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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의 화가, ‘군산의 밀레’ 최락도를 찾아서
글 : 이진우 /
2018.04.01 11:36:5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은둔의 화가, ‘군산의 밀레’ 

최락도를 찾아서 

 


 

군산 사람, 화가 최락도

 

 ‘최락도’라고 하면 3선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제 출신 정치인을 우선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정치인 못지않은 내공을 가진  ‘군산 촌놈’ 최락도 화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지만 불우했기에 더욱 붓을 꺾지 않은 그의 이야기는 군산 땅에 작은 울림을 준다. 

 1940년생인 ‘홍대미대’ 출신의 군산 사람 최락도. 군산의 명문 군산고를 나왔고 그림 하는 이들의 엘리트 코스인 홍대 서양화과를 나왔으니, 그는 한 때 군산에서 독보적이었다. ‘미스터 블루’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는 전성기 때엔 추상의 세계를 탐닉했다. 

 교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를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애증이 겹쳤고, 불같은 성격의 그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가슴 터지는 사연들을 삭이지 못한 게 하반신 마비로 이어지면서 그는 긴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물감을 풀고 색을 입히고 있었다. 

 홍대 시절, 주린 배를 물로 채우면서 스승인 ‘수화 김환기’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그가 내년이면 여든을 맞는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덥수룩한 수염도 간 데 없다.

 불우한 시기를 보내면서 추상의 세계를 떠나 한 동안 반추상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그는 이제 필생의 작업을 준비 중이다. 화단의 풍운아로 기억되는 반항적 이미지와 절망했던 예술적 깊이를 떠올려주는 그런 어두운 덧칠의 세계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한창 때인 40대의 최락도는 서울 인사동 화랑가에서 검은색 톤의 추상화로 미술계를 압도했다. 그는 화가들이 흔히 죽음의 색이라 피했던 짙은 청색과 검은색 톤을 당시에도 반항적으로 사용했다. 그런 정열과 도전을 다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때론 악동 같았고, 때론 돈키호테 같았던 ‘방황과 질주’의 화가 최락도. 그 또한 세월 앞에서 어느덧 원로가 되어버렸다. 

인생 팔십, 다시 추상의 세계로

 

 못다 피운 예술혼에 방황했던 최락도의 안식은 아마도 땅에 묻힐 때에야 얻어지리라. 화가로 살기에 현실은 너무나 치열했고 높았기에 그는 병들어갔다. 그의 말처럼 오늘날 살아 있는 게 기적이다. 

 요즘의 그는 전동카에 의지하며 산다. 군산의 어려운 이들이 모여 사는 나운동 주공 4차 아파트. 그 흔한 화실도 없이 10평 아파트 한쪽에서 홀로 밥을 끓이고 틈틈이 캔버스 앞에 선다. 

 기억 속에서 멀어졌던 그가 다시 강렬한 색채로 다가섰던 그 때의 감동과 충격은 컸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틀거리며 걷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붓질은 예전의 기량을 뛰어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느닷없이 몸이 마비되는 병으로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던 반항의 화가 최락도. 지난 2011년 6월 그가 10년 공백을 깨고 전람회를 열었을 때, 추상의 세계가 아닌 비구상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날고뛰던 야생마 기질도 홀로 어둔 밤을 건너는 날이 겹치고 겹치면서 순해졌다. 작품도 마찬가지이리라. 마음이 가는 데 작품이 있으니 보나마나다. 요즘 그는 동부교회에 나가 하느님을 찾는다. 어두운 밤하늘에 한 줄기 빛을 본 것이다

 그가 다시 추상의 세계로 돌아온다고 한다. 인생 여든을 정리하는 내년도 마지막 전람회, 그 때가 기다려진다. 







화가 최락도와의 인연, 그리고 반항

 

 덥수룩한 머리. 헝클어진 매무새. 한쪽이 빈 듯싶은 쓸쓸함. 비비꼬여진 머리카락 틈새로 보이던 ‘광기(?)’ 비슷한 열정. 아니 분노 혹은 반항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은 세상에 대한 시각. 내가 20여년 전 처음 본 최락도의 분위기는 이랬다.

 야생마 같았던 그의 인상은 회현면 작업실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 한 점과 함께 떠올려지곤 했다. 강렬하게 남아 있던 그의 짙은 청색류의 화폭 세계를 말이다. 살아온 그대로를 내보이던 그 날은 지금도 생생하다.

 홍대 서양화과 출신들 중 그의 스승 김환기 선생이 특별히 총애할 만큼 최락도는 재능과 재질이 뛰어났다. 한국의 서양화단에 거목인 ‘수화 김환기’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홍대시절 닥치는 대로 미술공부를 섭렵했던 그였다.

 한 때는 교수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전업을 하면서 오로지 작품으로 승부를 내고자 했다. 그러나 전업 작가 생활은 추위와 굶주림, 절망과 좌절이라는 천형의 굴레를 지고 이어졌으며, 그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그의 예술가적 정신은 점점 메말라갔다.

 나 또한 새벽을 더듬어 글을 쓰는, 말하자면 시인의 길로 전업 작가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가 이 길을 선택한 마음이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다만 그 때에는 그의 돈키호테적 언행과 절제되지 않은(그는 자유라고 강변했지만) 생활 패턴에 대해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시인이었던 내 눈에 그의 자유와 사상과 언행이 이렇게 비쳐졌음에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

 

기억의 행로, 세상을 담기 위한 몸부림 

 

 그가 내놓은 한 점의 작품과 마주했다. 회청색의 바탕에 흰색(혹은 회색이 덧칠해져 있었을 것이다) 톤으로 사람의 형체가 무수히 새겨져 있고, 그 둘레는 커다란 원으로 덮인 그림이었다. 

 나는 그림 속의 수 많은 사람군상(그는 사람이라고 말 한 적이 없다)을 보면서, 점 하나를 찍은 것 같은데 모두 다른 형태의 사람으로 완성시킨 그의 능력에 대해 속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그림의 의미를 찾느라 부단히 애를 썼다.

 기억에 남아 있기로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남겨진 점들을 보면서 세상 만물의 이치를 생각하기도 했으며, 천차만별의 인생 행로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짙은 청색과 회색톤의 바탕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탄생을 위한 고통의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으리라 짐작했다.

 압권은 그 모두를 감싸 안은 타원형의 세계였다. 세상을 모두 덮을 것 같은 그 이미지 앞에 나는 숙연했으며, 뜻 모를 엄숙함에 사로잡혔었다. 그렇게 그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되어 흘러갔다.

 오늘의 그는 회현 작업실에서 보여주었던 점의 세계마저도 벗어나려고 한다. 단순화 시키는 이미지의 해체, 혹은 이미지의 통일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무지한 나의 생각일 뿐, 그는 한 번도 그렇다고 말한 바 없다.

자아 탈출의 고행, 검정색에 대한 탐미

 

 고난과 역경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색을 대하는 그의 몸부림이 그대로 전해오는  검은색 톤의 화면. 그의 작품 대부분의 밑그림은 그런류이다. 군산사람 최락도만이 가진 일명 ‘최락도류’라고 이름지어본다.

 응어리진 무언가를 불쑥 내뱉을 것만 같은 어두움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무엇을 그리고자 한 것일까. 새로운 탄생의 의미인지, 아니면 스스로 좌절과 억눌린 심리 상태를 드러내 놓은 것인지 궁금하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 그냥 검은 게 아니라 그가 신봉하는 듯한 짙은 청색류도 혼합되어 있다. 그 바탕 위에 서야만 새로운 길이 찾아졌고,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졌다. 

 죽음 속에서라도 살아나고 싶은 단 하나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오직 한 사람 어머니만이 손 모아 고대했던 화가에의 길. 주변 모두가 냉소했지만 그 길을 가기위해 화가 최락도는 절망과 고독, 그리고 반항의 세월들과 싸워야 했다.

 그게 바로 검정색의 질주였을 것이리라. 반항과 자기 분출의 정점에 검정색이 있다면 그 색들의 조화는 때때로 자아 탈출 비슷한 감동의 영역을 내놓기도 한다. 화단의 풍운아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는 갈 길을 갔다.

 그의 작품들을 보노라면 우울하고 어두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내면세계를 폭발시키는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놓는 것 같다. 마치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들이 들판을 가로지르듯이 말이다.

 

최락도의 우주류,  ‘가을이 가는 소리’를 기다리며

 

  ‘밀레’ 의 길을 가고자 했을 때부터 최락도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색이 바로 밝은 청색과 회색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청색을 쓰는 이유는 세상과의 동행, 혹은 삶의 조류에 따르는 일이기 때문” 이라고 했다.

 활화산같이 나오던 현실 고발과 역설을 통한 반항을 서슴지 않았던 화가 최락도. 그도 외면과의 타협을 원했던 것일까. 세상과의 단절의 시기를 이겨낸 그는 마음의 병은 어느 정도 다스렸지만 풀어 놓지 못하는 열정으로 인해 몸 한쪽이 굳어지는 병을 얻었다.

 마음은 열어놓을 준비가 되었지만 굳어진 몸 한쪽은 그를 자유로부터 가두어 놓았다. 어두움은 작품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우주류’ 는 자유를 향한 열망을 담고 있다. 그 스스로 “단순화의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완성시켜가는 경지를 추구하는 일” 이라고 말하듯이 그의 작품세계는 이 시기를 지나면서 명료해지고 시공(時空)을 초월한 관조자의 경지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아침 해가 뜨고 서산에 지듯 일정하지만 우주에서 보는 지구,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의미로든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생각에 빠져들면 그의 작품 세계가 어렴풋이 다가선다.

 그 단순화의 결실이 지금 그가 몰두하고 있는 ‘가을이 가는 소리’ 이다. 지난 2011년 전람회 때는 반원의 형태였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길을 담아내려 했다면, 내년 그의 필생의 혼이 담긴 우주류는 어떤 모습이며 무엇을 담고 있을까. 

 

스스로 낮춰 얻은 자아 성찰, 그리고 깨달음 

 

 군산 도심 속의 변방, 나운 주공 4단지 한쪽 귀퉁이에서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추상화가 아닌 반추상이 주류였으며, 주로 6호 정도의 크기였다. 집착과 반항에서 조금 비껴 선 듯 한 모습이다. 

 지금부터 10년 전, 일흔살에 들어선 최락도는 그 때까지 보지 못했던 밝은 청색톤의 색감으로 화폭을 채웠다. 좋은 작품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빠져나와 인생을 지긋이 바라보는 관조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대하는 모습. 비로소 ‘가을이 가는 소리’ 가 제대로 소리를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를 만나보니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이미 한발 움직이고 있었다. 추상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또 여든의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지난 2011년 전람회 때 할미꽃을 형상화 한 어머니 연작을 다시 시도하려는 생각이다.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이후,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담은 작품은 그의 화두였다. 

 없는 시골 살림을 꾸려가느라 머리에 일찍 서리가 내렸던 어머니. 화가를 한다는 아들의 말을 끝까지 믿어주었던 어머니가 없었다면 오늘의 그는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10년전 그의 할미꽃 작품에는 허리 펼 틈조차 없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그만 둬라’ 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잔잔히 베어들어 있었다.

 그 스스로가 “어머니의 강직함을 표현한 작품” 이라했던 ‘할미꽃 연작’ 은 그래서 칠십을 넘긴 화가의 심정이 보였다. 암울했던 시절을 견디어 낸 고통과 좌절의 상징색인 어두운 청색을 바탕에 깔고서 말이다.

 최락도 화백은 “할미꽃은 내 그림의 원초적 고향과 같은 것” 이라며 새로운 시도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 사모곡을 그렸던 그가 내년 전람회에는 어떤 사모곡을 보여줄 것인가 기대된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을 큰 허공에 담아내려는 게 최락도의 작품 세계이다. ‘공허, 아니면 허공의 화폭’이라고 이름 붙였다. 비움으로써 비로소 채움이 완성되는 그 세계를 보는 듯하다.

 난해하지만 난해하지 않고, 쉬우면서도 어려운 게 그의 작품이다. 오늘  “관람자가 꿈꾸는 세계가 그 그림의 나머지 부분을 채울 때 비로소 그 작품은 생명을 얻는다.” 라고 하는 그의 목소리가 새롭다. 

 인생 정리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 틀 안에서 자신의 경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식상하지 않고 너무 ‘대가(大家)’ 티가 나지 않아서 포근하다.

 손을 펴자 보이기 시작한 그의 무욕의 세계가 화폭 위에서 가만 가만 익어가기를 손 모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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