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이 고향이라는 이도 있고, 출생지가 어디든 어린 시절 나를 자라게 해 준 곳이 고향이라는 이도 있으며, 나의 조상이 대대로 살던 곳이라거나 나의 어머님이 살아 계신 곳을 고향이라 하는 이도 있을 만큼 고향에 대한 의미부여는 제각각이지만 고향이라는 두 음절 속에는 누구에게나 형언할 수 없는 아련함과 포근함이 배어 있을 터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향수가 고스란히 깃든 그곳은 언제든 나를 받아주고 모든 투정까지도 감싸주는 어머님의 품처럼 넉넉하고 정겹다. 꿈과 이상을 좇아 높이 솟아오르려 했던 젊은 날을 보내고 나이 들어 어느 때 부턴가 문득 고향이 그립고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은 인간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시골로 내려간다는 말은 있어도 올라간다는 말은 없고, 귀향(歸鄕)이라는 말은 있어도 귀도(歸都)라는 말은 없으니 고향은 시골의 또 다른 말이 아닌가 하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 영욕을 내려놓고 낮은 곳을 지향하려는 감성이 이는 것은 돌아갈 때의 가벼움을 위해서일까. 그래서 전원을 찾는 이들의 심성은 남달리 겸허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장의 귀향인들을 만나기 위해 필자가 찾아간 곳은 나포면 원주곡리 뜰아름 마을. 면(面)주민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정희 어른(73)은 지난 95년도에 귀향한 분으로서 자그마한 체구지만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눈매가 형형하고 카랑카랑하면서도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서 당찬 소년 같은 인상을 느끼게 해 준다. 담장도 없고 온갖 화초와 수목들로 잘 가꿔진 정원 입구에 멋스럽게 조각되어 세워진 솟대들이 운치를 더 해주는 뜰을 지나 집 안 마루로 들어서니 과일과 찻잔이 놓인 교자상이 방문객에게 편안함을 더 해준다. 실내의 은은한 온기는 한쪽에 설치된 벽난로 때문이었다. 마침 이웃 주민이자 역시 귀향인인 송준섭(68)씨, 그리고 이웃 마을인 부곡리 우곡저수지변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김채형(57)씨 부부도 같이 자리를 하게 되어 귀향과 전원생활에 얽힌 사연들을 들어 보았다.
귀향 당시 10여년 정도 지었던 농사일도 최근엔 힘에 부쳐 거의 줄이고 대신 취미 삼아 감나무 묘목이나 배추, 무, 파, 생강 등을 재배하여 필요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인심 넉넉한 마을의 유지로 칭송을 받기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겸손의 말씀뿐이다. 필자가 다른 이를 통하여 알게 된 이야기지만 정원에 멋스럽게 서 있는 금송(金松)도 누군가 찾아와서 상상을 뛰어 넘는 금액을 제시하며 팔 것을 간청했으나 정중히 거절하고 부인과 상의한 끝에 군산시에 기증하기로 하였다 하며 그 나무는 오는 봄 현재 신축중인 지곡동의 예술회관에 식수될 것이라 한다. 어른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오히려 쑥스러워 하면서 자신의 정성과 손때가 묻은 그 나무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먼 후일까지 예술회관의 마당에 우뚝 서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을테니 그 흐뭇함을 어찌 돈과 바꿀 수 있겠느냐 한다. 화초나 정원 가꾸기, 온갖 농작물 재배에 관한 경험과 식견, 솟대를 비롯, 왠만한 조형물은 척척 만들어 내는 범상치 않은 손재주,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전수하고 베푸는 어른이 있다는 것은 마을은 물론 우리 고장의 자랑 일뿐만 아니라 자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어 른의 집에 담장을 만들지 않은 것은 아무나 찾아올 수 있는 집이라는 의미이며 전원주택을 짓고자 하는 사람에게 조언의 말도 잊지 않는다. 전원주택은 절대 큰 평수가 필요 없다는 것. 난방비 등도 만만치 않고 관리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므로 덜렁 집만 크게 짓기보다는 뜰을 넓게 하는 것이 정서적으로나 실용적으로 훨씬 도움이 된다 한다. 이제 어른의 바람이 있다면 우리 지역에서에서도 재배가 가능한 것으로 확인 된 녹차나무, 그리고 할미꽃 재배에 관한 한 선도적 역할과 이의 확산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집마다 흉물스런 담장이 사라지고 푸르른 녹차나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누구든 나포방면에 귀향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박정희 어른을 찾아 가면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송준섭씨의 경우는 본래 김제가 고향이지만 나포에 정착한 케이스다. 이른 나이에 회사의 기술사원으로 해외 파견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프랑스와 독일에서 30여년 근무를 하였으니 인생의 절반을 타국에서 보낸 셈이다. 고향인 김제로 돌아가지 않고 나포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은 한국 땅이라면 어디든 고향이라는 생각에서다. 오랜 외국생활을 한 때문일까. 고향을 규정하는 관점이 다르다. 처음엔 바닷가가 좋겠다 싶어 태안반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안착할 곳을 찾아보기도 했으나 왠지 마음에 와 닿는 곳이 없다며 부인이 반대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인터넷 검색으로 선택한 곳이 나포였다. 나포에 와 보니 특별히 경치가 뛰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넓은 들판을 에워싼 아기자기한 산세며 아침 햇살 눈부신 커다란 금강 위로 날아오르는 철새들, 인심이 넉넉할 것 같은 마을 정경 등이 왠지 푸근히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약 700여 평의 땅을 매입하여 주택을 짓고 감나무, 밤나무, 땅콩 등을 재배하면서 부부가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다. 막상 농촌 일을 해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손이 많이 가고 힘에 버겁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외모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젊어 보인다. 은퇴 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원에서 땀 흘리며 유유자적함을 즐기는데서 오는 여유와 건강함이리라.
그런가 하면 김채형씨 부부는 시내 아파트에서 살다가 나포로 이주한 경우로서 부곡리 우곡(牛谷)저수지변에 약3,500여평의 토지를 매입, 2층의 목조건물을 지어 살고 있는데 정문에 ‘벧엘농장’이라는 문패가 달려 있다. 넓게 가꿔진 잔디밭과 아담한 정자, 그리고 소나무, 단풍나무 등 운치 있게 심어진 수목들이 멋스럽다. 무엇보다 집의 창문 밖으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저수지의 정경이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다. 건물 뒤쪽에 우리 전래의 옛 아궁이를 설치하여 장작으로 난방을 하는 모습은 시내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움이었고 난방비 절감도 겸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식이었다.
주택과 정원을 관리하면서 간혹 도움과 조언이 필요할 때면 박정희 어른께서 흔쾌히 멘토 역할을 해 주었다. 시내 아파트에 살 때만 해도 고령의 부친께서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했을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고, 모 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는 부인 역시 해마다 봄철이면 연례행사처럼 천식을 앓아 이만 저만 고생을 한 게 아니었는데 이곳으로 이주한 후로 부친과 부인 모두 건강이 거짓말처럼 호전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병을 고쳐주는 것은 약국이나 병원이 아니라 맑은 공기, 좋은 물, 좋은 흙이라는 믿음이 더욱 강해졌고 자연의 치유효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놀랍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물론 전원생활을 한다 해서 그러한 요소들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풍부한 감성,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정성을 다 하고 흙을 매만지면서 열심히 땀 흘린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결과일 것이다. 건물 내부를 들어가 보니 침대는 볼 수가 없고 아궁이 불로 난방이 되는 우리의 한옥 분위기가 접목된 안방에서부터 편안함과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또한 예사롭지 않은 민화풍의 그림들이 벽면 여기 저기 기품 있게 걸려있는데 부인의 작품이라 해서 놀랐다. 언뜻 보기에도 아마추어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뛰어난 솜씨였기 때문이다. 개인전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환갑 이후에나 하게 될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부부는 이곳 전원으로 들어 온 후로 부부의 금슬도 훨씬 더 좋아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같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대화시간도 자연히 많아졌고 보람도 같이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한 자연을 관조하는 시야도 새로워졌다. 오성산자락에 걸린 초승달이며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의 운율에서도 자연의 경이로운 숨결이 느껴진다. 자녀의 교육 문제로 시내를 떠날 수 없다는 사람에게 교육자적 입장에서 조언도 잊지 않는다. 유, 소년 시절은 절대적으로 자연 속에서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게 하고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통해 바른 자아의 형성과 감성을 풍부히 길러주는 것이야말로 인성교육의 첩경이라는 것이다. 시험만 끝나면 답을 잊어버리는 답습 적 주입식 교육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이토록 초, 중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후 다만 고등하교 진학 때 도시로 간다 해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으므로 아직 나이어린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참고가 될 듯하다. 끝으로 군산의 허파라 불릴 정도로 청정지역인 이곳에 언제부턴가 하나 둘 고물상이 자리를 잡기 시작함으로써 경관과 환경을 해쳐 ‘환경지킴이자원봉사단’을 발족할 계획이라며 환경이 훼손되는 것에 안타까움과 우려를 금치 못하는 표정에서 든든한 나포인의 모습이 읽힌다.
박정희 어른댁을 나와서 찾아간 이웃은 한경섭(58)씨 부부의 집이다. 이 댁은 올해 집을 지어 불과 한 달 전 경기도 고양시에서 이사를 온 경우로서 전남 고흥의 거금도가 고향이다. 그러므로 귀향이라기보다는 낙향(落鄕)이라는 말이 맞을 듯도 하다. 아무 연고도 없는 군산에 이주를 결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곳에 먼저 정착한 선배의 권유 때문이었다. 첨엔 꾐에 넘어간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직접 현지에 와서 살아 보니 과연 선배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터를 매입한 후 주택 설계는 롯데건설 건축부서에 근무하는 후배에게 부탁하여 건물을 지었는데 건평은 37평 정도의 철골 라멘 조 단층으로서 외양보다는 단열에 중점을 두었다. 시원하게 트인 앞마당 쪽으로 달아낸 테라스에서 한결 안정감이 더해지고 원목으로 내부 마감을 한 천정이며 주방 등에서 멋스러움이 묻어난다. 직장 관계로 고양시에 살면서도 태생 때문인지 항상 시골이 그리웠고 그래서 텃밭을 가꾸는 생활을 좋아했다. 한때는 은퇴 후 정착할 곳을 찾아 강원도 등지도 탐사해보았지만 전원생활의 경험자로부터 경치가 좋은 곳을 택하기 보다는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으라는 조언을 들은 후로 지형을 보는 관점도 달라졌다. 고향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는 서울 거주 자녀들의 반대가 심해 포기하고 말았는데 실제로 명절 때는 서울에서 고흥까지 꼬박 24시간 이상 소요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포에 이주 한 지는 불과 한 달 남짓 되었지만 하루하루가 다르게 왠지 정겹고 포근한 곳이라는 느낌이 더 해 간다. 이곳의 경관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예쁘기보다는 심성이 고운 여성의 모습을 닮았다고나 할까, 마음에서 포근함을 얻으니 불면증이 사라지면서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기쁨중의 하나다. 말수가 적으면서도 고운 심성이 엿보이는 단아한 모습의 부인, 그리고 큰 체구는 아니지만 다부지면서도 성실해 보이는 남편, 이 집 부부는 아직 인근의 지리도 익히지 못했고 친구도 사귈 기회도 없었지만 주말이면 손잡고 성당에도 나가고 이런 저런 문화의 공간에서 좋은 벗들도 사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 귀향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군산이 넉넉하고 포근한 정착지가 되었으면 한다. 서쪽 하늘을 물들이며 붉은 해를 삼키는 서해바다, 하늘을 뒤 덮으며 날아오르는 금강하구의 철새들, 높지 않은 산세 사이로 아름답게 조성된 크고 작은 호수변의 산책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들, 넉넉한 인심. 누군가의 돌아옴이 금의환향이든 비록 빈손이든 누가 그것을 따지랴. 그 사람이 가진 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논할 수 없다는 말도 있듯 성패 따위의 속된 기준은 필요 없다. 단지 고향이 좋아서, 전원이 좋아서라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된다. 자연은 넓고 관대해서 모든 것을 품으나 반면에 욕심과 오만함만은 용서하지 않으니 그저 한 없이 자연을 사랑하고 그와 동화되려는 겸손함이 준비되었다면 언제든 자연은 두 팔 벌려 그대를 맞이할 것 같다.