 옥토로 개척하였고, 그들 대부분이 독립군 활동을 도왔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인원을 점검한 버스는 길림성 연길(옌지)로 방향을 잡았다. '조선족자치주' 위기. 중국 정부가 조선족에게는 선심행정으로 도시로 이사를 회유하고, 한족(漢族)은 정책적으로 시골로 이주시킨다는 설명은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회유에 말려들어 대도시로 떠난 조선족 숫자가 적잖단다.
잘 달리던 버스가 지치는지 힘겨운 소리를 냈다. 오르막길인 모양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바싹 마른 나무숲이 산허리를 휘도는 구름을 병풍처럼 가려주면서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의 유작을 감상하는 것 같아서였다.
중국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들 하는데 '되는 것도 많고 안 되는 것도 많은 나라'로 바꾸고 싶었다.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그런지 항상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비쳐지기 때문이었다.
자리가 잡히자 가이드는 청소년을 상대로 퀴즈풀이를 했다. '안중근 의사 호 알아맞히기',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 호 맞히기', '독립운동가 열 분 성함 호명하기' 등을 해서 정답을 맞히는 학생에게 상품권을 줬다.
도마 안중근, 우당 이회영은 쉽게 맞혔는데 독립운동가 열 분 성함 호명하기는 한 사람도 통과를 못하고 6~8명 선에서 그쳤다.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으나 웃고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속으로 손을 꼽아보니 나 역시 학생들과 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조선족자치주에서 중국말 쓰노. 여기는 조선이야!'
차들의 통행이 잦아지는 것으로 연길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학생이 "여기 차 번호판은 '吉'자로 시작하네!"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가이드는 오녕성 심양(선양)발 연길행 비행기에서 가슴이 짜릿했던 목격담을 털어놓았다.
"3년쯤 되었나. 심양에서 연길 가는 비행기에서였어요. 국내선이어서 중국어와 영어로 안내 방송을 했어요. 그런데 말쑥한 차림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야이 간나시키들아, 조선족 수도로 가는 비행기에서 왜 꼬무랑말로 안내하노!'라며 격노하더라고요."
가이드는 할아버지 표정으로 볼 때 트집을 잡거나 술김에 하는 얘기가 아닌 것 같았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으며 '이따위 비행기는 폭파시켜야 해!'라고 할 때는 가슴이 철렁했었다며 말을 이었다.
"조선족 사회에서 70대 이상은 대부분 중국어를 모릅니다. 우리말만으로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되니까 배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민족의식이 강한 노인들은 연길에서 용정 가는 버스표를 끊을 때도 큰 소리로 '용정!'이라고 외칩니다. 젊은이가 요녕성을 '랴오닝성'이라고 발음하니까 '왜 조선족 자치주에서 중국말 쓰노, 여기는 조선이야!'라며 혼내는 노인도 봤어요."
가이드는 혼나면서도 그러한 노인을 존경스럽게 생각하는 젊은이도 많다며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한·중 수교(1992년) 이후 부모가 한국으로 나가는 바람에 학생들이 모자라 통폐합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는 것. 조선족 학생 70%가 조선어를 모르는 것도 큰 문제라며 앞날을 우려했다.
부모가 한국이나 대도시로 진출하면서 할머니 손에 자라는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과일을 사 들고 양로원을 찾아 노인들에게 신문도 읽어드리고, 노래도 불러드리고, 안마도 해 드리는 등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남다르단다.
요즘엔 할머니가 손자·손녀를 거둬주고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경제적인 도움을 못 주었으니 거둬주는 게 당연하다는 노인이 많단다. 옛날 같으면 자연스러운 양육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다니, 만주도 그만큼 자본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6개월만에 다시 찾은 연길
연길 시내로 접어드니 자동차 라이트와 네온불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면서 우리를 환영했다. 버스로 국경을 넘어온 기분이 들었다. 남북한 합한 면적의 44배라는 중국. 땅덩이가 워낙 넓고 도시와 도시 사이에 이동시간이 길어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얼빈도, 연길도 두 번째 방문인데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작년 여름 방문했을 때 이틀 동안 촬영한 사진을 '외장하드'에 저장해준 휴대폰 가게 주인이었다. 또 오면 들른다고 했으니 시간을 내서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동안 머물 '대주호텔'(大洲酒店)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반점(飯店)은 중국 음식점을 말한다. 그런데 만주는 호텔을 '飯店', 나이트클럽이 딸린 호텔은 주점(酒店), 여관(旅館)은 여점(旅店)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방을 배정받고 들어가 여장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길바닥에 눈이 얇게 쌓여 있고, 살갗을 스치는 바람도 차가웠다. 하지만, 하얼빈처럼 매섭지는 않았다. 한대지방에서 온대지방으로 이동한 것 같다며 신기하다는 일행도 있었다.
식당은 규모가 크고 청결했다. 주인은 조리사 면허증을 가진 조선족이라고 했다. '피망만두'를 잘한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별미였다. 특히 연잎에 싼 고소한 찰밥은 한국의 '대나무통밥'처럼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났다. 반찬도 10종류 가까이 나왔는데 나름의 특이한 맛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신안마, 심양은 50위안 연길은 30위안
저녁을 맛있게 먹고 단체로 안마를 받으러 갔다. 안마 이야기는 버스에서부터 나왔다. 만주에 도착하던 첫날 효과를 봐서 그런지 모두 환영했다. 칼바람을 맞으며 이어진 유적지 방문과 열 시간 가까운 버스 여행으로 모두 심신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안마소는 고층 건물 5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흘 전 들렀던 심양 안마소보다 훨씬 컸고, 종업원도 어림잡아 1백여 명은 될 것 같았다. 가이드는 이 정도 규모와 시설이면 예약을 해야 안마를 받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대기실을 살짝 엿보니 안마사로 보이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그늘에서 둬야 제격인 장기. 중국에서는 꽁꽁 언 길바닥에 장기판을 깔아놓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두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심양 안마소는 전신안마가 50위안이었는데 연길은 30위안이었다. 요금이 싸서 그런지 안마 기술은 심양에 비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성을 들여 한 시간 가까이 해주어 몸이 유연해지고 기분도 상쾌했다. 학생들도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며 좋아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던 택시 요금
안마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인솔자가 호텔 간판이 인쇄된 명함을 한 장씩 나눠주었다. 택시 기사가 말이 안 통하는 한족(漢族)이 대부분이라며 명함을 내밀면 데려다 준다고 했다. 하라는 대로 4명씩 조를 짜서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요금이 6위안 나왔다.
조금 있으니 여학생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우리는 23위안이나 나왔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9위안 나왔다는 사람, 8위안 나왔다는 사람도 있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가이드가 여학생과 함께 택시로 다가가 기사와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6위안을 주고 해결했다.
사태를 해결하고 돌아온 가이드는 심야 요금표를 누른 모양이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사가 거의 한족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창피하고 추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포가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연길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행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안마도 했으니 내일을 위해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해서 곧장 방으로 올라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지출한 돈과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메모하고 자정쯤 잠자리에 들었다. 만주에서의 하루가 또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