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2012년)로 개원 90주년을 맞는 ‘군산의료원’은 종전의 건강검진센터를 군산지역 최대 규모의 ‘쌍천(双泉) 건강증진센터’로 중축하고, 암 조기진단 및 치료에 꼭 필요한 ‘Pet-CT’(양전자방출 단층촬영기)를 도입하여 암센터 설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300평 규모의 쾌적한 공간에서 이동하지 않고 한번 촬영으로 전신의 암 발생 여부를 검사할 수 있는 ‘원스톱 시스템(One-Stop System)’으로 검진을 받으며, 군산시민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응급 심혈관센터까지 갖춰짐으로써 명실상부한 종합병원으로 면모를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군산의료원은 1922년 2월 일제가 지금의 군산시 금동 월명공원 아래에 설립한 '자혜의원'으로 출발한다. 자혜의원은 1925년 4월 '도립 군산의원'으로 바뀌고, 1983년 7월 지방공사 '군산의료원'으로 전환됐다가, 1999년부터 원광대학교에서 위탁 운영해오고 있다.
다시 태어난 ‘쌍천(双泉) 건강증진센터’, 달라진 점
‘쌍천(双泉) 건강증진센터’ 김성겸(61) 센터장은 “군산의료원은 군산 유일의 검사의학과 우수 검사실 신임인증 기관으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학병원급 검사를 하고 있다”며 “일반 검체는 접수에서 진단까지 1일을 초과하지 않으며 암 진단 특수검사도 3일 이내 결과를 알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김 팀장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도 있듯 증상이 없을 때 검사해서 조기에 발견하면 적은 비용으로 쉽게 치료할 수 있고 후유증도 없다”며 “위내시경 검사를 통한 조기 위암 발견과 자궁경부세포검사를 통한 자궁암 발견”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일제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세운 ‘자혜의원’
을사늑약(1905년) 이후 일제는 호남평야의 관문 '군산'을 쌀 수탈의 전진기지로 삼는다. 또한, 대규모 농장을 소유한 일본인 지주와 본토에서 이주해오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자국민의 의료혜택을 위한 현대식 병원 설립을 추진한다. 1909년 12월 전라북도 전주, 충청북도 청주, 1910년 1월 함경남도 함흥에 각각 설립된 ‘자혜의원’(慈惠醫院)은 이듬해(1910년) 10곳이 증설되면서 도마다 1개씩(13곳)이 되었다. 군산에는 1922년 전북 남원, 전남 순천과 함께 세워진다.
일제는 1921년 5월 수륙제를 지내던 수덕산(수륙산)과 지금의 월명공원 사이 땅(현 해양경찰서 자리)을 매입, 10월에 조선총독부제령으로 '군산 자혜의원 설치'의 건을 포고하고 건물 신축공사를 시작, 이듬해(1922년) 2월 15일 관립 '군산 자혜의원'을 개설한다. 병원 건물은, 수덕산 토석을 채취하여 해안매립 및 하치장을 건설하고, 3천 톤급 기선 3척이 정박할 부잔교 3기와 육상 창고, 군산역-부두 사이에 철도 등이 놓이는 3차 축항공사 기간(1916-1933)인 1922년 5월 완공된다. 1938년 평양의학전문학교 뢴트겐과 강사 '하라 야스로(原保郞)'가 당시 28개 주요 관 공립병원을 대상으로 했던 설문조사 결과가 담긴 논문(조선 의학회 잡지 제28권 1호 112-118)은 군산 자혜의원을 불치의 병이었던 '폐결핵을 진료하는 뢴트겐 방사선 시설을 갖추고 개원한 병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1922년 8월 진료를 시작한 자혜의원은 부지 4818평에 건물 5동과 본관, 전염병실, 간호부 기숙사, 소독실, 영안실, 해부실 등을 갖추고, 기숙사 3동을 따로 지었다. 그 후 환자가 증가하면서 업무량이 늘자 1929년에는 병실 1동, 기숙사 1동, 매점 1동을 중축하였다. 자혜의원 주변은 봄이면 상춘객이 몰려드는 군산공원과 해망굴, 신사, 신사광장, 공회당, 은행 사택, 안국사(현 흥천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세관과 나루터와도 한 마장 거리여서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의사를 의학사, 의사, 의생으로 분류하여 칭하였으며 약사는 약제사라 불렀고, 간호사는 간호부라 하였는데, 간호부들은 '몸뻬'라는 일본식 통바지를 입고 근무했다고 한다. 자혜의원은 3년 후 명칭과 운영체제가 바뀐다. 1923년 간도 대지진은 재정 긴축의 정도를 강화시켰고, 총독부는 본국(일본) 자금으로 보충해나갔다. 그러나 일본에서 시작된 재정 긴축의 여파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총독부는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운영 주체를 도(道)로 이관한다. 1925년 4월 1일 '조선도립의원 관제'가 공포되면서 당월 15일 '군산 자혜의원'은 '군산 도립의원'으로 개칭된다. 이와 함께 토지, 건물, 각종 의료기기와 장비가 모두 도 지방비에 이양되고 관리 운영도 군산부에서 전라북도로 이관되었다. 1941년 조선총독부 후생국 위생과가 작성한 <조선도립의원 요람>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자혜의원' 증설이 필요했다"면서, "도립의원은 원래 '도 자혜의원'으로 칭했으며 국가경영에 속한 것이었으나 대정 14년(1925년) 도(道) 경영으로 이관됨과 동시에 '道立醫院'으로 개칭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장항에 사는 소작농 아들(7세)이 열차에 치여 응급치료 후 군산 도립의원으로 보냈으나 곧 사망했다는 내용의 신문(1932년 12월 16일 중앙일보) 보도는 충청지역 주민도 군산 도립의원을 자주 이용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1930년 오룡정(현 오룡동)에 '부립회생원(府立回生院)'이 있었으나 시설이 미비하여 1932년 7월 군산 도립의원 구내에 별도로 독립하여 병사(病舍)를 지었다. 병실 12개, 환자 24명을 수용하는 건물이었는데 경영 관리는 군산 도립의원에 위탁하였다. 군산 도립의원(원장 아리마조지로)은 개원 이후 통원환자 6만5000명, 시혜환자(施惠患者) 1만4000명(1934년 12월31일 기준)으로 서울을 제외한 평양, 대구 다음으로 환자가 많았고, 직원은 의관 6명, 의원 4명, 약제사 1명, 서기 2명, 간호부 25명, 고용인 6명으로 나타나 있다. 일본은 자국의 의술을 과시하려고 본토에서 실력 있는 의사를 선발해서 보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외과, 내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안과, 소아과, 치과의는 물론 주임 서기까지 일본인이고 시료부장(노윤모)만 조선인이었다는 것.
1934년 12월을 기준으로 군산에는 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 1개, 일본인이 운영하는 병원 8개가 있었으며 조선인이 원장인 병원은 안동병원(권태형), 세창병원(강세형), 동화병원(이도준) 등 3개에 불과했다. 지금도 평화동 옛 '농방골목'에는 서양식으로 지어진 세창병원 건물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치과는 10개소가 개업하고 있었다. 일본인 경영업소가 아홉 곳이며 소화통 1정목(지금의 중앙로 2가)에 있었던 사은당(四恩當 원장-황하성) 치과 한 곳만 조선인 경영업소였다. 치과는 60년대에도 전치과·이치과 두 곳에 불과했다. 1937년 9월 말까지 도립의원은 전국에 36의원 1분원 4출장소가 문을 열었고, 해방 무렵에는 46개로 늘어나 도마다 3개꼴이 되었다. 군산 도립의원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조선인 운영체제로 바뀌면서 그해 11월 쌍천 이영춘 박사가 원장으로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