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바람
봄바람을 흔히 꽃샘바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이름입니다. 봄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뿌리를 깨우는 바람입니다. 긴 겨울잠으로부터 뿌리를 깨워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는 바람입니다. 무성한 잎새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한 바람입니다. 꽃을 시셈하는 것이 아니라 꽃을 세우기 위한 ‘꽃세움 바람’ 입니다.
-중략-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바람속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눈감지 말고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깨워야 할 뿌리는 무엇인지, 우리가 선택하고 가꾸어야 할 우리의 얼굴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냉정하게 고민하여야 할 것입니다.
뼈아픈 희생을 치르지 않기 위하여, 가슴 아픈 불행을 답습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을 위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사회를 위하여. – 신영복 유고집 ‘아름다운 얼굴을 위하여’ -
신영복 선생이 2000년 4월 총선을 바라보며 중앙일보에 쓰신 글 중 일부입니다. 어쩌면 봄을 맞는 마음과 새로운 인물을 맞이하자는 선거와 어울어져 있음을 관철하신 지각이 아닌가 합니다.
올 새 봄 가장 커다란 관심은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아닌가 합니다. 탄핵 심판 [彈劾審判]은 헌법 재판소가 국민의 탄핵 소추에 따라 공무원의 탄핵을 할 것인지의 여부를 재판하는 일이고, 지난 12월 국회의 탄핵소추의결로 대통령의 심판이 임박해 있는 상황입니다. 국민들은 촛불문화제를 통해 전세계 유래없는 아름다운 정치집회를 만들어 냈고 행사에 참여한 연 인원만 해도 수백만에 이르는 전 세계 역사에 신기록을 세워나가고 있습니다. 일부는 탄핵이 옳지 않다고 하며 맞불 집회를 개최하고 여야는 탄핵심판의 인용에 대비한 각 정당 대선후보 정하기에 발 빠른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찌되든 새 봄이든 겨울이든 결국 누구를 어떻게 선택 할 것인지는 국민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정치인들의 얼굴은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들의 자화상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잘못된 선택과 잘못 만들어진 철가면 같은 얼굴에서 본래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얼굴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는지 되돌아 볼 때가 아닌가 합니다.
새 봄이 되면 저 마다 꽃이 피고, 그 꽃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아름다운 꽃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꽃으로도 나타날 수 있지만, 세상의 어느 하나가 저 홀로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어울진 모습으로 공존할 때 그 아름다움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임을 안다면, 올 새 봄 꽃을 부르는 바람이야말로 뿌리를 흔들어 깨우고 가지를 흔들어 힘차게 물을 올리고 겨우네 쌓아두었던 생명의 힘을 마음껏 올려내어 꽃으로, 잎으로, 가지로 되살아나 여름 생명의 시간을 거쳐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는 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어 다시 몸을 추스르는 생명연속의 새 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 봄엔 ‘꽃샘바람’이 ‘꽃세움바람’이 되어, 되려 차갑지 않고 가슴뭉클한 바람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