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회(夜會)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파티는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
서구식 상설연회는 1880년대에 들어서 정례적으로 각국의 외교관에게 연회를 베푸는 형식으로 출발하였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근대적인 조약을 체결한 후 미국, 영국등과 차례로 외교관계를 맺고 관사를 마련하여 상주하는 서양의 외교관들을 받아들였다. 이들과는 단기방문의 형태로 다녀가는 중국의 사신과 외교관계를 할 때 행했던 방식과는 다른 의전과 예법이 필요했다.
고종은 세계 각국에 조선의 외교관과 수신사, 영선사, 보빙사와 유학생 등을 파견하여 서양의 문화와 문물 등 정보를 수집했고 이들이 오가며 서양의 예식, 연회, 만찬, 공연 등의 문화를 접한다.
『구한국외교문서』에 의하면 1899년부터 1903년 까지 외부대신의 이름으로 미국공사관에 10여 차례에 걸쳐 보낸 연회 초청장에 명칭을 ‘야회’라고 밝힌 내용이 보인다.
황성신문 실린 고종황제의 어극 40주년 기념행사 일정표와 예식 절차를 보면 ‘석연’ 이라는 명칭의 연회가 등장한다. 내용은 시간, 공간, 드레스코드, 참석자를 특정 한 파티로 구성되어있다. 1903년 4월 28일 하오 8시 돈덕 전에서 서구식 최고의 예복인 대례복을 입어야하고 고종황제가 친림 한다는 기록이다.
야회나 석연은 시간의 개념을 근대식 연회에 사용했고 공간의 개념이 사용된 연회로는 원유회(園遊會)가 있다. 서양의 가든파티 Garden party를 궁궐에 도입한 연회의 한 양식이다. 조선시대 궁중의 연향은 궁궐의 내전과 외전에서 행해졌으나 원유회는 후원인 야외에서 서구식 파티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조선은 나라를 이끌어가는 통치이념으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예(禮)와 선한 심성을 깨워주는 악(樂)을 중시하여 그 제도를 연향에 담았다. 연향은 예와 즐거움이 함께하는 온 나라 온 국민의 잔치다. 궁중에서 연향이 열리면 노인과 가난한 백성들을 불러 배불리 먹이고 세금을 면하고 죄수를 방면하며 포상을 하였다. 당대 최고의 악기와 음악, 문학, 춤이 있고 음식과 복식이 등장했다. 의례절차에 따라 예식, 만찬, 공연이 한 공간에서 완성되는 종합예술이며 의궤를 통해 기록하고 전승했다.
고종황제가 서구식 연회에 동석하지 않은 예에 따라 예식은 접견 례를 따로 하고 만찬과 공연도 분리되어 갔다.
1904년 이전까지 작은 형태의 연회는 입식 식탁에서 행해졌다, 다수가 참여하는 경절 등의 연회에서는 뷔페가 행해졌다. 서양식 식기에 스프와 트뤼풀을 담고 커피, 샴페인과 셰리주(백포도주)등이 식탁에 올랐다.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한 후 일본인과 친일인사들에게 행사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원유회는 참석인원이 3,500명까지 증가했다. 궁궐 후원에 일본식 모의점(간이음식점)을 가설하고 돌아다니면서 일본 술과 소바, 스시, 오뎅, 단팥죽 등 일본음식을 코스요리처럼 먹으며 유흥과 향락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궁궐의 후원은 훼손되고 파괴됐다.
당시 창덕궁의 후원은 북한산에서 뻗어 내린 9만평이 넘는 깊은 수림에 백여 개의 누정과 폭포와 연못들이 어우러진 아름답고 격조 높은 공간이었다.
궁궐과 궁중 문화는 이제 모두에게 공유된 문화재이다. 예와 악이 함께한 궁중의 잔치 연향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예에서 섬김의 정신을 담고 악에서 흥과 끼가 어우러지며, 춤추고 노래하는 행복한 모던걸 파티, 이웃과 더불어 마음을 주고 받고 하나되는 축제.
이것이 진정한 '야회'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